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어진 길만 갑시다.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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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6-26 19:32
*** 내게 주어진 길만 갑시다. / 요한복음 21:18-23
요한복음 21:18-23,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 들어가는 말
속담에 “오지랖이 넓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은 설교 초입에 오지랖 이야기부터 해보겠습니다. ‘오지랖’은 상체에 입은 겉옷의 앞자락을 말합니다. 조선 초기까지는 저고리에 오지랖이 없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저고리라 부를 수도 없게 골반쯤까지 덮이는 길이라서 짧은 목욕가운처럼 허리끈을 둘러서 여몄습니다. 그러다가 저고리 길이가 점점 짧아져 허리 위로 올라오자 허리띠 대신 저고리 안팎에 속고름, (겉)고름을 달아서 그것을 묶어 여미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에서 보면 속이 다 들여다보이니 어쩔 수 없이 천을 한 치가량 덧댔습니다. 그 덧댄 부분이 오지랖입니다. 그런데 왜 이 오지랖 넓은 게 조롱거리가 됐겠습니까? 모양대로 말한다면 ‘오지랖이 넓다.’는 말은 “그래, 네 오지랖이 그리 넓어서 네 앞가림은 참 잘하겠다.”는 뜻입니다. 이 말이 ‘그래, 너 참 잘났다.’는 말로 ‘주제 모르고 아무 일에나 쓸데없이 참견한다.’의미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이 오지랖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도 표현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15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라고 했습니다. 이는 쓸데없는 일로 고난을 자초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시작부터 오지랖에 대하여 말씀드린 이유는 예수님께서도 본문에서 베드로의 오지랖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본문말씀에는 바로 앞부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목양을 맡기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면서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베드로로서는 예수님의 이 물음이 무척 곤혹스러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며칠 전에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에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평소처럼 나서서 대담하게 대답하지를 못했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아주 낮은 마음으로 부드럽게 대답합니다. 이 물음과 답이 세 번씩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목양을 당부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앞날의 일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본문의 첫 절인 18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짧은 순간에 여러 생각이 교차했을 베드로는 자신에게 쏠린 관심을 돌리려고 했던지 옆에 있던 요한에게로 화두를 바꾸었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원래 오지랖이 넓었던 베드로가 마지막까지도 그 오지랖을 발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의도를 냉정하게 잘라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네 자신의 길에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의 일에 쓸데없는 관심 갖지 말고 네 자신에게 주어진 길에 마음을 두라.’는 것입니다. 오지랖 참견에는 ‘내가 너보다 더 잘 안다.’는 우월의식, 또는 ‘관심과 인정을 받고 싶은 인정욕구’라는 심리가 깔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을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13-14절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고백합니다. 즉 ‘다른 사람이나 다른 일에 간섭 하지 않고 주님이 주신 사명의 길만 간다.’는 것입니다.
※ 내게 주어진 길을 아십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소명과 관계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왜 부르셨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막연히 ‘예수님만 믿으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영원한 영적인 어린아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영적인 어린아이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5:12-13절(현대어성경)입니다. “여러분은 벌써 오래 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남을 가르칠 만도 한데 아직도 하나님 말씀의 초보적인 원리도 채 이해하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을 만큼 크지를 못하고 언제까지나 젖만 먹는 갓난아이에 머물러 있습니다. 젖만 먹는 사람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장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올바른 일을 실천함으로써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게 되어야만 비로소 단단한 음식을 먹고 하나님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리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도 제한적임을 뜻합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칼이나 위험한 도구, 많은 돈을 맡기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원한다면 신앙의 삶에서도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장성한 사람은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건축공사현장을 지나다가 흥미로운 일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인부들이 리어카를 쳐다보며 밀고 가는데, 한 인부는 앞에서 끌고 가는 것입니다. 한참을 바라보던 학자는 앞에서 끌고 가는 인부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수레를 보면서 밀고 가는데 왜 당신만 끌고 갑니까?”
그러자 그 인부는 별 이상한 사람 다보겠다는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수레를 하도 밀고 다니다보니 꼴 보기 싫어서 그러네요.”
그 순간 심리학자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수레를 밀고 가는 사람은 늘 수레만 봐야 하고 무거운 짐만 봐야 하지만, 수레를 끌고 가는 사람은 앞의 여러 가지 상황을 볼 수 있고, 하늘과 땅, 세상을 볼 수 있는 거야!”
오늘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에만 빠져서 아등바등 인생의 삶에 허덕이며 삽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니 ‘왜 이렇게 사는지.’ 한심하기도 하고,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일투성이에 여유가 없는 답답함에 주저앉기도 합니다. 이는 리어카를 보면서 밀고 가는 사람처럼 자신의 앞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무게를 뒤로 하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분명하게 설정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을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400년이 넘는 오랜 신앙의 침묵을 깨고 세례 요한이 일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자 사람들이 요한에게로 몰려왔습니다. 요한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으로 돌아오라.’고 전하자 사람들이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누가복음 3:10-14절입니다.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11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이 내용을 요약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성실하고 진실하게 행하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알려면 먼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은사를 찾아야 하고, 지금 주어진 자리에서 성실하고 진실하게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길을 찾아서 하면 됩니다. 그리고 나에게 일을 맡기신 하나님께 항상 물으십시오.
※ 내게 주어진 길을 어떻게 가야 합니까?
지금 우리나라의 형편이 제대로 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정치가는 국민의 삶에는 안중에도 없고, 경제는 무너지고, 국방도 무너지고, 문화는 온갖 더러운 성문화를 국가가 앞장서서 부추기고, 도덕도 윤리도 무시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나 하나 잘 한다고 되나?’라며 방관하거나, 비난하고 탄식하지만 고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시편 53:1-3절에서 다윗도 그 시대상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방관하든 비난하든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다면 모양은 다르다 하더라도 같은 부류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게 주어진 길을 어떻게 가야 합니까?
남미 안데스 지방에 사는 키추아 원주민에게서 전래되는 이야기를 각색한 ‘츠지 신이치’의 ‘황금새 크리킨디 이야기’라는 글이 있습니다.
옛날 미국 남쪽 안데스지방의 아마존 숲에서 어느 봄날, 산불이 발생해 불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숲에 사는 여러 동물들은 불난리를 피해 앞 다투어 도망쳤지만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불길에 휘말려 불쌍하게 죽은 동물도 있었습니다. 숲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크리킨디’라는 이름의 벌새만은 주변의 호수로 왔다 갔다 하며 부리에 물을 한 모금씩 담아 와서는 산불에 떨어뜨리고 갑니다. 다른 동물들이 그 광경을 보고 저마다 벌새를 비웃었습니다.
“그런 일을 해서 도대체 뭐가 된다는 거야?”
크리킨디는 그 동물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야.”
카추아 원주민들은 이 이야기를 전래하면서 ‘이들은 환경이 어떠하든지 오직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한 의미입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다른 사람이 사는 방식에 대하여 네가 상관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즉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하든, 환경이나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각자 부르신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충실하기를 원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한 소명자로서의 삶을 실패하는 이유가 ‘결과까지 자신이 주장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어떤 일을 할 때에 그 일의 결과는 무조건 자신이 의도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을 내든지, 실망을 하든지, 좌절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왜 이렇게 되었을까?’ ‘혹 하나님의 뜻이 다른 데 있는 것일까?’라고 생각해보지 않습니다. 즉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내게 생명을 주시며 일을 하게 하시는 주인의 뜻에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예레미야 33:2-3절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리고 잠언 16:1절에서는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고 하셨고 9절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 되심을 믿는다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므로 오직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내게 주어진 일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곤충학자로 유명한 ‘장 앙리 파브르’가 날벌레들의 생태를 관찰하던 중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여러분이 여름 오후 무렵이면 날벌레들이 떼를 지어 빙빙 돌며 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날벌레들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무턱대고 앞에서 날고 있는 날벌레만 따라서 빙빙 돈다.’는 것입니다. 어떤 방향이나 목적지도 없이 그냥 도는 것입니다. 파브르는 실험적으로 날벌레들이 빙빙 돌고 있는 바로 밑에다 날벌레의 먹이를 가져다 놓았지만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돌기만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무턱대고 7일 동안이나 계속 돌던 날벌레들은 결국 굶어서 죽어 간다고 합니다.
어느 통계자료에 따르면 ‘아무런 목표도 없이 파브르가 관찰한 날벌레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전체 인류의 87%에 이른다.’고 합니다. 우리 소중한 인생을 이렇게 무기력하고 무의미하게 다른 사람의 일에나 간섭하고 무작정 살다가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자신의 길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짧은 인생을 살면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오직 주님이 주신 자신의 길을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갈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