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랑의 헌신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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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7-24 16:03
***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랑의 헌신 / 요한복음 15:9-17
요한복음 15:9-17,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 들어가는 말
오늘은 비유적인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할까 합니다.
옛날 깊은 산속에 거미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너무도 외로웠습니다. 어느 날 아침, 거미줄에 영롱한 빛을 내는 이슬 한 방울이 맺혔습니다. 친구가 없어 외로웠던 거미는 너무나 반가워 물었습니다. “너 누구니?” “응, 난 이슬이야.” 이렇게 통성명을 한 둘은 가까워졌습니다. 어느 날, 거미가 이슬에게 “우리 친구하자.”고 했습니다. 이슬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습니다. “응, 그런데 친구하려면 조건이 있어. 절대 나를 만져서는 안 돼.” 거미는 약속했고 그렇게 둘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거미는 이제 이슬이 없는 세상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거미는 사랑하는 이슬을 너무 만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거미는 이슬에게 “정말 너를 만지고 싶어”라고 했습니다. 이슬은 말했습니다. “너, 나를 많이 사랑하는구나. 그런데 나를 만지려면 내가 없어도 결코 외로워하지 않아야 해.” 거미는 너무나 좋아서 이슬을 꼭 안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이슬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은 이렇게 결론을 말 합니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주는 것입니다.”
오늘 무슨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지 짐작 가시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목표가 되는 은사인 ‘사랑’입니다. 이 주제는 제가 특별히 말하지 않아도 이미 여러분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사랑에 관한 말씀이 많지만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최고의 은사인 사랑을 말하면서 1절에서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고 했으며, 2절에서는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절에서는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결론인 13절에서는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은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 이런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우리가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사랑의 삶을 왜 그리고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보려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로 시작되는 ‘다락방 강화’입니다. 다락방 강화란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 있을 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과 제자들, 예수님과 그리스도인들의 관계를 가르치셨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는 것처럼 포도나무 되시는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가 살아있는 가지이며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의 제자들 즉 그리스도인들이 머물러야 할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본문 9-10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머물러야 할 삶의 자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기초가 되는 삶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13-14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택하신 목적이 항상 열매를 맺는 삶을 이루어 하나님께 구한 것을 받아 누리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사랑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의 삶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 사랑의 삶을 이루기 위한 첫 걸음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재의 삶이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압니다. 이처럼 실재하는 사랑의 삶을 이루기 위한 첫 걸음은 활동하는 사랑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앞의 예화에서처럼 예로부터 사람은 무엇이든지 소유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사랑도 예외가 아니어서 자신만의 사랑으로 소유하려는 욕망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보관하고 간직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9절에서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시며, 10절에서는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2절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거한다.”는 말은 ‘그 안에서 계속적으로 산다.’는 의미입니다. 즉 “거하라.”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계속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잠언 27:5절에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면책”이라는 말은 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발가벗긴 듯이 책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아주 민망하게 하는 질책’을 의미하고, “숨은 사랑”이라는 말은 ‘숨겨놓은 사랑’을 말하는데 ‘사랑을 활용하지 않고 그저 가지고만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을 종합하면 ‘상대방을 민망스럽도록 책망하는 것이 숨겨놓고 표현하지 못하는 사랑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표현해야 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삶을 이루려면 먼저 잠재해 있는 자신의 사랑이 활동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본문 12-14절을 봅시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최고의 사랑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입니다. 성경에 아주 좋은 예가 있습니다. 바로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과 이새의 아들 ‘다윗’의 사랑입니다. 요나단의 다윗에 대한 사랑을 다윗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무엘하 1:26절입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요나단은 자신의 아버지 사울 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또한 자신의 아버지인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무엘상 20:16절입니다.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이 말은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안을 치시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왕의 대를 잇는 자신의 자리까지 내놓았습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사랑의 삶을 이루려면 사랑이 나의 생활 속에서 실재로 활동하게 해야 합니다. 즉 자신의 마음에 가라앉아 있는 사랑의 마음을 일으켜서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사랑의 삶을 이루어야 합니까?
※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은 사랑으로 이루는 삶입니다.
요한일서 3:21-24절을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삶의 요소인 담대함과 기도의 응답과 주님의 내주하심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사랑으로 이루는 삶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길이 사랑으로 이루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최고의 사랑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친구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희생’(물론 목숨을 버리는 것만을 희생이라고 하지는 않는다.)이라고 하며,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순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높고 아름다운 상급이 순교자의 상급이라고 합니다. 지금 북한의 성도들에게는 아직도 순교자가 속출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환경에서는 순교자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세계에서도 불교권의 나라나 이슬람권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순교가 가장 고귀하지만 순교적인 환경이 아닌 곳에서는 이에 버금가는 것이 곧 사랑의 헌신입니다. 요한일서 4:20-21절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이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기 이전에 내 삶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어느 날,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서 무엇이라고 하느냐?”고 물으셨고 율법교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대답이 옳다. 이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율법교사가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강도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비유로 들려주셨습니다. 곧 ‘강도를 만나 다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아주는 사람이 진정한 이웃이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지금의 우리가 삶에서 나타내야 하는 사랑의 헌신은 어떤 것입니까?
야고보서 1:27절을 봅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그리고 2:14-16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 말씀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과 경건한 삶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공통점은 ‘어려움을 당하거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의 삶을 돌본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처럼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거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돌보려면 당연히 필요한 것이 자신의 시간과 돈과 노력 등입니다. 이러한 것을 다른 말로 하면 희생이고 헌신입니다. 자신의 것을 희생하지 않고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사랑의 삶을 위하여 무엇을 희생하고 헌신할 수 있겠습니까?
미국 방위사업체 CEO인 ‘빌 스완스’가 편집한 ‘책에서는 찾을 수 없는 비즈니스 규칙 33가지’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중에 ‘웨이터의 법칙’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당신에게는 친절하지만, 웨이터에게 무례한 사람은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부분에서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서빙 하던 웨이터가 실수로 그중 한 명에게 와인을 쏟았습니다. 옷을 버린 손님은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지금 미쳤어? 내가 누군지 알아? 여기 지배인 나오라고 해!” 이 사람과 동석한 사람은 ‘브렌다 반스’라는 의류 업계의 거물이었는데, 그녀는 이 모습을 보고 당장 거래를 취소했습니다.
유명 IT기업인 위트니스 시스템의 ‘데이브 굴드’ 대표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상대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침 아침에 샤워를 못 했는데 잘됐네요. 양복도 사실 싸구려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 모습을 본 데이브 굴드는 그 자리에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글을 편집한 ‘빌 스완스’는 “다른 건 몰라도 이 법칙만큼은 예외 없이 정확하다.”고 했습니다.
미움이 가득한 눈에는 주변의 모든 것이 밉게 보이는 법입니다. 그 미움이 색안경처럼 다른 것들을 보는 시선을 감추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고집이 가득 찬 편견은 눈가리개 보다 더 사람의 눈을 캄캄하게 가려버립니다. 편견과 미움으로 눈을 가려 버리면 편견과 미움밖에 볼 수 없습니다. 반대로 미움 대신에 사랑으로 채워진다면 모든 것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다정하게 보이게 됩니다. ‘오브레이 드 베르’는 “편견은 마음에 드는 것만 보고, 있는 그대로는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친구’라고 불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이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사람으로 택하신 목적을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우리의 생활이 사랑과 헌신의 삶이 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존 웨슬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라.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시간에,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할 수 있는 한 언제까지라도…” 우리의 영원한 행복의 삶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사랑과 헌신의 삶을 이루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