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하고 따라야 할 길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3,191회
작성일
2019-11-20 14:44
*** 분별하고 따라야 할 길 / 요한복음 10:7-15
요한복음 10:7-15,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들어가는 말
저는 개인적으로 요한복음을 많이 좋아합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사랑이 잘 표현되어 있어서 읽을 때마다 마음이 평온함을 느낍니다. 마치 양이 주인의 품에 평온하게 안겨 있는 듯한 마음이 듭니다. 그 중에서도 10장과 15장은 특별히 애독하고 많이 인용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시간의 본문으로 설교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대부분이 ‘풍성한 삶’ ‘삶의 문’ 이런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본문 11-12절을 중심으로 주제를 달리하여 ‘혼탁하고 어지러운 이 시대에 바르게 분별하고 따라야 할 길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11-12절을 봅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이 말씀에는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를 분별해야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즉 이 시대에 우리의 참된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가 따라야 할 참된 길을 분별해야 함을 말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표현하는 곳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표현할 때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인간을 살리시려고 속죄 제물이 되셨음’을 나타내고자 하실 때입니다. 반면에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양의 문’ ‘선한 목자’라고 표현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양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5:31절 이하의 말씀에서 ‘양과 염소를 구별하시는 분’으로 표현하시는 것은 ‘마지막 심판의 때에 선한 목자를 따른 양들을 구별해 내시는 심판 주’로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지막 때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참된 길을 분별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특히 본문말씀을 포함하는 10장은 예수님께서 “나는 ∼이다.”라고 하는 당신 자신의 본성에 대하여 선언하시는 중요하고도 유명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본문 앞쪽의 1-5절은 예수님 자신을 비유로 하시는 ‘선한 목자 비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자세하게 풀이하시는 내용이 본문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양의 문’ ‘선한 목자’로 비유하시면서 ‘양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보호하시는 참 목자 되심’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양들을 자신의 이익의 도구로 생각하는 삯꾼 목자’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 둘을 비교하시는 이유는 양이 어떤 목자를 진정으로 따라야 할지를 분별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 우리는 무엇을 분별해야 합니까?
숲 속에 자비로운 원숭이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원숭이가 계곡의 개울물에 있는 물고기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원숭이는 물에 빠진 물고기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건져서 개울가 모래 톳에 올려놓았습니다. 잠시 펄떡거리던 물고기는 잠시 후에 죽어버렸습니다. 원숭이는 물고기가 왜 죽었는지 이유를 몰랐습니다.
원숭이는 물고기에 대하여 미움이나 악의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불쌍히 여겼을 뿐입니다. 그러나 원숭이 자신이 땅에서 살아야 하듯이 물고기가 물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몰았을 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 세상의 많은 교회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많은 교회들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의 성공적인 삶을 살도록 말씀을 전하고 가르칩니다. 마치 육신적인 평안과 부귀영화를 성공적인 신앙의 길인 것처럼 가르칩니다. 뿐만 아니라 교인들도 돈을 잘 벌고, 좋은 직장과 높은 지위, 풍족한 생활이 좋은 신앙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비천한 성도를 ‘예수를 잘 못 믿었기 때문이라’고 정죄하고 비웃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3:15절을 봅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그리고 23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께서는 초대교회 당시의 유대교 영적지도자들이 잘못된 길을 가르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 생명의 길을 전해야 할 사람들이 세상적이고 죽는 길로 사람들을 인도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생명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영혼이 사는 길로 인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적인 성공과 육신적인 풍요로움이 진리인 것처럼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고 깨우쳐야 하는데, 세상의 삶이 영원토록 계속될 것처럼 교세확장과 육신의 삶에 마음이 빼앗기도록 만듭니다. “꿩 잡는 것이 매”라고, 세상적인 번영과 육신적인 평안이 좋은 신앙의 열매인 것처럼 믿게 만들었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베드로후서 3:3-4절입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하니” 이 말씀처럼 지금의 가톨릭에서는 ‘예수님의 재림도, 부활도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런 것은 없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많은 교인들도 마찬가지로 ‘회개하고 깨어 있어 재림을 준비하라.’고 하는 말씀을 농담처럼 여기고 무시합니다. 마치 원숭이가 물고기를 물에서 건져내는 것이 자비로운 행위인 것으로 여기듯이, 오늘의 많은 목사와 교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분별해야 하는 길이 이것입니다. 즉 ‘나를 죽음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무엇이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를 분별해야 합니다. 진리와 불법이나 거짓을 분별해야 합니다. 빛과 어둠을 분별해야 합니다. 내가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분별해야 합니다. 내가 머물러야 할 자리와 머물지 않아야 할 자리를 분별해야 합니다. 내가 함께 해야 할 사람과 함께 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분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마태복음 16:2-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우리도 이렇게 이 시대를 보면서도 영적인 맹인처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 그러면 우리가 어떤 길을 따라야 합니까?
세상에 많은 길이 있습니다. 길이라고 해서 반드시 물리적인 형상의 길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볼 수 있는 물리적인 형상을 가진 길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사상의 길도 있습니다. 즉 사람이 나아가는 삶을 길이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길이라고 다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갈 수는 있겠지만 가려서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의 끝이 패망이나 죽음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길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소망하는 목적지가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길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거름지고 장에 간다.”는 말이 있듯이 남들이 간다고 무작정 따라가면 낭패와 실망과 죽음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전 15:33-34상)고 했습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14:1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성도들의 거처를 마련하러 가신다고 하시면서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도마가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살 수 없듯이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면 살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5:4-5절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 길은 우리 마음의 길이자 삶의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하십니다. 이 길을 따른다는 것은 매일 매 삶의 순간마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과 삶에서 예수님 쪽을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박물관에는 우스꽝스러운 조각상이 있습니다. 조각상의 주인공은 로마 신화 속의 제우스의 아들 ‘카이로스’인데 ‘기회의 신’이라고 부릅니다. 앞머리는 머리숱이 무성하고 뒷머리는 대머리이고, 왼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으며, 발에는 작은 날개가 달려 있습니다. 관광객들은 처음 보는 순간 웃음이 터지지만 이 조각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인다고 합니다. 그 설명은 이렇습니다.
“앞머리가 많은 이유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금방 알지 못하게 하고 발견했을 때는 쉽게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죠.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지나가면 다시는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인데요. 그의 이름은 바로 ‘기회’입니다. 왼손에 있는 저울은 ‘기회가 왔을 때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빨리 결단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비록 이방의 신화이지만 그 의미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특히 이 시대의 사람들은 눈부시게 발전하는 세상의 일들에 마음이 빼앗겨서 진정한 생명의 길인 영의 길을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속한 것은 삯꾼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삯꾼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하여 일합니다. 좋을 때는 한 없이 친절하고 마치 성공과 생명을 약속하는 듯하지만, 위기가 닥칠 때는 떠나버리고 도망해 버립니다. 하지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의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세상은 결코 나를 위하여 희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합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했듯이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화려함과 부귀영화로 유혹하지만 결코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대하는 많은 정보와 많은 일들 속에서 진정한 생명의 길을 분별하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다가올수록 주의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를 분별하고 옳은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로마서 12: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시며, 빌립보서 1:9-11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이 유혹 많고 혼탁한 세상에서 지혜롭게 분별하여 생명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 만을 따라서 생명의 능력으로 충만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