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지키십시오. 2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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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4-03 22:27
*** 생명을 지키십시오. 2 / 누가복음 10:25-37
누가복음 10:25-37,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 들어가는 말
생명의 소중함을 느껴보려면 극한지역을 여행해 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극한의 시베리아 혹은 알레스카, 열대 우림 혹은 사막지역 등을 여행해 보면 그 혹독한 환경에서도 살아가는 생명들을 보면 경외감마저 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 중에서 아마도 인간이 생명을 가장 경시여기는 듯합니다. 모든 생명은 모두 소중하지만 영(靈)의 생명의 소중함이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도록 높고 위대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소중함을 시편기자는 49:6-8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자기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미국의 그랜드캐니언과 솔트레이크시티를 지나 로키 마운틴으로 가는 15번 고속도로가 로키 산 정상까지 뻗어있습니다. 이 로키 산의 3000 미터 정도 위로는 마치 모자를 씌워 놓은 듯 나무가 전혀 없는 황량하고 험준한 산악지형이 있고 그 꼭대기는 만년설이 덮여있습니다. 마치 줄로 두른 듯한 이 선을 ‘수목한계선’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수목한계선 가까이에 있는 나무들은 한결같이 한쪽 방향으로만 가지들이 쏠려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무줄기도 하나 같이 곧게 뻗은 것이 없고 모두 무릎은 꿇은 듯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나무들이 이런 모양을 하고 있는 이유가 강한 바람과 혹독한 추위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나무들을 ‘무릎 꿇은 나무’라고 부른답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명품 바이올린 같은 악기들을 바로 이 지역에서 나는 나무들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유는 추위와 바람으로 나무 조직이 촘촘하고 단단하여 공명이 잘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나무들은 그 극한 지역에서도 기형적인 모양을 하면서까지 생명을 지켜갑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극한 환경을 이겨낸 나무는 그 쓰임새나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그러합니다. 히브리서 11:35-3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이러 고난을 당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영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이렇게 기쁘게 견뎠던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이 소중한 영의 생명을 지켜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생명을 지키십시오.’라는 제목으로 ‘생명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명을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생명을 지키십시오.’ 두 번째로 실천적인 예를 들어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소중한 생명을 위하여 우리가 깨닫고 실천해야 할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을 실천하는 삶’에 대한 비유적 가르침입니다.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율법을 잘 아는 율법 교사인 것을 아시고 ‘율법에서는 무엇이라고 가르치느냐?’고 되묻습니다. 그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정말 율법교사다운 정확한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율법사는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이야기하고는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자니이다.”라고 했고,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율법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요약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할 정도면 율법의 의도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비유속의 제사장이나 레위 인처럼 아는 만큼 행동하지를 못했습니다. 율법교사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1:46절입니다.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라고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실천하는 믿음과 사랑’을 강조하십니다. 즉 율법교사가 처음에 예수님께 물었던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님께서 실천적인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의미도 여기에 있습니다.
※ 영원한 생명을 지키는 길은 실천하는 삶에 있습니다.
본문 25-28절을 봅시다.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영생을 얻는 조건’을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즉각적인 대답은 ‘율법 즉 하나님의 법을 실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는 모든 것에 이론과 실제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에도 이론 즉 교리가 있고 실천적인 삶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뜻, 진리 등을 표현하는 교리 즉 이론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경험 즉 삶으로 아는 것이 다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착각하는 부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식적이고 교리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마치 영적인 삶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야고보 선생은 비유적인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야고보서 2:14-17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와 같이 교리적인 믿음, 이론적인 믿음은 아무런 능력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이 이런 이론적인 믿음을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집안에서 인터넷만 늘 하고 있던 청년이 채팅을 통하여 한 여성을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아가씨에게 매일 인터넷을 통하여 채팅하며 또 꽃집에 꽃다발을 주문하여 아가씨에게 보냈습니다. 청년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장미를 보냈는데, 드디어 100일째가 되는 날, 그 아가씨로부터 편지 한 통이 왔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열었는데 내용은 그 아가씨의 결혼식을 알리는 청첩장이었습니다. 멍한 마음으로 편지를 읽는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꽃을 보내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매일 장미를 보내준 덕분에 저는 매일 꽃을 배달해주던 꽃집 청년과 사귀게 되어 결혼하게 되었답니다.”
속된 말로 “죽 쒀서 개 준 꼴”이 되었습니다. 청년은 인터넷을 통하여 글을 주고받는 채팅을 했지만, 꽃집 청년은 매일 서로 얼굴을 보며 인격적인 교감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론적이고 교리적인 믿음은 하나님과의 교감이 없는 무미건조한 무능한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으로는 생명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야고보서 2:26절에서 이러한 상황을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영의 생명을 지키려면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합니다. 즉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행동의 근간(根幹)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가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행동하는 신앙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약 30km되는 거리로, 고지대인 예루살렘에서 저지대인 여리고까지의 고도 차이는 1km정도나 되었다. 그 길은 급경사와 바위가 많았으며 도둑들이 여기에 많이 숨어 있었다.). 강도들은 그 사람의 물건을 빼앗고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죽어가는 그 사람을 보고는 재빨리 피하여 지나갔고, 잠시 후에 레위인 한 사람도 그 곳을 지나다가 그 사람을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한 참 후에 여행 중이던 사마리아인 하나가 그곳을 지나다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기름과 포도주로 응급처치를 하고 자신의 나귀에 태워 가까운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다음날, 그 사마리아 사람은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비용 걱정은 하지 말고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아 주겠소.’라고 했습니다.” 이야기 후에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고,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의 행함이 없는 이론적인 믿음을 실천하는 신앙으로 바꾸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셨습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구약시대는 율법을 행하여 구원받는 행함이 중심이 된 시대이며, 신약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믿음의 시대이다.’라고 말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은 이론과 실천이 합하여진 행하는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나 누가복음 19장의 ‘므나 비유’는 모두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한 사람과 실천하기 않고 이론적인 지식으로 변명한 사람’ 두 부류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두 부류의 결말은 하나님의 명령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사람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과 상급이 주어졌지만, 실천하지 않고 주인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으로 변명으로 일관한 사람에게는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는’징벌이 주어졌습니다. 이 비유에서도 ‘영의 생명을 지키려면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실천적인 삶을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누가복음 19장에는 세리장 삭개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서 유숙하고자 했을 때에 삭개오는 이렇게 자신의 결단을 전합니다. 8-9절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가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보였을 때 예수님께서 그 가정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영의 생명의 길은 믿음을 삶에서 실천함으로 지킬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지키는 길은 하나님의 법을 실천하는 삶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고 힘들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살리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속죄 제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요한일서 4:9-10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런 사랑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우리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그래도 염치가 있는 삶이지 않겠습니까?
반포(反哺)라는 말을 아시지요? 어미 까마귀가 새끼에게 먹이를 씹어서 먹여 키우고, 그 새끼 까마귀가 다 자랐을 때 어미 까마귀가 먹이를 먹을 수 없게 늙으면 이제는 그 자식 까마귀가 먹이를 씹어서 어미를 먹여 살린다는 이야기에서 ‘반포(反哺)’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미천한 생물들도 반포의 삶을 삽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잊어버리는 염치없는 불한당들이 많습니다. 염치라는 말은 ‘부끄러운 것을 안다.’는 뜻인데,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순종하여 실천하는 염치 있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영의 생명을 지키는 확실한 길입니다. 우리 대복교회 성도들은 이런 염치 있는 삶으로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받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