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선택을 위하여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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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6-12 15:14
*** 더 나은 선택을 위하여 / 히브리서 11:33-40
히브리서 11:33-40,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 몇 번이나 선택을 했습니까?
예컨대, ‘어디를 가지?’ 라며 다른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택하였다든지, ‘무엇을 입을까?’라는 옷 선택, ‘무엇을 먹고 가지?’라는 음식문제 등. 여러 가지 선택의 조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매일 무엇인가를 선택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선택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르게 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따르게 됩니다. 즉 내가 선택한 일에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어떤 급한 일 때문에 목적지로 가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택시를 선택했는데, 하필이면 그 도로의 공사로 정체가 심하여 약속시간에 늦었다면 그 책임은 자신에게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택하기 전에 미리 어떤 결과가 주어질지를 계산하고 선택하기도 합니다. 본문말씀에도 결과를 예상하는 선택의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본문 35-37절입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런 끔찍한 고통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않았을까요? 입장을 바꾸어서, 만일 내가 이들처럼 이런 고난이 예상된다고 하더라도 피하지 않고 맞설 수 있을까요?
시작부터 심각한 질문 때문에 마음이 무겁고 부담스럽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런 질문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매일 스스로에게 해야 하고 확실한 답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에 부담스러운 이런 생각을 굳이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문제가 너무도 당연하고 필연적이지만 거론하기를 꺼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의 선택에 관한 문제는 우리 마음에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급작스럽게 이런 일이 닥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분명한 의사를 밝힐 수가 있게 됩니다. 이런 것이 ‘영적 깨어있음’입니다. 요한계시록 16:15절입니다.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계시록 7복 중 세 번째 복인 이 말씀은 ‘준비된 삶’을 말씀합니다. 이 선택에 대한 주제가 조금 부담스럽더라도 자신의 분명한 의사를 결정하고 그 결정대로 삶을 이끌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믿음 장으로 불리는 히브리서 11장 전체의 결론부분입니다. 11장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믿음의 정의를 내리면서 시작합니다. 이어서 아벨로 시작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그들의 대표적인 믿음으로 행하였던 삶의 행적을 거론합니다. 본문말씀의 바로 앞까지 믿음으로 산 사람들을 열거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앞에서 상세하게 설명한 사람들 이 외의 다른 사람들의 믿음의 행적을 말하면서 그 믿음의 삶으로 인한 결과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이 결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더 나은 선택을 위하여 모든 환경을 인내하며 견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8절에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는 표현까지 사용했습니다. 이처럼 끔찍한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끝까지 견디게 하며 용기를 주었던 것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는 기대와 소망’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뜻과 사사로운 자기 즐거움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이런 믿음을 지키는 삶입니다. 즉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보다는 더 나은 영원한 부활의 영광의 삶을 얻고자 하는 기대와 소망이 있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19절에서의 사도 바울의 표현처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믿기 때문에 우리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선택한 믿음의 삶에는 분명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더 나은 선택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를 살펴봅시다.
※ 먼저 내가 행한 믿음의 삶의 결과를 알아야 합니다.
고대 로마의 그리스인 철학자이며 저술가인 ‘플루타르크’가 전하는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고대 올림픽에 레슬링 경기가 있었습니다. 이 경기에서 이긴 자에게는 전투할 때 왕의 옆에 서서 왕을 호위하는 임무가 주어졌다고 합니다.
레슬링 선수 중에 ‘스파르탄’이라는 유력한 우승 후보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스파르탄에게 ‘경기를 포기하면 많은 돈을 주겠다.’고 제의 했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탄은 그 부자가 될 수 있는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스파르탄은 맹렬한 경기 끝에 우승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안 어떤 사람이 스파르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파르탄이여, 이 승리는 너에게 있어서는 매우 값진 것일 터인데 너는 이 승리로 무엇을 얻었는가?”
스파르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다만 전쟁터에서 왕의 앞에 서서 왕을 지키며, 왕을 위해 싸우는 특권만을 얻었다.”
레슬링 선수인 스파르탄은 자신이 승리자가 되었을 때에 어떤 보상이 주어질지를 알고 있었지만 부자가 될 수 있는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즉 승리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부귀영화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왕의 앞에서 왕을 위하여 싸울 수 있는 명예만 주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그 부귀영화와 명예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파르탄은 자신이 싸우고 승리자가 되어야 할 분명한 목적을 알았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싸울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이 이야기가 꼭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데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마태복음 19:28-29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재산과 직업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따른 결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약속했지만 비움과 희생이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수많은 약속 중에서 가장 요약된 분명한 약속입니다.
그런데 본문말씀에 등장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가 받은 이런 약속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본문 39절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처럼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믿음을 인정받았지만 예수님 이후의 믿음의 사람들이 받은 부활의 약속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보이지 않는 약속을 믿고 믿음의 삶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40절에서 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지금 믿음의 시대를 사는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더 좋은 것들을 그들도 받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아직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예비하신 그 좋은 부활에 완전히 이르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일부분 즉 영의 부활은 우리에게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부활의 약속을 사모하고 잡으려고 힘써 달려야 합니다. 빌립보서 3:10-12절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바울처럼 우리도 지금보다 더 좋은 분명하고 확실한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이 믿음의 삶을 선택했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가야 합니다.
※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하여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본문 33-37절을 봅시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 내용은 앞 구절인 32절에 등장하는 인물들인 여러 사람의 사사들과 이스라엘의 왕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다윗과, 위대한 선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사무엘을 포함하는 믿음의 선진들이 행하였던 믿음의 일들과 그들이 당했던 고난의 일들입니다. 예를 들어,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사야 선지자는 산채로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이런 끔찍한 악형을 당했지만 비굴하게 석방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희롱과 채찍질뿐만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일과 조롱을 받아서 그들의 명성이 훼손당하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노예에게 가해지는 형벌인 채찍을 맞았고, 어떤 이들은 결박과 옥에 갇히는 일을 당했으며, 아주 참혹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왜 이런 끔찍한 불이익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끈질기게 믿음을 지키는 생활을 했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본문 35절과 40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더 나은 부활과 예비하신 영광을 얻기 위한’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과 예비하신 영광을 얻고 싶다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열정적인 믿음의 삶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열정은 마치 여름날의 태양과 같습니다. 어떤 외침이나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떤 표현도 없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글거리는 뜨거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뜨거운 열정이 있는 사람은 묵묵히 주님을 따르지만 진실함과 성실한 열정을 느끼게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죽음을 불사하는 삶을 세상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의 열정이 있는 사람은 비록 고난과 희생의 삶이라고 할지라도 후회도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열정이 있는 사람은 어떤 일도 성실과 진실함으로 대합니다. 뿐만 아니라 번지르르한 말이 아니라 신실한 행동이 앞서는 사람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그러했습니다. 다니엘은 동료 관리들의 시기와 모함으로 사자 굴에 던져졌고, 그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여 풀무 불에 던져졌습니다. 이들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열정은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묵묵하게 행동으로 믿음을 나타냈습니다. 이 사실을 본문에서는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하는 믿음의 열정이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나 주어진 일을 할 때에 따지지 않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신실하게 행동합니다.
이 말씀의 결론은 12장으로 이어집니다. 1-3절을 봅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게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우리의 모범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셨습니다. 믿음의 길이 힘들고 어려울 때면 앞서 가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더 나은 선택을 위하여 열정을 품고 믿음의 삶을 이루어갑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교수가 강의할 때에 한 학생이 물었습니다. “교수님, 교수님처럼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입을 적게 움직이고 머리를 많이 움직이게”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사람은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일에 몰두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다른 사람들의 흠만 보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몰두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말을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리지만 침묵을 배우는 데는 60년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말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을 향한 진실함과 성실함의 열정적인 믿음의 삶으로 더 나은 선택의 삶을 지켜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