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인생의 고난이 없을 수는 없을까요?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3,669회 작성일 2019-03-19 16:37
*** 인생의 고난이 없을 수는 없을까요? / 고린도후서 1:3-10
 
 고린도후서 1:3-10,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 들어가는 말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토로하는 것을 봅니다. 앞날이 불투명하고 삶이 팍팍하게 어려워지니까 사람들의 마음에도 여유로움은 사라지고 불안감에 따른 경직된 모습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작은 일에도 민감하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지금의 현실과 앞날에 대한 생각들이 긍정적이고 희망적입니까? 아니면 불안감이 있습니까? 생활은 힘들어지고, 경제적인 여건은 예전과 같지 않고, 자녀들은 성장하여 필요는 더 많아지고, 나이는 들어가면서 자신의 노후를 위한 준비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상황은 좋아지지 않고 있어서 염려가 되지는 않습니까? 삶이 좀 평탄하고 안정되었으면 좋겠는데 오히려 힘들고 어려운 고난이 겹치게 될 때 사람들은 무기력해지고 삶의 의욕을 잃게 됩니다. 자포자기(自暴自棄) 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지요.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런 고난이 없을 수는 없겠습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모두 우리가 사는 것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이런 고난에 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고난이라고 하면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가 욥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5:10-11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하나님께서는 고난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우리들에게 ‘우리 보다 앞선 믿음의 사람들과 선지자들의 삶을 본으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이 시간에는 우리가 본으로 삼아야 할 말씀들을 살펴보면서 위로와 소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내용을 봅시다.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의 서두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에게 있어서 아픈 손가락과 같았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있는 고린도 시는 여러 민족들이 섞여 있는 다민족문화를 이루고 있었고 상업이 발달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이기주의가 가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돈이 많이 돌면서 향락산업이 발달했고, 술의 신인 ‘디오뉴소스(박카스)’, 아폴로 신전, 아프로디테 여신전, 등이 있어서 우상숭배와 음행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 있는 고린도교회도 여러 가지 죄악들을 용납하고 있어서 바울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편지를 보냈지만 고린도교회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직접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여 책망하면서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후에 ‘디도’로부터 ‘고린도교회가 회개했으며, 사도 바울을 사모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고후 7:7).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이 이 두 번째 편지를 썼습니다.
 
이 두 번째 편지 서두에서 바울은 먼저 신앙을 지키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고난을 무릅쓰고 믿음을 지켜가는 성도들에게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4절)라며 위로합니다. 이러한 위로가 필요한 이유는 타락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려면 많은 손해와 고난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진실하게 살고자 한다면 세상에서 많은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8:17절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셨고, 디모데후서 3:12절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고난만 예고된 것은 아닙니다. 만일 고난만 있다면 무슨 맛으로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분명한 목적이 있으며, 고난에 상응하는 위로와 보상도 보장해 주십니다.
 
※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왜 고난이 있습니까?
 
19세기에 활동했던 많은 신학자 가운데 손꼽히는 미국의 신학자로 ‘포리’라는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연구를 했으며 많은 저서도 남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사랑하는 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리며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 이후 그의 신학은 더욱 깊은 삶의 의미를 담아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딸의 죽음을 통하여 이전에 머리를 통해서 깨닫지 못했던 신학을 깨닫고 많은 배움을 얻게 되었다.”
 
슬픔이나 고난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슬픔이나 고난도 알지 못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 마음뿐만 아니라 영혼이 성숙하게 되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119:67절에서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했으며, 71절에서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로보아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허락하시는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서도록 하십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일이 잘 되고, 건강하고, 삶이 평안하면 하나님을 찾기 보다는 육신의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이 꼬이고, 가정에 어려움이 닥치고, 건강의 적신호가 켜지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치면 사람들은 무엇인가 의지할 대상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 혹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에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본문 8-9절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고난을 사용하시는 것은 자녀들의 주의를 환기시키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이 주어질 때에는 원망하거나, 절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기도로 감사로 찬양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며 인내해야 합니다. 앞서 보았던 야고보서 5:10-11절을 다시 봅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이러한 인내는 큰 보상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죄에 대한 징계로도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에서 대표적인 예로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한 광야 40년의 생활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고도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를 받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대적했습니다. 그 결과로 40년이라는 긴 광야의 고난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배워야 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하염없이 요행을 기다리던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병 고침을 받은 그 사람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 고침을 받은 그 사람을 다시 만났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8장에 ‘간음 중에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여인을 정죄하던 사람들이 모두 물러간 후에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11절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 죄를 범했을 때에 그 징계로 질병을 비롯한 여러 가지 고난이 주어집니다. 이러한 때에는 인내하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바른 길로 돌이켜야 합니다. 노아의 때에 홍수로 멸망당할 때의 상황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37-39절입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노아가 100년 동안 산에서 방주를 만들면서 사람들에게 멸망을 전하면서 수없이 회개를 외쳤지만 사람들은 돌이키기는커녕 깨닫지도 못하고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모두 멸망당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4:14절에서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고난이 죄로 인한 것인지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위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 고난이 있을 때 고난의 유익을 찾으십시오.
 
어느 마을에 낚시를 좋아하는 아버지와 10살 된 아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몇 시간을 낚싯대 앞에 앉아 있었지만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 했습니다. 낚시를 마무리하려는 순간 아버지의 낚싯대에 큰 물고기가 걸렸습니다. 아버지는 흐뭇해하며 낚싯대에 걸린 물고기를 올렸는데 그 물고기의 배가 볼록한 것이 알이 가득했습니다. 그 마을에서는 어종 보호를 위하여 산란 어종 낚시를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설득하며 말했습니다. “아들아, 이 물고기는 풀어주고 그만 가자꾸나.” 그러자 어린 아들은 발을 동동 굴리며 “안 돼요. 이렇게 큰 물고기를 잡은 건 처음인데요.” 라며 울상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단호하게 아들에게 ‘물고기를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들은 중년의 나이가 되어 사업가로 크게 성공했습니다. 정직하고 모범적인 경영자로 뽑혀 여러 매스컴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성공 비결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제껏 아버지를 따라 정직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0살 때 아버지와 낚시를 하면서 배운 원칙이 오늘의 저를 있게 만들었습니다.”
 
낚시꾼들에게 산란 어종의 낚시를 금하는 원칙이 있듯이,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원칙을 따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고집하는 것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융통성이 없다고 혹은 바보 같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부르며 대적합니다. 분명히 세상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불이익과 손실을 동반하는 고난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지키는 고난보다는 말씀을 지킴으로서 주어지는 영광이 비교할 수 없도록 더 큽니다. 로마서 8:17-18절을 봅시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그래서 고난은 아무에게나 주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12:5-8절을 봅시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이렇게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으로 주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무겁게 하지도 않으시며, 피할 길도 열어주셔서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0:13절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세상에 물들고 세상에 빠져 살다가 생명을 잃지 않도록 때때로 어려움과 고통과 징계로 고난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난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더욱 큰 은혜가 준비되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뿐만 아니라 본문 5절에서 말씀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이 말씀처럼 고난을 인내하는 자녀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넘치게 됩니다. 욥이 고난을 당한 후에 그의 재산은 배가 되었고 더욱 아름다운 자녀들과 명성을 얻었습니다. 욥기 42:12절 이하입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암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그 후에 욥이 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세상적인 부와 명예와 권세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적인 편안함과 즐거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고난도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세상적인 안일과 즐거움의 결과는 영원한 고난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고난의 결과는 영원한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는 영생의 삶입니다. 인생의 고난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고난을 잘 인내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유익을 찾게 되면 더 영광스러운 삶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고난으로 인한 결과의 좋고 나쁨은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영적인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세계를 정복했던 나폴레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진정 행복했던 날은 일주일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3중장애가 있었던 헬렌 켈러는 “행복하지 않았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고 했습니다. 이는 영원한 생명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고난의 유익을 찾아서 주님이 이루시는 보상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Total 1,420건 21 페이지 RSS
설교모음 목록
No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1120
나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 늘푸른
  • 04-10
  • 4191
1119
생명을 지키십시오. 2
  • 늘푸른
  • 04-03
  • 3299
1118
생명을 지키십시오 1
  • 늘푸른
  • 03-27
  • 3400
인생의 고난이 없을 수는 없을까요?
  • 늘푸른
  • 03-19
  • 3670
1116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십시오.
  • 늘푸른
  • 03-14
  • 3556
1115
진정한 예배자가 되십시오
  • 늘푸른
  • 03-07
  • 4729
1114
하나님의 최고의 명령을 따르십시오1
  • 늘푸른
  • 02-22
  • 3919
1113
생명줄을 놓지 마십시오.
  • 늘푸른
  • 02-13
  • 3761
1112
하나님을 기뻐하는 찬송이 능력입니다.
  • 늘푸른
  • 02-07
  • 4406
1111
함정을 피하십시오.
  • 늘푸른
  • 01-29
  • 11744
1110
공의롭게 행해야 합니다.
  • 늘푸른
  • 01-22
  • 4172
1109
분별의 은사를 구하십시오.
  • 늘푸른
  • 01-16
  • 4167
1108
비전을 위한 열망
  • 늘푸른
  • 01-01
  • 4082
1107
진정한 부자입니까?
  • 늘푸른
  • 01-01
  • 12914
1106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까?
  • 늘푸른
  • 12-27
  • 4015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