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불안한 사회, 사모하는 마음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3,242회 작성일 2019-05-22 22:51
*** 불안한 사회, 사모하는 마음 / 시편 42:1-11
 
 시편 42:1-11,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하리로다. 10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하도다.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 들어가는 말
 
요즘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불안감을 호소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나라 내부의 정치적인 혼란과 경제의 붕괴, 군사적인 긴장감 등으로 사회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내부의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세계적인 정세에 대하여는 조금 둔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정세도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상황에도 신경을 써야 하니 긴장감이 더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국가 인권위원회는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권파탄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교육청은 스승과 학생을 사용자와 노동자로 바꾸어서 서로 반목하고 서로 투쟁하고 서로 고발하는 사회주의로 만들고 있습니다. 소수에 불과한 동성애자들과 트랜스젠더, 성적장애자들을 마치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처럼 치켜세우고 조장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성경을 읽는데 시편 77:3절의 말씀이 눈에 띄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이렇게 보니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지요? 다른 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표준새번역,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한숨짓습니다. 주님 생각에 골몰하면서 내 기운은 쇠약하여 갑니다.”/ 공동번역, “하나님을 기억하니 한숨만 터지고 곰곰이 생각하면 기가 막힙니다.”) 정말 우리사회의 현실이 기가 막힙니다. 이러한 사회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불안한 마음이 없다면 너무 영적으로 둔감한 것이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이런 불안한 사회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합니까?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 시편은 지은 사람이 레위지파의 고라 자손 중의 한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레위지파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섬기도록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적인 직업을 허용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일만 하게 하셨습니다. 민수기 3:12절입니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자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특히 레위지판 중에서 고라 자손들은 회막이나 성전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 일과 성전의 찬양대원으로 봉사했습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곧 생업이었습니다. 민수기 18:20-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처럼 성전 봉사직무를 수행하던 고라 자손 중 한 사람이었던 시인은 어떤 피치 못할 상황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형편에서 이 시를 기록했습니다. 더욱이 이런 상황을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비웃으며 조롱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너무도 불안했던 시인은 목마른 사슴이 애타게 시냇물을 찾듯이 자신은 하나님을 사모하며 갈망한다고 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하는 말이 너무나 가슴 아프게 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렇게 기가 막힌 절망적인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도움을 더욱 갈급한 심정으로 호소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도움이 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시인의 고백 속에서 우리 삶의 해법을 찾아봅시다.
 
※ 나를 불안하게 하는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불안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어느 때든지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각종 스트레스나 위험, 새로운 환경, 고통 등이 예상되는 상황이나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 쉽게 불안감이 일어납니다. 특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자 할 때 뚜렷한 원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불편하고 애매한 두려운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 불안증입니다. 현대의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불안장애’라고 합니다. 불안감을 장애라고 하는 이유는 불안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질병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율신경계통의 문제로 인하여 각종 신체증상이 동반되는데, 두통, 발한, 심계항진(불규칙적인 심장활동, 심장 두근거림), 가슴 답답함, 위장관 장애 등이 대표적이라고 합니다. 나에게 이러한 감정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본문의 시인은 자신의 불안감을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는 지금 자신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든지, 민족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든지 하나님께서 멀리 떠나신 것처럼 응답이 없어 영혼이 많이 갈급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런 형편을 본 주변 사람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비웃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불안감을 느낀다면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느 간증집회에서 강사가 자신이 신앙을 가지게 된 경위를 이렇게 간증을 했습니다.
어느 날, 잠을 자다 꿈을 꾸었는데 누군가가 나타나서 ‘내일 밤이 지나기 전에 이 동네에서 가장 큰 부자가 죽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 잠이 깼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이 동에 부자라면 자신인데 내가 죽는 것인가?’라는 불안감에 그날 밤을 뜬눈으로 새우고는 아침 일찍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의사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부자는 안심이 안 되어 그날도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아침이 되었는데도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자 ‘에이 못된 꿈이었구먼.’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옆집의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 친구는 대뜸 “여보게, 어젯밤에 저 건너의 김 씨가 죽었다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김 씨는 부자가 아니었고 가난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품이 훌륭하고 신앙이 깊어 마을에서도 칭송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자는 꿈속에서 들었던 말을 되새겨보면서 ‘김 씨가 진정한 부자였다면 어떤 부자였을까?’라고 생각하다가 교회에 가게 되었고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합니다.
 
이 부자는 자신이 물질이 풍족한 부자라서 불안한 것이 아니라 죽음이 불안했습니다. 아마 이 땅에 사는 사람들 중에 죽음에 대하여 불안감을 전혀 가지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불안감처럼 실패에 대한 불안감, 건강에 대한 불안감, 자녀, 미래, 등 특히 현대인들에게는 염려와 불안으로 인한 정서적 장애거리가 수없이 많습니다. 본문 2-4절에서 시인은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탄식하며, 10절에서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하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라며 자신의 마음이 불안한 이유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불안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자 자신들의 앞날이 걱정되고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요 21:3)고 하면서 갈릴리로 떠났고, 엠마오가 고향인 제자 둘도 기대에 대한 낙심과 불안감으로 고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20:19절에서 제자들에게 엄습한 두려움과 불안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이처럼 신앙인들도 불안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불안감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 내 마음의 불안감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습니까?
 
세계적인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덴마크)는 불안이나 염려 등의 부정적인 감정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정적 감정 역시 욕망의 한 형태며, 따라서 생(生)의 에너지(energy)이다.” 즉 불안이라는 감정은 삶의 완성을 위한 필수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이 불안하기 때문에 절망할 수도 있지만, 불안하기 때문에 이겨내기 위하여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과학자들이 삶에 주어지는 위협적인 요소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하여 동물실험을 한 결과를 이렇게 발표했습니다.
과학자들은 두 그룹을 실험 대상으로 했습니다. 첫째 그룹의 동물들에게는 어떤 위험 요소도 없이 풍성한 음식과 상쾌한 공기, 안락한 환경이 주어졌습니다. 두 번째 그룹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을 유발하는 환경과 기쁨이 공존하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이 그룹의 동물들은 초원에서 한가로이 놀다가도 가끔 맹수의 습격을 받았고, 먹이를 얻기 위해서는 직접 사냥하는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연구 결과, 첫 번째 안락한 환경에서 살던 동물들이 병에 취약했으며, 훨씬 빨리 죽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인 긴장과 불안, 노력을 해야만 하는 환경에서 살았던 동물들은 육체적으로 건강했으며 활동적이었으며 장수했습니다.
 
본문 5-8절을 봅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시인은 자신의 환경적인 불안감과 스트레스 때문에 하나님을 더 간절하게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참된 소망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불안감 때문에 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기억했으며,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시편 119:7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4:1-2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들이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고난과 두려움과 불안함 등의 육체적이고 정서적인 시련들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 연단’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거듭하여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고 고백합니다. 즉 내 삶의 불안감이 오히려 하나님께 더욱 깊은 소망을 두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많은 불안과 두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면 알수록 두려움과 불안을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두려움과 불안,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안함을 비롯한 두려운 감정들을 불신으로 경고합니다. 요한계시록 21:8절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이런 사실을 세상의 학자도 간파했습니다. 프랑스의 고생물학자인 퀴비에(Georges, Baron Cuvier, 1769~1832)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안은 무지에 대한 이자이다. 삶에서 얼마나 불안을 느끼는지는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는 만큼 불안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알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 하는 일, 처음 가는 길, 처음 만나는 사람 등. 우리가 알지 못하는 환경일 때에 불안감이 많이 일어납니다. 만일 늘 하던 일이거나, 항상 가던 길, 혹은 한 번쯤은 가본 길, 만났던 적이 있는 사람 등. 경험이 있는 환경에 대하여는 불안감이 많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면 어떤 환경에서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확신이 있고, 내가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는다면 죽음이라 할지라도 불안하지 않게 됩니다.
 
지나친 불안감이나 세상적인 불안감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독초와 같습니다. 고린도후서 7:8절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이 말씀처럼 세상적인 근심이나 두려움이나 불안감 모두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벗어나야 합니다. 앞의 말씀들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불안감들을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고 의지하고 하나님께 더 깊은 소망을 두는 도구로 사용하여 불안한 사회이지만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의 삶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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