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이 됩시다.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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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11-17 13:18
*** 본이 됩시다. / 데살로니가전서 1:2-10
데살로니가전서 1:2-10,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 들어가는 말
오늘 주제인 ‘본이 되라’는 것은 베드로전서 5:2-3절(“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을 근거로 한 저의 목양신념이기도 합니다. 여러 번 비슷한 주제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의 의미에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전도’의 의미를 더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본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가정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자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혀가 조금 짧아서 말도 역시 혀 짧은 소리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風)자를 아들에게 보이면서 “이 글자는 ‘바담 풍’이라고 하는 한자야. 따라 해봐” 그러자 아들이 의기양양하게 “바담 풍”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다시 한 번 “바담 풍” 아들도 “바담 풍”합니다. 아버지가 화가 났습니다. “이놈아, ‘바담 풍’이 아니고 ‘바담 풍’이란 말이야! 다시 해봐!” 아들은 울먹이며 힘주어 “바담 풍”합니다. “이놈이 아빠를 놀리나!” 결국 아이는 한 대 쥐어 박혔습니다.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들은 대로 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속이 탔던 것입니다. 자기 마음으로는 “바람 풍”이라고 하는데, 입에서는 “바담 풍”이라고 나오니 죽을 맛이었지요. 이것은 ‘본을 보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6-7절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앞서가신 예수님의 삶을 본(本)으로 삼고 따르면서, 자신은 세상에서 본이 되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복음보다 앞서 생활에서 세상에 아름다운 본이 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합니다. 특히 지금처럼 교회가 세상에서 욕을 먹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마게도냐로 건너가, 빌립보에 이어서 데살로니가에 전도한 것은 제2차 전도여행 때인 49년경이었습니다. 많은 그리스인이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유대인들의 박해 때문에 바울은 이곳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추방된 바울은 서쪽 90km 지역의 베뢰아, 아덴(아테네)을 거쳐, 고린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곳까지 온 그는 박해를 당하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잊을 수가 없어서 불안한 중에 디모데를 대신 보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통하여 교회의 사정을 묻고 성도들을 격려 했습니다. 그 후 디모데가 돌아와 그들이 많은 박해 중에서도 굳게 신앙을 지키고 있고, 스승인 바울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바울은 감사함과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이 편지를 쓰게 됩니다.
그래서 이 편지에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바울의 따뜻한 배려로 가득합니다. 어려운 환경을 만난 자녀를 염려하며 그들을 깊이 생각하는 부모의 심정의 글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가 궁금해 하는 교리, 즉 죽은 자의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등에 대하여 정성어린 답이 들어 있습니다. 편지의 서론인 본문말씀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들이 속해 있는 마케도니아 지역과 아가야 지역에 까지 믿는 자의 본이 되어 있음을 칭찬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과정에서부터 그들이 가진 믿음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이러한 믿음의 본은 결국 주님과 사도 바울을 본받은 것이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리고 7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믿는 사람으로서 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어려움 중에서도 믿음을 굳게 지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위로와 도전이 됩니다.
※ 왜 본이 되어야 합니까?
요즘 우리나라의 정치계를 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많이 회자되는 불신은 지도자와 앞선 사람들이 ‘좋은 본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적폐청산’이니, ‘잘못된 관행’이니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그들보다 더 불법과 거짓, 부정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욕하는 이유 중 하나도 ‘바른 말을 잘 하면서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본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런 생각 이면에는 ‘그리스도인은 정직하고 진실하게 사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은 온 세계가 발달된 정보화로 인하여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일들을 실시간으로 알게 됩니다. 이 때문에 좁은 우리나라 환경에서는 교회나 성도들의 생활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 하나의 생활이 전체 교회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미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고, 빌립보서 3:17절에서는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본을 통하여 전수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1865년 9월, 미국 선교사인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전해준 한자성경으로 복음이 전해진 이후였습니다. 6.25 전쟁 후 나라가 복구되고 경제성장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던 때만 해도 기독교는 우리 사회에서 본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제가 성장하고 삶이 부유해지면서부터 기독교는 신앙의 본질인 ‘삶의 신앙’을 버리고 ‘이론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에 빠져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삶이 어려울 때는 하나님의 도움에 매달렸지만, 삶이 부유해지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간섭으로 여겨지고 거추장스러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신앙의 형식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3:15-17절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미지근한 신앙은 삶이 따르지 않는 형식적인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오늘의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활 속에서 형상화시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디(Dwight L. Moody)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 사람 중 하나가 성경을 읽으면 나머지 아흔 아홉은 그리스도인을 읽는다.” 즉 세상은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생활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은 가장 훌륭한 전도방법입니다.
※ 어떤 본이 되어야 합니까?
단순한 의미로 볼 때 ‘본이 된다는 것’은 ‘모범적인 삶’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학생이 학교생활에서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될 때 상을 주면서 ‘타의 모범이 되므로 이 상을 드립니다.’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직장 공동체나 사회생활에서도 그들의 기준에서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될 때에 그 공로를 기리거나 상을 주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는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본문 3절을 봅시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짧은 이 한 구절 말씀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어떤 삶으로 모범이 되었는지를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이 세 가지는 본질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요약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적인 교리가 아니라 교리를 생활 속에서 나타낸 실절적인 삶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과 바울 전도단이 이론적인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삶의 신앙을 전했음을 뜻합니다. 본문 5-7절입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바울 전도단의 신앙의 본에 대하여 본문 5절에서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6절에서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말씀 안에서 예수님과 바울 전도단의 삶을 본받았으며, 7절에서는 자신들이 본받은 삶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오늘까지 전수되어 온 방법이며 표본이며, 지금의 우리도 본받아야 하는 길입니다.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생활에서 선행을 이루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런 것은 세상 사람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본입니다. 본문 9-10절을 봅시다.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 대하여 바울 전도단에게 하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한 순간에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며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궁금해 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보여야 할 본은 ‘우리의 구원과 소망에 관한 삶’입니다. 베드로전서 3:15-16절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의 본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따라가면서 선한 양심과 선한 행실로 구원에 관한 소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컨대, 하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사람이 찡그린 얼굴, 걸핏하면 걱정하고, 부정적인 말, 신뢰를 주지 못하는 행동 등. 생활 속에서 이런 모습이라면 아무도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을 불신하는 삶을 돕지 않으십니다. 반면에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심을 믿는 사람은 그 말이나 행동이 흔들림 없이 평온합니다. 모두가 걱정하고 두려워 할 때 오히려 그들을 격려하며 평온한 모습을 보이며, 남들이 싫어하는 힘들고 어려운 일도 즐겁게 할 때에 사람들은 궁금해 합니다. “저 사람은 도대체 뭐지?” 이처럼 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는 삶을 이루는 것이며, 예수님처럼 산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분전환 겸, 취미 겸 해서, 오리를 키워 볼 생각을 했습니다. 마당에 널따란 물통을 두고 절반이나 물로 채웠습니다. 퇴근하면서 오리농장에 들러서 청둥오리 한 쌍을 사서 물에 넣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오리에게 먹이를 주러 갔는데 오리가 물통 속에서 죽어 있었습니다. 이리저리 뒤적여 봐도 짐승에게 물린 흔적이나 상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수영 전문가인 오리가 물통 턱을 올라오지 못하고 30cm 정도밖에 안 되는 얕은 물에 빠져 죽었을 리도 없었습니다. 결국 퇴근길에 오리농장으로 가서 주인에게 따졌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농장 주인은 오히려 딱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오리는 오리농장에서 부화하고 키운 오리입니다. 그래서 수영을 할 줄 모르지요. 게다가 이 오리는 어릴 때부터 물속에 집어넣지 않았기 때문에 깃털에 기름이 분비되지 않아 물에 잘 뜨지도 못합니다.”
여러분도 몰랐지요? 오리라고 다 헤엄을 잘 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다닌다고 다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늑대와 함께 살면 울음소리까지 늑대를 닮는다.”고 했습니다. 성도가 세상에 빠져 살면 세상을 닮게 되고, 전도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오히려 욕을 먹게 됩니다. 우리 앞서 가시는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주님을 닮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본이 되어 한 영혼이라도 더 주님께로 인도하여 하늘에 상급을 쌓는 복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