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삶의 길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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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7-29 23:13
*** 풍성한 삶의 길 / 마태복음 6:25-34
마태복음 6:25-34,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 들어가는 말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물론 사람마다 원하는 것이 다를 수 있겠지요. 하지만 평균적으로 본다면 ‘염려 없이 사는 풍성한 삶’이 아닐까 합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힘들고 어렵고 가난하게 사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다르지 않겠지요. 오히려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 사람에게 없는 한 가지 소망이 더 있습니다. 육신의 풍성한 삶과 함께 영적인 풍성한 삶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일들이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는 않지요. 어쩌다가 어려운 환경을 만나서 생활이 힘들어지면 사람들의 마음에는 불안감과 함께 염려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본문말씀에서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원초적인 염려들입니다. 이는 모든 생명체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생존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염려는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산상수훈의 한 가운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자세하게 가르치십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내용입니다. 특히 본문을 포함하는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하여,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도 백미(白眉)로 꼽히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문학에서도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탁월한 가르침’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산상수훈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말씀의 첫 부분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5:1절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 이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산에서 가르치신 탁월한 가르침입니다. 이 중에서 본문말씀은 바로 앞부분에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내용의 세상 재물에 대한 말씀에 이어지는 ‘세상에서의 육신적인 삶에 대한 염려’를 다루십니다. 이 내용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는 ‘염려’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말씀의 핵심내용은 31-34절에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내용은 3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마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라면 이 말씀은 저절로 줄줄 나올 정도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 이 말씀을 거론하는 이유는 잘 알고 있는 만큼 실천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알고는 있지만 실천하기가 어려운 말씀입니다. 실천하기 힘든 이 말씀은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최우선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풍성한 삶을 보증하시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보증하시는 풍성한 삶의 길을 어떻게 갈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 가장 먼저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1983년에 유행했던 ‘내 인생은 나의 것(“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냥 나에게 맡겨 주세요.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나는 모든 것 책임질 수 있어요.”)’이라는 노랫말도 있듯이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주인이고 자신이 경영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의외로 많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사람들의 허탄한 생각에 대하여 경고하십니다. 4:13-16절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즉 사람을 포함한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1:21절입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고백이 진심으로 우러나야 합니다. 이 고백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내 모든 삶의 주인이심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심을 진정으로 인정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을 봅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은 진정으로 이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이 고백이 필요한 이유는 요한복음 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4절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7절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나님이 내 주인이심을 확실하게 인정하지 않으면 풍성한 삶을 이룰 수 없습니다.
※ 내 소속을 안다면 그곳에 삶의 우선권을 두어야 합니다.
‘펩소던트 컴퍼니’라는 기업에 ‘찰스 럭맨’이 사장으로 취임했는데 사람들은 그의 성공 신화를 부러워했고 그 성공 비결을 알고 싶어 무수한 질문을 했습니다.
"사장님의 뛰어난 머리가 성공 비결입니까?" "아닙니다. 제 학력은 별 볼 일 없는 수준입니다."
"그러면 물려받은 재산 같은 것이 원동력이 되었나요?" "아니요. 저는 무일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실제로 찰스 럭맨은 물려받은 돈도 없고 학력도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남자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사장이 된 것을 궁금해 하며 그 비결을 물어보았습니다.
"제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11년 전 했던 단 하나의 결심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을 중요한 순서대로 처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한 그의 충고에 어리둥절했습니다.
"쉽고 당연한 것 같지만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먼저 무엇이 더 중요한 일인지 결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그래서 매일 새벽에 일어나 오늘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며 어떤 순서대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하지만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더 어려웠던 것은 바로 그 계획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11년 동안 이 결심을 위해 노력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찰스 럭맨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이 분의 성공 이유는 ‘삶의 우선권을 정하고 그 계획대로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이 사실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다만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서 우선권을 정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일에 우선권을 둔다는 것이 다릅니다. 본문 25-31절에는 세상 사람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고민하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의식주(衣食住) 문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이 그리스도인의 우선권이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우선권은 33절에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앞서 본을 보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2:49-50절입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하신 모든 일은 성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뿐이었습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을 구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도록 순종하고 따르는 삶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을 보인 내용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믿음의 선조가 있습니다. 다니엘 3:16-18절을 봅시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거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있어서의 가장 우선권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당돌하고도 당당한 이들의 신앙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실천하는 삶의 우선권은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서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할 때 가능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자신들의 최우선으로 순종한 이들의 결과를 봅시다. 다니엘 3:28-30절입니다.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들을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29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더라. 30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이니라” 죽음도 불사하고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최우선으로 순종하고 섬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자신의 신앙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높은 지위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찰스 럭맨의 말처럼 우선권을 정하는 것까지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더욱 어려운 것은 그 우선권의 계획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삶의 우선권에 대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삶의 우선권을 정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예전 학생 시절에 방학 때만 되면 야심차게 생활계획표를 짰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 계획표대로 생활한 것은 얼만 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삶의 최우선으로 계획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 계획대로 실천하고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4절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길은 곧 우리가 풍성한 삶의 길로 가는 동일한 길입니다. 하지만 가는 길이 험하다고 포기한다면 영원한 생명뿐만 아니라 풍성한 삶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동물의 세계 다큐멘터리에서 나미브 사막이 나왔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아프리카 나미브 사막은 일 년 동안 비가 내리는 날이 열흘 정도입니다. 연평균 강수량은 해안지역에는 13㎜, 단층애 부근은 50㎜ 정도밖에 안 됩니다. 기온도 새벽에는 영하로 떨어지고, 한낮에는 40도, 지표면의 온도는 70도까지 올라가는 척박한 곳입니다. 이런 나미브 사막을 원주민들은 ‘아무것도 없는 땅’ 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혹독한 나미브 사막에도 살아가는 곤충이 있습니다. 엄지손톱 크기의 ‘거저리’라는 딱정벌레인데 이 곤충은 생존을 위해 해가 뜨기 전에 모래 밖으로 나와서 300m가량의 모래언덕 정상을 매일 올라갑니다. 작은 딱정벌레에게 300m는 사람으로 치면 에베레스트의 두 배나 되는 높이입니다. 죽을힘을 다해 올라간 거저리는 경사면의 가장 높은 끝에 다다르면 머리를 아래로 향한 채 똑바로 물구나무를 섭니다. 이렇게 몸을 곧게 세워 아래로 숙이면 등에 있는 돌기에 안개의 수증기가 조금씩 달라붙어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커진 물방울이 딱정벌레의 등을 타고 흘러 내려오면 마침내 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딱정벌레는 생명수를 얻으려고 해가 뜨기 전에 아침 이슬을 몸으로 받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혹독한 땅에서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작은 딱정벌레에게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환경이 열악한 탓만 하거나 생명의 길, 풍성한 삶의 길을 쉽게 포기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러한 우리 인생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본문 31-34절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풍성한 삶의 길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길은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6:9절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나님의 뜻을 삶의 최우선으로 정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순종한다면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 풍성한 삶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이 풍성한 삶에 이르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