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을 위한 열망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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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1-01 22:22
*** 비전을 위한 열망 / 디모데후서 4:1-8
디모데후서 4:1-8,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며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본문말씀은 영생의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엄격한 명령으로 주어진 말씀입니다. 본문 1절에서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고 하십니다. 이후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비전으로 가진 사람에게는 반드시 따라야 할 내용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영생의 비전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토마스 카알라일’은 말하기를 ‘인간은 희망에 기초를 둔 존재’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 소유를 다 빼앗긴다 해도 나는 오직 한 가지, 희망만은 가지기를 원한다.’ 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항상 희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의 활기를 잃거나 삶에 회의를 가질 때, 절망스러울 때도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세계2차 대전 때 영국과 미국의 포로 2만 명이 수용되어 있던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8,000명의 포로가 사망했는데, 대부분은 영양실조도, 질병도, 과로도 아닌 절망으로 죽었다는 사실이 전후(戰後) 조사에서 판명되었습니다.
또한 제2차 대전 중에 6백만 명의 유태인이 학살되었습니다. 그 유태인들이 독일의 지하 감옥에서 무서운 고난을 당할 때에 그들이 수감되었던 한 지하 감옥의 벽에서 손톱으로 그린 다윗의 별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비록 태양빛이 우리에게 비춰오지 않지만 저기 태양이 있는 것을 믿노라. 비록 사랑이 지금 내게 느껴지지 않지만 저기 진실한 사랑이 있음을 나는 믿노라. 비록 하나님께서 침묵 가운데 계시지만 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노라.”
우리는 이 글에서 어두움의 절망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그 건너편의 승리를 바라보는 절실하고도 확신에 찬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바라는 ‘성공’과 ‘승리’는 결코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많은 고통과 인내와 훈련과 연단을 거친 후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성공과 승리를 원한다면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회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인간을 정의하기를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 즉 ‘희망하는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꿈과 희망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의 사람’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영광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5절 말씀처럼 이 고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고난과 고통은 감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부활도 함께 누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도의 소망에 대하여 ‘헤버걸’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렇다! 그 땅은 비록 저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한 발자국만 떼면, 한 순간만 지나면 고통은 지나가고 그 땅은 그대를 위하여 있게 되리니 그 때 슬픔은 기쁨이, 밤은 낮이 됨을 그대는 보게 되리라.”
그리스도인은 소망을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에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없어질 것이며, 육신이 죽음을 맞이할 때 가지고 갈 수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런 것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영원한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없어질 것으로 영원한 것을 예비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재능과 물질과 지식과 능력에 수고와 헌신과 사랑을 더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하고 아름다운 집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이지도 않는 이런 일을 소망하면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문 6-8절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최후의 승리를 약속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미 승리가 약속된 경주를 함으로 우리는 이 길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꿈)이 오늘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만일 꿈이 없는 사람이라면 한갓 미물처럼 오늘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면서 되는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태국과 등을 맞대고 있는 라오스의 ‘시폼 마을’은 인상적인 염전지대라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더욱 인상적인 것은 열대의 수목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는 끝없는 염전 풍경이 아니라, 그 염전을 연인삼아 살아가는 시폼 마을 염전지기들의 삶입니다. 인류학자들의 보고문서에 의하면, 시폼 염전의 염전지기들에겐 일생 동안 지켜 내려오는 두 가지 금기, 즉 두 가지 맹세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염전지기로 살아가는 한 결코 작열하는 태양의 직사광선을 피하기 위해 모자나 수건 따위로 머리를 가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따가운 태양열로부터 피하기 위해 차양의 그늘이나 양산의 그늘 아래로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라오스의 태양은 전 국토를 밀림으로 뒤덮이게 할 만큼 혹독하고 살인적인 열대의 태양임에 분명합니다. 이 태양 아래서 오직 자신이 염전지기라는 이유만으로 일생 동안 머리에 모자를 쓰지 않고 양산이나 차양의 그늘 아래 머리를 숨기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신념의 차원을 넘어서 차라리 신앙과 같은 것입니다.
일 년 내내 수고해봐야 몇 가마니의 천연소금을 얻는 것이 전부인 염전지기가 자신의 염전에 소금이 있게 하는 태양을 위해 바치는 정절도 그쯤이면 참으로 숭고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소망이 되는 소금을 만들 수 있게 하는 태양을 위한 정성도 그쯤이면 정말 신앙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의 그리스도인들은 라오스 시폼 마을의 염전지기들 만도 못할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단순히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출세하는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이 세상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원한 낙원인 하나님의 나라를 얻고자 하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단지 몇 가마니의 소금을 얻기 위하여 그처럼 단호한 신념을 소유한 염전지기들보다는 더 나은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15:21-28절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수로보니게 여인)’이야기만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개’로 취급되는 이방여인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조차 냉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여인에게 있어서의 예수님은 마지막 희망이자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자신의 딸을 고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딸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소망으로 가득 찬 가나안 여인에게 있어서 냉대와 모멸감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인은 외칩니다.
‘개라도 좋습니다. 하지만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이쯤 되면 주님을 향한 신앙은 없었을지라도 소망을 향하는 신념은 신앙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물론 바로 그 시간부터 딸의 병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여인이 소원을 이룬 것입니다. 여러분이 2019년에 이루었으면 하는 비전(소망)은 무엇입니까? 시폼마을의 염전지기나 가나안 여인과 같은 비전을 향한 열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격변하는 세계의 세상적, 영적인 상황과 환경 속에서 비전을 잃지 않고 하나님께는 영광이며 여러분의 삶에는 소망과 은혜가 가득한 복된 한 해를 이루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