기다리는 사람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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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10-16 16:00
*** 기다리는 사람 / 요한복음 5:1-10
요한복음 5:1-10,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 들어가는 말
지금까지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설교한 것이 10여 편이 됩니다. 이 중에 거의 대부분이 대강절에 전했던 말씀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사용하는 ‘기다림’이라는 말은 대부분이 예수님의 초림 혹은 재림과 관계되어 사용되어 집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재림에 대한 부분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의 ‘소망’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려합니다. 즉 본문말씀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의 입장에서 보는 ‘기다림’의 의미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병자가 한 말인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는 말에서 이 병자의 한없는 기다림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다림!’ ‘소망!’ 이 말들은 무엇인가 애틋한 마음이 들게 하며, 한 줄기 빛을 갈망하는 마음을 느끼게 합니다. 아마도 우리 인생들에게 소망이나 기다림이 없다면 삭막하고 암담한 삶이 될 것입니다. 예전에 가을이면 꼭 라디오에서 들려주었던 ‘스잔나(사랑의 여울)’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해는 서산에 지고 쌀쌀한 바람 부네 날리는 오동잎 가을은 깊었네. 꿈은 사라지고 바람에 날리는 낙엽. 내 생명 오동잎 닮았네 모진 바람을 어이 견디리. 지는 해 잡을 수 없으니 인생은 허무한 나그네 봄이 오면 꽃피는데 영원히 나는 가네.”이 노래를 들으면서 생각난 소설이 ‘마지막 잎새’라는 글입니다.
미국의 소설가인 ‘O.헨리’의 단편소설인 ‘마지막 잎새’라는 작품은 너무도 유명합니다. 사춘기 시절에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눈시울을 붉히던 친구들도 많았지요.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존스’입니다. 존스는 폐렴을 앓으면서 침상에 누워 창밖으로 보이는 떨어지던 낙엽을 헤아리면서 간호해 주는 친구 ‘수우’에게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거라.’고 말합니다.
존스의 아래층에 사는 늙은 화가 ‘베어만’은 40년 동안 아직 걸작을 그려보지 못했습니다. ‘수우’는 노인에게 존스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정말로 마지막 낙엽과 함께 떠나가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합니다. 그날 밤에는 밤새도록 세찬 비와 사나운 바람이 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친구 수우가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창문의 커튼을 조심스럽게 올려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비바람에도 불구하고 벽돌담 벽에는 담쟁이 잎 하나가 그대로 붙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또 그 다음날도 마지막 잎새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끈질긴 마지막 잎새를 보면서 존스는 소망이 생겼고 병세가 호전되게 됩니다. 짐작하셨겠지만 그 마지막 잎새는 아래층 노인이 남긴 걸작이었습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절망적인 기다림에서 한 줄기 빛을 보는 소망으로 소생하는 모습입니다. 소망이란 이렇게 사람이 살아갈 힘이 솟아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원한 소망이 없으니 앞의 노래 가사처럼 당연히 인생이 허무한 나그네이겠지요. 하지만 절망 가운데 있던 38년 된 병자에게 주님이 오셨듯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진정한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시고 함께하십니다. 이 소망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예루살렘에 있는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에서 일어난 일을 소개합니다. 베데스다라는 이름은 ‘은혜의 집’이라는 의미인데, 예루살렘 북쪽 성문인 양문(羊門) 곁에 있는 저수지입니다. 이 연못은 길이가 100m 넓이가 60m쯤 되는 꽤 큰 직사각형의 연못입니다. 이 연못은 본래 빗물을 받아놓기 위한 저수지였는데, 그 바닥으로 간헐천이 흐르고 있어서 가끔씩 뜨거운 온천수를 뿜어 올리곤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보고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한 듯합니다. 그리고 ‘그 물이 움직이고 있을 때에 가장 먼저 연못에 들어가면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는 소문이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저수지 주변에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행각 다섯이 있었고, 그 행각에는 갖가지 질병으로 고생하는 많은 병자들이 요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믿고 병을 고쳐볼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명절에 예수님께서 이 연못 곁을 지나시다가 38년 동안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병자는 예수님의 물음에 엉뚱하게도 “물이 움직일 때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는 ‘병이 낫기를 바라지만 도저히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소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묻지 않으시고 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이적의 이야기 끝에는 그 날이 안식일이며 유대인들이 율법의 잣대로 병자를 정죄하는 모습을 덧붙였습니다.
이 베데스다의 모습은 무엇인가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염없이 기다리며 요행을 바라는 안타까운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중에서도 가장 소망이 없는 한 사람을 찾으셨고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라고 하셨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접근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적을 통하여 우리 인생이 참으로 가장 절실하게 소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끝 부분에 덧붙인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잣대를 통하여 우리 인생들이 얼마나 이기적인가를 보게 합니다.
※ 기다림에도 방향이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의 소망이 있을 것이며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기다림이 있을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동화 중에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고 소개된 동화가 있습니다. 이 동화는 주인공인 엘리스가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신비로운 세계를 여행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동화에는 ‘체셔 캣’이라는 말재주가 좋고 꾀가 많은 고양이가 등장합니다.
엘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찾다가 갈림길에서 ‘체셔 캣’을 만납니다. 엘리스가 중얼거리듯 “어떤 길로 가야하나?”라고 묻자, 체셔 캣은 엘리스에게 “어디로 가는데?”라고 되묻습니다. 엘리스는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체셔 캣은 웃으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어!”라고 대답합니다.
이 동화 속의 엘리스처럼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모르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자신의 삶의 방향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산다고 해도 단지 동물적인 생을 사는 것일 뿐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바라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즉 삶의 방향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세상적인 성공인지, 영적인 승리의 삶인지를 가늠하는 가장 본질적인 삶의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고난의 사람이었던 욥은 삶의 방향이 분명했던 사람입니다. 욥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그 고난의 의미를 욥기 23:10절에서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은 자신의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서도 아신다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생들에게 정하신 길이 분명히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잠언 16:9절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했으며, 시편 37:2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모든 인생에게는 반드시 자신만이 가야하는 길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무엇인가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염없이 기다리며 요행을 바라는 안타까움으로 가득합니다. 마치 우리가 가는 세상의 단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세상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리스도인이 모인 교회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 제각각입니다. 즉 삶의 방향이 한 곳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4:4-6절을 봅시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그리스도인은 나라나 민족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향한 한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지금 내가 소망하고 기다리는 것이나 나아가는 인생길의 방향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 당장 바꾸셔야 합니다. 우리 옛말에도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기다림이 신기루처럼 허망한 것이 되지 않도록 영적인 생명의 방향으로 향하게 하십시오.
※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십시오.
베데스다에는 육신의 질병을 짊어진 수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요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불분명한 전설의 이야기를 믿고 말입니다. 그들이 이렇게라도 하는 것은 요행이라도 바랄만큼 절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불행한 것은 이 베데스다가 위치하고 있는 장소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양문(羊門)이란 성전에서 제사할 때 사용되는 제물용 양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이 양문으로 들어서면 곧 성전 뜰에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이 가까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쩌다가 한 번씩 일어나는 확실하지도 않은 연못의 요행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마치 병원을 옆에다 두고도 그 고통을 감내하며 요행을 기다리는 환자와 같습니다. 이사야 1:4-6절을 봅시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통 병들고, 삶은 고통스럽고, 환경은 어두워만 가는데 여전히 형식적인 예배의식에만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탄식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아뢰면 될 텐데 이를 외면하고 허망하고도 아무 보장도 없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있습니다.
오늘이라고 다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곧 생명의 길이 온 세상에 선포 된지가 이미 20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죽음의 언저리를 방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수없이 ‘염려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성도들은 여전히 두려워하고 염려하며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립니다. 도와달라고 주님께 손만 내밀면 되는데, 아무런 힘도 없는 자신의 경험과 세상적인 재물과 권력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이사야 2:22절에서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시며, 시편 146:3,4절에서는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찾아주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고 이 이야기를 기록하셨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25절입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라고 하셨으며, 이사야 30:18절에서는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하십니다. 매일의 삶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고 사모하십시오. 시편 107:9절에서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시며 기다리고, 기도하면서 기다리십시오. 때가 이르면 반드시 만족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주의하십시오.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많은 목회자나 교인들이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할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구원을 시기하여 할 수만 있으면 뺏으려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은 다른 사람을 내 잣대로 평가하고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는 이런 일이 더욱 빈번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긍휼만을 기다리며 기도로 교통하십시오. 그리하여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두려움 없는 행복한 삶을 이루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