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롭게 행해야 합니다.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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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1-22 14:30
*** 공의롭게 행해야 합니다. / 로마서 2:1-11
로마서 2:1-11,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 들어가는 말
우리는 지금 2019년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길’에 대한 말씀을 계속 살피고 있습니다. 첫 주일에 ‘삶을 조각하십시오.’ 두 번째 주에 ‘분별의 은사를 구하십시오.’ 세 번째 주일인 오늘은 ‘공의롭게 행해야 합니다.’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길에 대하여 살펴보려합니다. 여러분 중에 혹 제가 ‘복에 대한 말씀이나 위로나 평안에 대한 말씀을 잘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복을 선포하고, 축복하고, 위로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한다고 그렇게 된다면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는 ‘이 모든 은혜와 위로와 평안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11:27-28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그러니 저는 하나님의 말씀만 확실하고 분명하게 전하고 여러분은 그 말씀을 생활 속에서 성실하게 순종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됩니다.
오늘 주제는 ‘공의(公義, justice)’입니다. 공의란 사전적인 의미로는 ‘의와 공평의 원리’라고 합니다. 이 ‘공의’는 하나님의 두 큰 속성 중 하나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덮어주고 품어주고 이해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공의는 옳고 틀린 것을 구분하여 바르게 세우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하였을 때에 용서하는 것은 사랑이며, 그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은 공의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다보면 구약성경은 온통 정의와 공의로 가득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출 21:23-25,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하게 한 것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이라고 하는 ‘동형보복(同形報服)’의 법이나, 행하고 지켜야 의롭게 되는 율법의 모든 것이 사랑의 모습은 없고 오로지 공의만 가득하게 보입니다. 반면에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오심부터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드러나고, 예수님의 행적과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의 모든 과정은 인간이 흉내도 내지 못할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사랑과 공의는 하나님의 동일한 두 속성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구원의 길로 주셨기 때문에 공의가 부각되었고,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믿음을 구원의 길로 주셨기 때문에 사랑이 부각되었을 뿐입니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지금 이 말세의 시대에까지 하나님은 동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을 신앙의 제일 덕목으로 여기는 만큼 공의도 동일하게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야 합니다.
※ 우리의 생활은 공의로움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의 공의로움이라면 어떤 것을 말합니까? 본문 1-3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세상에서 사용하는 불공정을 의미하는 비속어에는 ‘내로남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같은 것이라도 내가 하면 괜찮고 남이 하면 안 된다.’는 의미이지요. 또 다른 말에는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도 ‘같은 상황에서 잘잘못을 떠나서 자신과 가까운 사람의 편을 들게 된다.’는 불공정의 의미입니다. 쉬운 예로, 내 동생이나 내 자녀가 다른 아이들과 싸울 때에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혈육이라는 조건이 먼저 생각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생활 속에서 공정하고 공의로움을 이루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는 의와 공평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97: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히브리서 1:8절에서는 시편 45:6절을 인용하여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이처럼 사랑이신 하나님이시라도 그 보좌의 기초는 공의와 공평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주신 일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반대하며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7:23-24절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사람의 행동이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결국 편파적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비난의 표적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공의와 공평의 원칙은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삶에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본문 1절에서 사실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다른 사람이 정직하지 못하다고 비판하고 욕하면서 자신도 정직하지 못하게 행동하는 그런 행위를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종종 이런 모순된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압니다. 때로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하여 좋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도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쉽게 보게 되지요.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행동한다면 하나님께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 됩니다.
혹 ‘그러면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하신 말씀에 위반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경우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공정하고 편파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정의와 공의 위에 세워진 사랑입니다. 이 사실에 의문이 생깁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형으로 죽게 하신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살려주시려 하셨지만 빛이신 하나님께 죄가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그 죄를 해결하려면 누군가가 대신 그 죗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다 죄로 죽었기 때문에 부득불 성자 하나님을 세상에 사람으로 보내셔야 했습니다. 이렇게 성자 하나님이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나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 형틀에 죽으심으로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로마서 8: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리고 고린도후서 5:21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곧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에서 공의와 공평이 기초가 되게 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심판의 기초는 사랑이 아닌 공의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공의와 공평이 기초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본문말씀에서 밝히신 것처럼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5-8절을 봅시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세상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은 사람들이 자신이 행한 대로 보응 받게 되는 공의의 심판입니다. 이 때에는 결단코 팔이 안으로 굽는 일은 없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누가복음 13:24-27절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는 변명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교회 다니지 않았습니까?’ ‘내가 집사였습니다.’ ‘내가 수 십 년을 신앙생활 했습니다.’ ‘나를 좀 생각해 주십시오.’ 아무리 어떤 말을 해도 심판 때에는 기회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사랑이 아니라 공의가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사도행전 17:30-31절을 봅시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우리의 공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증거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공의이며,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공의와 공평, 사랑으로 행한 모든 행위가 두 번째 공의입니다. 요한계시록 22:12절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 이 뒤에 따라오는 말씀이 본문 7-8절입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이처럼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 앞에서는 우리의 공의로운 삶이 있어야 합니다.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였습니다. 노나라에 ‘복부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복부제가 ‘선부’라는 마을의 원님으로 있을 때 이웃 제나라의 군사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복부제는 즉시 ‘성문을 닫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때마침 봄철 추수기여서 성문 밖에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 있었습니다. 곡식을 아깝게 생각한 백성들은 원님에게 이렇게 청을 올렸습니다. “곡식을 적병들에게 넘겨줄 바에야 적이 도착하기 전에 모두 나가서 아무 밭에서나 자기 힘대로 걷어 가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복부제는 그들의 요청을 허락하지 않고 성문을 닫게 했습니다. 복부제를 존경하던 백성들은 그를 원망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복부제는 ‘적을 이롭게 했다.’는 죄목으로 왕의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복부제는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 년 지은 곡식을 적병들에게 빼앗긴 것은 아깝기 짝이 없는 일이오나 급하고 손쉽다고 해서 남의 곡식을 마구 베어 먹는 버릇이 생기면 그것은 10년이 가도 고칠 수 없는 일입니다.”
복부제의 말을 들은 왕은 멀리 내다볼 줄 아는 그의 식견에 탄복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죄의 버릇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손쉽다고 불공평하고 불의하게 행동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아무리 크고 견고한 돌담이라고 하더라도 작은 돌 하나씩 빼낸다면 결국 담은 무너지게 됩니다. 에스겔 18:21-22절입니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 24절입니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이 모든 삶에서 공의롭게 행하는 일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만큼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을 편협 됨이 없는 공평과 공의로운 삶으로 하나님께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