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예배자가 되십시오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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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3-07 13:45
*** 진정한 예배자가 되십시오. / 말라기 1:6-11
말라기 1:6-11, “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주겠느냐?’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약속을 잘 지킵니까?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떤 형태로든지 약속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아마도 이런 약속을 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언제 한번 저녁이나 함께 합시다.’ ‘언제 한번 차나 한잔 합시다.’ ‘언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언제 한번 연락드리겠습니다.’ 등.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의 입에 붙어버린 말이 되어버린 “언제 한번”이라는 인사치레의 말이 있습니다. 영어에도 Let's get together sometime.(우리 언제 한번 보자)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정말인줄 알고 기다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처럼 지키지도 못할 인사치레의 말을 남발하지는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은 사랑과 진심이 담긴 말을 하고 약속을 하고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도 언제 한번 이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약속한 것은 없습니까?
세상에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는 몇 가지를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는 우리 입에서 나간 말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둘째는 활시위를 떠난 화살입니다. 셋째는 흘러간 시간입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가장 매정한 것은 세 번째의 흘러간 시간입니다. 지나간 세월은 천만금을 들여도, 아무리 후회해도 결코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 즉 시간은 철저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로마서 14:10-12절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우리가 살아온 모든 시간은 하나님 앞에서 낱낱이 드러나게 되며 또 우리 입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모든 삶의 시간을 돌아보면서 반성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길을 찾아야 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자로서의 삶입니다.
예배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앙의 요소라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예배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50:4-5절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어주는 언약의 증거는 제사 곧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확증하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길’ 아홉 번째로 ‘진정한 예배자가 되십시오.’라는 제목으로 ‘예배와 헌신’에 대하여 살펴보려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을 포함하는 ‘말라기’는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으로써 예언서에 속하는 책입니다. 저자는 말라기 선지자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나태하고 타락한 신앙 상태를 경고하면서 올바른 메시아 대망의 신앙을 일깨우기 위하여 이 책을 기록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1:6-2:9절에서 제사장들의 죄를 지적하며 심판을 선언합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제사장들의 가장 기본적인 직무였던 제사의식 즉 예배에 대한 죄를 말씀합니다. 이들의 죄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첫째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번거롭게 여긴 것(13절)이며, 둘째로 합당하지 못한 제물을 드린 것(7, 8, 13, 14절)이며, 셋째로 이런 죄를 범하고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 무지함(6,7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제사를 위해 온 마음을 다해야 할 제사장들이 오히려 그 제사를 부정하게 한다는 것을 책망하시며 탄식하십니다. 그리고 14절에서 그들에 대하여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특히 주목해야 할 말씀이 6절에 있습니다.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아버지로도 대우하지 않고 주인으로도 대우하지 않는다고 탄식하십니다. 그런데 더욱 답답하고 가관인 것은 그들이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도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성경말씀 속에 나타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니라 지금 우리들의 상태는 어떠한가?’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합니까?
※ 우리는 어떻게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까?
본문 6절을 봅시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게 예배를 집전해야 할 제사장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멸시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사장들이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라고 반발했습니다. 제사장들과 예물을 드리는 예배자들이 동일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체하면서 하나님의 진정한 뜻에는 전혀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오직 예배를 의식적으로만 거행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조목조목 그들의 허황된 예배 모습을 적나라하게 밝히십니다.
이스라엘 예배 자들의 첫 번째 모습은 ‘하나님의 제단에 더러운 떡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제단에 드린 ‘더러운 떡’이란 제단에 화제로 드리는 소제물(레 2:4-9)을 의미합니다. 제사장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였다면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은 순결한 떡을 정성껏 만들어서 제단에 화제로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러운 떡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라고 반발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형식적인 제물만 바쳤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삶에서 주인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자기들의 생명을 주관하는 주인이심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도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하고 불순종하면서 제물을 바치는 것이 더러운 떡이며 하나님을 경멸하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실을 사도 바울을 통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12:1-2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께서는 마음에도 없는 형식적인 예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마음을 읽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배하는 마음을 보십니다. 내가 영으로 진정한 음을 담아 찬송하는지 입술만 움직이는 노래를 하는지를 아십니다. 내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며 신뢰하며 기도하는지 형식적으로 기도하는지를 아십니다.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지 형식적인 말로 듣는지도 아십니다.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찬송하지도 않고, 믿음으로 기도하지도 않고, 말씀을 생활에서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드리는 예배가 더러운 떡이 됩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마음과 예물과 예배가 더러운 떡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스라엘 예배 자들의 두 번째 모습은 ‘온전하지 못한 제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위기에서 명령하신 제사제도는 조건과 방법이 확실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번제, 속죄제, 속건제, 감사제, 서원제, 화목제 등의 조건에 따른 제사의 종류들이며, 화제, 요제, 소제 등의 제사 방법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물의 종류에도 소, 양, 염소, 비둘기, 일년 된 것, 3년 된 것, 암컷 혹은 수컷 등을 흠이 없는 것으로 드리라고 정확하게 명시하셨습니다. 이는 제사의식이 형식화되지 않고 생활의 여러 요소에서 적절하게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조건에 합당하게 갖추어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제사가 온전한 제사이며 예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예배 자들이 행한 제사의 형식을 봅시다. 본문 8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주겠느냐?” 이스라엘의 예배자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흠이 있는 것들로 대충 드렸습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 당시에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예배자들이 돈을 가지고 와서 제물을 살 때에 제사장들은 흠 없는 제물에 해당하는 비싼 값을 받고 실제로 제물로 사용하는 동물은 눈 먼 것, 비루먹은 것, 병든 것 등. 값싼 동물들을 잡아서 제물로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답답한 마음을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주겠느냐?”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제물이 됩니다. 시간을 바치면 시간이 제물이 되고, 돈을 바치면 돈이 제물이 되고, 섬김과 봉사로 바치면 헌신이 제물이 됩니다. 아까워하거나 억지로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과부의 두 렙돈처럼 자신의 정성과 마음을 담아 헌금하는지 아까워하는 마음, 자투리로 조금 드리는 헌금인지를 아십니다. 고린도후서 9:6-8절입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많고 적음이나 크고 작음을 따지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성을 보십니다. 내가 하나님께 아깝게 여기고 인색하면 하나님께서도 나에게 주시는 것을 아깝게 여기시고 인색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기쁘게 자원하여 드리는 헌신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진정한 예배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4:23-2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영과 진리의 예배란 우리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과 제사장들은 모두 이렇게 하나님을 멸시하는 제물을 드리며 예배를 멸시하면서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기가 막혀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이런 헛된 예배를 하지 못하도록 성전 문을 닫아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배은망덕한 이스라엘을 버리고 이방 민족에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들보다 더 조심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기록한 로마서 11:17-21절을 봅시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자손들도 형식적인 예배를 할 때에 버리셨는데,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방인들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형식적인 예배를 한다면 두말 할 것도 없이 버림을 당합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싶다면 진정한 예배자가 되십시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마음을 굽혀 경배해야 합니다. 찬송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헌금을 드리거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을 다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예배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진정한 예배자의 삶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삶에 충만한 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