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회복해야 할 사랑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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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12-04 16:44
*** 이제는 회복해야 할 사랑 / 요한복음 15:9-17
요한복음 15:9-14,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 들어가는 말
지난 7월에도 같은 본문으로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2019년 대강절을 맞이하면서 주님 다시 오실 날이 성큼 다가온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꼭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을 살펴보려합니다. 그 내용은 우리 삶에서 ‘잊혀 가는 진정한 사랑의 회복’에 대한 것입니다. 먼저 하나의 예화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1970년대 서울의 판자촌에서 있었던 일을 누군가 인터넷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지금부터 불과 50여 년 전인 1970년대에는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상경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판자촌을 형성하여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찾아보기도 힘든 정부미를 하루하루 작은 봉투에 담긴 것을 사다가 보리쌀에 섞어 먹는 처지였으니 다들 영양 상태도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아기 엄마들은 더욱 곤욕이었습니다. 먹지 못해 젖이 나오지를 않았지만 분유조차 넉넉히 살 수도 없었습니다.
어느 판잣집 부엌에서 뭔가를 찾는 듯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집에 사는 아이 엄마는 설마 도둑인가 싶어 벌벌 떨면서 문틈으로 부엌을 살폈습니다. 그런데 옆집 쌍둥이 엄마가 찬장을 뒤지더니 분유통을 슬그머니 꺼내는 것이 아닙니까?! 순간 화를 내려던 아기 엄마는 한숨을 쉬며 모른 척했습니다. 자신도 애를 키우는 마당에, 쌍둥이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뻔히 짐작이 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쌍둥이 엄마는 품속에서 새 분유통을 꺼내더니 자기 분유통에 분유를 덜어주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쌍둥이 엄마의 친정집에서 분유를 사다 줬는데 항상 분유 때문에 힘들어하던 옆집 아기 엄마가 생각나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분유 한 통을 다 주자니 자기도 어렵고 해서, 아기 엄마 모르게 덜어주고 간 것입니다.
마음 짠한 이야기이지요? 저도 역시 어려운 시절을 겪어 온 세대여서 이런 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전 세계의 10위 권 안에 드는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이 없는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하겠지만 오히려 가난한 자들이 더 소외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탈북자 모녀가 굶어죽은 현장’이 뉴스에 보도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이 잘 사는 나라에 와서 굶어 죽다니!’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요한일서 3:18절에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호소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본문 12절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 사랑의 계절에 우리도 우리 주변을 한 번 주의 깊게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로 시작되는 ‘다락방 강화’입니다. 다락방 강화란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지막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 있을 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과 제자들, 예수님과 그리스도인들의 관계를 가르치셨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는 것처럼 포도나무 되시는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가 살아있는 가지이며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의 제자들 즉 그리스도인들이 머물러야 할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본문 9-10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머물러야 할 삶의 자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이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기초가 되는 삶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13-14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사랑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없이 들어온 ‘사랑의 삶’이 중요한 이유는 사랑의 삶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6:14절에서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하시며, 13장에서는 ‘어떤 위대한 일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4:11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고 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말씀은 예수님의 경고가 담긴 요한계시록 2:4-5절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사랑의 삶은 우리 영의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반드시 회복해야 합니다.
※ 문제는 잃어버린 사랑이 무엇인지를 찾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미리 하신 말씀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4:10-13절을 봅시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지금의 우리나라도 이미 온 나라가 두 사상으로 갈라져서 서로 죽도록 미워하고 서로 파멸시키려 합니다. 두 사상의 진영의 지도자들과 목회자들과 성도들까지도 살벌하고 거친 말을 서슴없이 내뱉습니다. 일반 국민들도 어려워져 가는 경제와 살림살이 때문에 마음이 각박해지고 날카로워지고 있습니다. 이 일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극단적인 보호주의를 내세우면서 서로 대립하고 있으며, 전쟁의 기운과 수많은 재난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느 유튜버가 올린 영상에서 2019년 8월 한 달간 세계에서 일어난 초대형 재난들(지진, 태풍, 쓰나미, 홍수, 산사태, 이상기후)을 보면 30여건이나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지역에 닥친 가뭄과 기근까지 더하면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것들은 작은 재난이 아니라 오금이 저릴 정도로 인간의 무기력함을 느끼게 하는 재난들입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쟁의 기운이 감도는 지역도 많습니다. 마태복음 24:7-8절에서 주님께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것은 재난의 시작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사람 사는 환경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웅글어들게 되고 자연히 사랑의 마음도 식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죽게 생겼는데 나부터 살고 봐야지!’라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우리 사회는 삶의 환경이 좋은 편에 속합니다. 만일 점점 더 어려운 환경이 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랑도 식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려하는 상황입니다. 본문말씀에서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좋은 시절에 하기를 바라시는 것만이 아닙니다.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여 지키고 따라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주님이 나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지켜야 할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마음의 여유가 있고, 생활의 여유가 있어야 다른 사람을 돕기도 하고 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듯이 이런 저런 조건을 다 따지면 남을 도울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사랑은 조건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돈이나 물질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본 요한일서 3:18절의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는 말씀은 입술로만 하지 말고 삶에서 나타내라는 의미입니다.
필리핀에 거주하는 ‘파트리샤 카필란’이라는 분이 자신의 SNS에 공유한 사연입니다.
얼마 전 필리핀에서 한 남자가 패스트푸드 체인점인 ‘졸리비’에서 햄버거를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습니다. 남자에게 다른 일행은 없었는데 아무리 건장한 남자라도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은 양의 햄버거를 주문하는 것입니다. 점원은 반신반의하며 주문받은 대로 많은 양의 햄버거를 남자 손님에게 내어 드렸습니다. 햄버거를 받은 남자는 자리에 앉더니 가게 밖에 서 있던 누군가를 향해 손짓했습니다. 밖에는 맨발에 해진 옷차림인 아이 세 명이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남자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쭈뼛쭈뼛 매장 안으로 들어온 아이들에게 남자는 햄버거의 포장을 하나하나 뜯어주면서 아이들에게 먹도록 했습니다. 아이들은 기쁘게 햄버거를 들고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이 중 한 명이 자신의 앞에 놓인 햄버거 포장 뚜껑을 조심스레 덮었습니다. 남자는 움찔 놀랐습니다. ‘혹시 자신의 행동이 아이에게 동정심으로 보여 상처를 줬나?!’ 걱정하면서 아이에게 먹지 않는 이유를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집에서 기다리는 엄마와 함께 나누어 먹고 싶어서 먹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 아이에게 엄마에게 가져갈 햄버거를 하나 더 사주었습니다. 이 모습을 옆 테이블에서 계속 지켜본 파트리샤가 사진과 함께 자신의 SNS에 올린 것입니다.
작은 사랑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본문 1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품으시고 계명을 지켜 삶의 열매를 맺으라고 하신 이유가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삶에서 진실한 사랑을 회복하게 되면 우리가 예수님 사랑 안에 있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삶이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확신하십니까? 부끄럽지만 이 말씀을 전하는 목사인 저 자신도 ‘사랑으로 행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를 못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여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는 것’이 지금도 저의 고민입니다. 물론 주님 말씀대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려고 많이 노력하지만 여전히 부족하고 돌아보면 후회하게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아마도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노력하고 힘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삼행 덕목이라고 붙여두고 잊지 않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쁘게 만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따뜻한 하루 편지에 ‘누구에게나 시간은 단 한 번뿐입니다.’라는 제목의 글로 올린 실화입니다.
미국의 화가이자 작가, 타샤 튜더(Tasha Tudor) 여사는 버몬트 주의 산골 마을 농가에서 정원을 가꾸며 자급자족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밤새 동화책에 들어갈 삽화를 그리면서 모은 돈으로 56세가 되던 해에 버려진 농장 부지 30만 평을 사들인 게 그 시작이었습니다. 곧 60세가 되는 나이였지만 그녀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10년 넘게 직접 땀 흘려 정원을 가꾸었고, 마침내 그 정원을 사람들에게 공개했을 때는 그녀의 나이 70세였습니다. 온종일 직접 가꿔 만든 정원은 ‘타샤의 정원’, 또는 ‘비밀의 정원’으로 불리며, 그곳을 전 세계인과 나눌 수 있었습니다.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정원을 가꾸고 그림을 그린 타샤 튜더는 노년의 삶에 대해 아주 간명한 조언을 남겼습니다.
“스스로 삶을 즐기고, 독립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모두 인생의 남은 날들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40세에는 뛰고, 50세에는 활기차게 걷고, 60세에는 조심스럽게 살피고, 70세에는 숨이 차 한없이 느려지면서. 그러나 시간은 그와 반대로 살수록 점점 매우 빠르게 흐릅니다. 은퇴 후 20년 이상을 살게 된 지금, 최소 10만 시간 이상이 주어졌고 이 시간은 무언가를 시작하고 이루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옛말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노래하기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것에는 나이나 환경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으며, 예수님의 사랑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는 이것이니라.”는 말씀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더 늦기 전에 잃어버린 사랑을 점검하고 회복하여 이 평화와 사랑의 계절에 기쁘게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