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망하는 삶으로 가는 길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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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4-16 23:59
*** 내가 소망하는 삶으로 가는 길 / 로마서 6:1-11
로마서 6:1-11,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들어가는 말
먼저 두 가지를 질문하겠습니다. 마음으로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이 소망하는 삶의 길로 안전하게 잘 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자신이 거짓 없이 진정으로 소망하는 삶은 무엇입니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모두가 같은 소망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4절에서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함께 가진 소망은 무엇입니까? 골로새서 1:26-27절입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3절에서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영원한 소망의 삶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이 소망의 삶으로 가는 길을 살펴보고 재정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이 포함된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로마는 로마제국의 수도입니다. 이 편지를 보낼 당시의 로마는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as, 옥타비아누스가 본명이며 B.C27년에 황제가 되어 41년간 통치)에 의한 막강한 국력으로 지중해와 서유럽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주변 많은 식민지 사람들은 로마의 평화와 불멸을 믿고 로마에 귀속하는 것을 좋게 여겼습니다. 유대인들까지도 이렇게 ‘나는 로마인이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에는 많은 민족이 뒤섞여 있었으며, 유대인들도 상당히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약 4만 명).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직접 사도 바울을 보내셨습니다. 사도행전 23:11절입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사도 바울이 마지막 전도 사역지로 로마에서 순교하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이 로마서는 바울이 아직 로마에 가기 이전에 기록한 것으로써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과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핵심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본문말씀은 세례의 신비로운 의미에 대하여 자세하게 가르칩니다. 본문말씀의 의미로서의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본문의 핵심 구절인 8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죽고, 예수님의 살아나심과 함께 사는 생명의 연합’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소망하는 생명의 연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망하는 삶으로 가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내가 소망하는 삶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15절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이 말씀에서 의도하는 바는 ‘소망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고 묻기를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삽니까?”라고 할 때에 ‘자신의 확실한 소망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보이려면 우리가 분명한 소망을 가지고 그 소망으로 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세상 사람들이 궁금해 하지 않겠습니까? 예전에 한 번 했던 어거스틴에 대한 이야기를 봅시다.
중세시대의 교회와 신학에 큰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은 ‘어거스틴(St.Augustine)’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거스틴 보다는 기도의 사람인 그의 어머니 ‘모니카’를 더 잘 알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청년시절까지 무척 방탕했으며, 이단과 철학에 빠져 허송세월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는 온 삶을 바쳐서 방탕한 아들이 신앙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했습니다. 어머니의 오랜 기도로 어거스틴은 30세에 방탕의 길에서 돌아서 회심을 하게 됩니다. 그가 신앙으로 돌아서려고 발버둥 칠 때에 “들어서 읽어라. 들어서 읽어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때 읽은 성경이 로마서 13:11-14절의 말씀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는 30세에 회심하여 75세까지 살면서 232권의 책으로 구성된 92개의 단행본 외에도 교리문제와 여러 가지 쟁점 등에 관하여 기독교 변호의 내용이 담긴 220개의 서신을 포함한 방대한 저작을 남겼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우연히 옛날에 드나들던 술집 거리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함께 놀던 아가씨들이 따라 나오며 반색을 합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동안 왜 안 보였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어거스틴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묵묵히 갈 길을 가며 중얼거렸습니다.
“너희들이 사람을 잘못 보았다. 나는 너희들이 알고 있는 옛날의 그 어거스틴이 아니야.”
지금 우리는 어거스틴이 읽었던 로마서 13:11-14절 말씀이나, 에베소서 4:22-24절의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영적으로 어둡고, 사람들은 없어질 세상에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에는 나 자신의 소망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만일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게 되면 세상이 가는 길로 함께 끌려가게 됩니다. 본문 11절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이 말씀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하여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세례가 의미하는 한 부분입니다. 이렇게 내가 소망하는 삶을 분명하게 알았다면 다음으로는 이 소망으로 가는 길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 이 소망의 삶으로 가는 길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본문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소망의 삶으로 가는 원리를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삶과 단절하라는 것입니다. 즉 육신의 욕심을 따라 살던 삶에서 벗어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살펴보았던 세례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육신의 삶으로 뒤엉킨 옛 사람의 삶을 끊어버렸다면 이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사람의 삶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22-24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중생(重生, born again,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거듭남은 영원한 소망의 삶으로 가는 길의 출발점입니다. 이 말씀을 본문말씀으로 바꾸면 4절과 같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옛 사람을 끊어버린 자리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 세례의 두 번째 의미입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세례는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형식일 뿐입니다. 베드로전서 3:21절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공동번역, “그것은 오늘날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세례를 미리 보여 준 것입니다. 세례는 몸에서 더러운 때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세례를 다시 풀이하면,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셨으니 나는 이제부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습니다.’라는 고백적 표현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부활신앙’입니다. 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깨끗한 양심의 삶을 잃지 않는 것이 소망의 삶으로 가는 길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본문 5-7절을 봅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이 말씀에는 과거형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즉 ‘죽겠다.’ ‘죽을 것이다.’가 아니라 ‘옛 사람이 이미 죽었고’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미 죄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우리의 옛 사람도 함께 못 박혀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에 낙을 두고 살던 옛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또 다시 세상에 낙을 두고 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옛 사람이 죽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과 함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의 때에 생사를 판가름하는 두려움의 생명의 심판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5: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것이 우리가 부활신앙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가 다가오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엉뚱한 곳으로 향하도록 마음을 빼앗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깨어 있으라.”고 하시며,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성찬예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23-25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예수님의 이 부탁을 우리도 행하여 나를 살리시려고 생명을 주신 주님을 생각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오늘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종려주일이며, 이어지는 일주일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는 고난주간입니다. 이 은혜를 항상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살아야 하지만 특별히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이 때에 주님의 은혜를 깊이 감사함으로 생명의 은혜가 풍성하게 부어져서 우리 소망의 길이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