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감동하시는 언어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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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5-29 23:09
*** 하나님께서 감동하시는 언어 / 에베소서 5:15-21
에베소서 5:15-21,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다른 사람과 관계가 좋지 않게 되었을 때 어떻게 풀어갑니까? 아마도 부부사이나, 부모자녀 사이, 친구사이 등. 가까운 사람들이 어떤 일로 관계가 좋지 않게 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풀어보려고 하지요. 관계가 원활하지 않으면 마음이 많이 불편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많이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어떻게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기쁘게 해 드릴까?’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나라의 교회나 민족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 많이 불편한 지경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불편하게 되면 우리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나 어떤 사람이라도 삶이 힘들어지게 되며 심하게 되면 징계도 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143:7절에서 다윗은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얼굴을 돌리시면 우리 삶은 너무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풀어드려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염려하지 않도록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까?
해법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찾아야겠지요?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과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간에 전부를 찾아볼 수는 없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가깝고 중요한 것 하나를 찾았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말씀 중에서 대표적인 구절을 봅시다. 먼저 시편 50:23절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5:18절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감 잡으셨지요?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릴 수 있고 좋은 관계를 이루게 하는 것은 ‘감사하는 삶’입니다. 감사하는 삶이 중요한 이유는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감동하시는 언어는 ‘감사’입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 중 한 부분입니다. 에베소서는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중 감옥에 갇혀서 쓴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에베소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으로 표현하면서 이 위대한 부름에 합당하게 살도록 권고합니다. 그래서 본문말씀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얼마나 세심하게 주의해야만 하는가를 말합니다. 본문 이전의 앞부분에서 바울은 세상을 따르던 옛 생활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새 생활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부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적극적인 생활을 하라고 강조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닮아가는 적극적인 생활을 5장 첫 절에서부터 권면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생활이며(1, 2절), 둘째는 불순종한 죄인의 더러운 생활을 버리고 순결한 생활을 하라는 것이며(3-7절), 셋째는 빛 가운데 사는 생활이며(8-14절), 본문말씀인 네 번째는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적극적으로 기회를 활용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이 시간의 주제가 되는 말씀은 본문 18-20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말씀은 ‘성령 충만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찬양과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 삼위 하나님이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모두 임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감동하시는 언어가 찬양과 감사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찬양도 감사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 감사’라는 것입니다.
※ 감사가 하나님께서 감동하시는 언어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1918년 미국 미네소타 주 보베이(Bovey)라는 작은 탄광촌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에릭 엔스트롬(Eric Enstrrom)’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백발이 성성하고 몹시 지쳐 보이는 야위고 남루한 노인이 별 것도 아닌 ‘신발 털게’를 팔러 왔습니다. 그 노인은 지친 모습으로 사진관에 들어와서 잠깐 쉬고자 했습니다. 몹시 시장했던지 테이블 앞에 앉아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라고는 마른 빵 하나와 스프가 전부였는데, 이 노인은 그 소박한 식사를 두고 감사기도를 했습니다. 사진사인 엔스트롬 씨는 그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느꼈습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그 노인이 큰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이 노인은 세상에 것들을 많이 갖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구나. 그는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으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 노인이야말로 세상 그 누구보다 부유한 사람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노인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이 흑백 사진을 본 엔스트롬 씨의 딸 ‘로다 나이버그(Rhoda Nyberg)’도 큰 감동을 받아 이 사진을 유화로 그렸습니다. 그 작품이 감사 기도하는 노인의 모습을 그린 유화 작품입니다.
앤스트롬 씨는 이 사진을 통해 당시 제1차 세계대전으로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 감사할 것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진을 미네소타 사진전에 출품하였고, 미네소타 주의 사진으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이 사진의 제목은 ‘The Grace(은혜, 감사).’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를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감사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감사가 아니라 한숨과 탄식이며, 정부나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나타나는 현상인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 환경을 만드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합니다. 이 그림 속의 노인은 소박한 음식을 앞에 두고 무엇이라고 기도했을까요? 두말할 필요 없이 ‘이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였을 것입니다. 이 노인은 자신의 초라한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고 때를 따라 음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또한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도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자신은 그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 다름 아닌 성령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라고 하시며, 18절에서는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환경을 깨닫는 것도, 이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할 수 있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에 사도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2:3절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찬양하며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하심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삶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찬양하며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이며, 내 삶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이 하나님을 감동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8:47-49절을 봅시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으며,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일임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들의 삶에 또는 세상의 모든 일에 역사하시는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36절에서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본문 15-18절을 봅시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하시도록 찬양과 감사를 하려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본문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하여 지혜를 얻어야’ 하며,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 성령 충만함을 받으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주세요.’가 아니라, 주지 않으시면 살 수 없다고 간청해야 합니다.
예전에 부산의 어느 유명한 유치원에서는 입학원서를 접수하는 날이면 학부모들이 그 전날부터 줄을 서서 밤을 샌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세계 여행을 위하여 몇 년 동안이나 돈을 모으고 준비했다고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유명 연예인의 공연을 보기 위하여 천리 밖에서도 달려오며, 유명한 맛 집의 음식을 먹기 위하여 몇 시간동안 줄을 서서 기다리는 등. 이렇게 힘들게 노력하는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간절함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별 것도 아닌 것을 위하여 사람들은 이런 고생과 기다림도 기쁘게 감내(堪耐)합니다. 하물며 생명의 길이 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받으려면 더욱 간절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히브리서 10:35-36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또한 예수님께서 간절하게 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가복음 18:1-8절의 ‘과부와 재판장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이 비유의 결론인 7-8절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 하시니라.” 이렇게 간절하게 구하고 부르짖는 것이 하나님을 감동하시게 하는 또 한 가지의 방법입니다. 즉 간절하게 부르짖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07:9절에서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하게 하신다.”고 하시며, 예레미야 33:3절에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이렇게 간절히 사모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찾기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간절함이 있습니까?
여러분, 자나 깨나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성령 충만함을 구하십시오. 성령 충만함이 없이는 진정한 찬양도 감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성령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감동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하는 우리 모두에게는 성령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다만 충만하시도록 간구하십시오. 그러기 위하여 항상 찬양과 감사를 잊지 마십시오. 아무런 응답도 없고, 아무런 느낌도 없을지라도 꾸준히 모든 일에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내 구주가 되시고 아버지가 되심을 늘 감사하며 찬양하십시오. 콩나물시루에 물을 붓듯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면 보이지 않게 콩나물이 자라듯이 우리의 영의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서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본문 19-20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