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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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7-04 13:52
***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마태복음 1-:24-33
마태복음 10:24-33, “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26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 들어가는 말
덴마크의 유명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병은 절대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상 살기 겁난다.’고 합니다. 워낙 ‘묻지마 살인’ ‘분노조절장애자들의 폭력’ ‘각종 사기행각과 범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부쩍 자살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모양을 다르지만 이런 부조리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일들이 있어왔습니다. 다만 이러한 환경과 일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절망이 될 수도 있고 오히려 희망과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어려운 환경과 일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기회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로 “사람의 절망이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절망하게 될 때에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시면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3-24)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놀라면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사람이 생각할 때는 절망적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선 23대 왕인 순조 때에 의좋기로 유명한 형제 정치가가 있었습니다. 정약전(丁若銓)과 동생 정약용입니다. 이 형제는 함께 정순왕후의 천주교 탄압 때(3,000명 순교)에 각각 흑산도와 장기현(長鬐縣)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역사는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년)라고 합니다. 정약전은 16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흑산도 근해의 생물을 직접 채집하고 관찰하여 ‘자산어보(玆山魚譜)’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내용이 정확하여 오늘날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 천주교 신자였던 정약전은 16년의 고독한 유배 생활을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희망의 기회로 바꾸었습니다.
사노라면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다만 어려움을 당할 때에 중요한 것은 그 일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상황을 새롭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비록 요즘 세상 말에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도 있지만,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이 진실하고 능력 있는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거나 소리 지르지 않습니다. 옛 말에도 “짖는 개는 물지 않고 물려는 개는 짖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지금 세상의 시끄러운 환경과 소음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 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까?
요한일서 4:18절을 봅시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자는 겁이 많지요? 그런데 자식을 보호하려는 어머니는 죽음도 불사하고 담대합니다. 그렇게 담대한 이유는 ‘사랑’입니다. 즉 자녀를 향한 진정한 사랑의 힘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11-13절에서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목숨까지도 주셨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사랑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사랑이 없게 되면 모든 것이 두려워집니다. 이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른다고 했는데 이유는 세상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곧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1:8절을 봅시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둘째 사망 즉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되는 8종류의 부류들 중에 첫 번째 부류가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로 꼽힌 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 29-31절을 봅시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누차 말씀드린 대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는 것은 ‘별 볼일 없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같은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12:6절에서는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앗사리온은 로마의 화폐인데 동전입니다. 이 돈은 데나리온의 1/16정도의 가치입니다. 즉 장정 하루 품삯을 8만원으로 본다면 한 앗사리온은 5,000원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재미있게도 두 앗사리온에 참새 다섯 마리를 준다고 했습니다. 한 앗사리온에 참새 한 마리인데, 두 앗사리온 어치의 참새를 사면 덤으로 한 마리를 더 끼워줄 정도로 보잘 것 없는 생명을 뜻합니다.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생명까지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죽지 않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된 사람들입니다. 즉 ‘너무도 소중하게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명을 어떻게 소홀하게 대하겠느냐?’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신 표현입니다. 로마서 8:32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우리를 속속들이 아시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내주셨는데 무엇인들 자녀들에게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지 않으면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결코 죽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7:30절에서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불신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한다면 통탄할 일이며 화가 날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세상 사람들의 불신적인 삶에 대하여 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2:2-6절을 봅시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불신하고 의심한다면 이들과 똑같은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의 일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보며 흔들리지 않는 순종의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본문 28절을 봅시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본문의 병행구절인 누가복음에서는 좀 더 자세하게 표현합니다. 12:4-5절입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이 말씀의 요지는 ‘세상 사람들이야 기껏 육신을 죽일 수 있을 뿐이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육신이 죽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털끝도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참새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죽지 않는데,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허락 없이 죽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 때문에 여러 가지 핍박과 어려움들을 당하게 됩니다.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현상을 미리 예상하고 있으라고 본문 24-2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26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에 박해와 어려움을 당하셨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당연히 세상으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낱낱이 헤아리고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 없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27절에서 세상이 두려워 숨어 있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까지도 멸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긴 사람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셔서 우리 영혼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소유였지만 죄에 팔려 죄의 종이 되었던 우리를 예수님이 구속하셔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12-13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그리고 로마서 6:17-18절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렇게 죄에 팔려 죽은 우리를 살리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로마서 8:15절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이처럼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을 영원한 형벌에 던지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사람이나 환경이나 세상적인 힘을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소설 ‘빙점’으로 유명한 신실한 신앙인인 ‘미우라 아야꼬(Miura Ayako, 三浦陵子)’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서로 알게 된 사람은 모두 자기의 책임 범위 안에 속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사람이거든요.”
미우라 아야꼬의 말처럼 세상은 우리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본을 보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대상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지내는 대상이나 여러분에게 주어진 일들은 우연히 알게 되거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무엇인가 이루시기 위한 대상입니다. 여러분이 그 목적을 모른다면 주인에게 물어보셔야 합니다. 제 기도 목록에는 오늘 내게 주어진 일과 만나야 할 대상에 대하여 하나님께 여쭈는 것이 항상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 32-33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이 말씀은 우리의 일상에서 주어지는 일들과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시인하겠습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다.’라고 소리 지르고 다니면 되겠습니까?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하면 됩니다. 사실 거리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 사람에게 내가 돈을 주어야 할 의무도,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도와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내 몸과 내 시간과 내 적은 물질을 들여 누군가를 돕는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시인하는 삶입니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신의 생명과 삶도 모두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존재는 로마서 8:38-39절의 말씀처럼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끼치는 담대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