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영적경계목록8 - 불안과 두려움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3,111회 작성일 2019-10-31 22:25
*** 영적경계목록8 - 불안과 두려움 / 마가복음 6:45-52
 
 마가복음 6:45-52,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하여 소리 지르니 50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5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 들어가는 말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공감하는 마음 상태를 말하라고 하면 아마도 ‘불안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불안감을 말합니다. 경제가 불안하고, 안보가 불안하고, 정치도 불안하고, 공교육도 불안하고 총체적으로 국가적인 불안감이 팽배합니다. 불안이 심해지면 두려움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주님께서 이미 예고하신 것입니다. 조금 긴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24:4-1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미리 경고하신 이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극복해야 하는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경계목록 8번째 주제로 ‘불안과 두려움’으로 정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는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말해서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기 때문’입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물 위를 걸으신 이적’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의 벳세다 들녘에서 말씀을 들으러 온 무리를 가르치시고 굶주린 그들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이 오병이어의 이적은 사 복음서 전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갈릴리 건너편 벳세다(가버나움, 갈릴리 호수 북동쪽과 서쪽에 동일한 이름의 벳세다가 있는데, 이 말씀에서의 벳세다는 가버나움을 일컬음)로 가게 하시고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저물어 밤이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돌풍으로 힘겹게 노를 젓는 제자들을 생각하시고 갈릴리 호수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가셨습니다. “밤 사경”은 로마식 시간으로 오전 3-6시 사이를 말합니다. 제자들은 초저녁부터 한 밤중까지 거센 바람과 싸우며 괴롭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표현되어 있지는 않지만 제자들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서 가까이 오시자 제자들은 “유령이다.”라며 혼비백산 했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제자들이 놀라고 두려워했던 이유를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고 했습니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의 신분과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불신(不信)의 결과물입니다.
 
※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은 어떤 것입니까?
 
불안과 두려움은 인간의 생존본능에 속한 것이어서 불안을 일으키는 요소를 특정할 수 없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앞서 말한 대로 경제나 안보 건강 등의 인간 생존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들일수록 불안과 두려움을 일으키기가 쉽습니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하여 소리 지르니” 이 내용처럼 한밤중에 물 위를 걸어오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생명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혹시 내가 죽지나 않을까?’ ‘혹시 내가 암이나 심각한 질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하지!’ 등의 생존적인 불안과 두려움이 현대인들을 괴롭게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은 우수 혈통의 보존을 앞세워 유대인들을 멸절시키기 위하여 가스실을 만들어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독일군은 유대인들을 모아서 죽음의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그곳에서는 일을 할 수 있는 건강한 사람은 죽이지 않고 일군으로 부렸습니다. 하지만 약한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 병약한 자들은 가스실로 보내어 죽였고 화장했습니다. 이 수용소에 ‘솔로몬 로젠버그’라는 사람의 가족이 들어왔습니다. 80 가까운 연로한 할아버지, 이 글을 쓴 솔로몬 로젠버그, 그의 아내, 큰 아들 야곱, 다리를 저는 막내아들 데이빗이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할아버지가 장시간의 노동과 영양분의 결핍, 불결한 위생 때문에 쓰러졌고 가스실로 옮겨졌습니다. 솔로몬은 가족 중에서 두 번째로 가스실로 끌려갈 사람은 제일 어린 아들 데이빗이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가족들은 각각 다른 작업장에서 일을 하다가 밤이 되면 수용소로 서둘러 돌아오곤 했는데, 이때마다 솔로몬은 ‘혹시 막내아들이 가스실로 끌려가지는 않았을까?’ 하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습니다. 매일 밤, 막사에 돌아오면 솔로몬은 재빨리 데이빗을 찾았고, 그리고 나서 큰아들 야곱과 아내를 확인했습니다.
마침내 솔로몬이 두려워하던 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일터에서 돌아와 보니 가족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미친 듯이 가족을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는 큰아들 야곱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야곱에게 다그쳐 물었습니다. “얘야, 데이빗이 오늘 끌려갔느냐?” “네, 아빠. 오늘, 그들이 와서 데이빗을 데려갔어요. ‘데이빗은 이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요.” “그러면 네 엄마는 어디 있느냐? 네 엄마는 아직 건강하지 않느냐? 그들이 엄마까지 데리고 가지는 않았겠지?” 야곱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사람들이 처음에 데이빗을 데리러 왔을 때 데이빗은 몹시 겁을 냈어요. 그리곤 울음을 터뜨렸지요. 그때 엄마가 말했어요. 울지 마라, 데이빗. 내가 함께 가서 너를 꼭 붙들어주마. 그리고 엄마는 데이빗이랑 같이 가스실로 가신 거예요. 데이빗은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2차 대전 때의 유대인 수용소 이야기를 읽으면 가슴이 먹먹하도록 아픔을 느낍니다. 당시의 그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웠겠습니까? 이처럼 사람들은 생존에 관계되는 일에서 가장 큰 불안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일에 대한 불안감, 가족에 대한 불안감, 타인에 대한 불안감, 건강에 대한 불안감 등 복잡한 현대 사회만큼이나 현대인들을 괴롭히는 불안감과 두려움은 많습니다. 옛날 기(杞) 나라의 어떤 사람이 ‘하늘이 무너질까봐 불안하고 걱정스러워서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았다.’고 하여 기우(杞憂)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이처럼 어떤 막연한 불안감과 두려움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은 왕위를 다윗에게 빼앗길까봐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기도 했고,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제자들은 한 집에 모여 문들을 꼭 걸어 잠그고 숨어있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 20:19절에서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불안과 두려움이 봐주지를 않습니다. 여러분이 느끼는 불안감과 두려움은 어떤 것들입니까?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어떻게 대하여야 합니까?
 
※ 불안과 두려움을 어떻게 대하여야 합니까?
 
1차 세계대전 때, 어느 프랑스 군인의 수첩에서 발견된 내용입니다. 그 군인은 전쟁의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어서 어떻게 하면 불안감을 없앨 수 있을지 깊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내린 결론을 자신의 수첩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두 가지 중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가 전선에 배치되어 있거나 또는 후방에 남는 것이다. 만일 네가 전선에 배치되어 죽을 위험이 있는 곳에 있다면 부상을 당하거나 죽을 수 있고 아니면 전혀 부상조차 당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부상을 당했다면 회복되거나 아니면 죽을 것이다. 만일 회복된다면 더 이상 불안해 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만일 죽는다면 불안해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모든 상황이 둘 중에 하나인데 불안해 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군인은 불확실한 앞날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려고 앞날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예측해본 것입니다. 불안이나 두려움은 불확실한 것에 대한 걱정이나 염려 때문에 많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일이든지 환경이든지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것에는 막연한 두려움이 생기기도 합니다. 만일 아무리 힘들고 위험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예측할 수 있다면 불안감이나 두려움이 덜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앞날에 대한 분명한 지식과 소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20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의 소망과 기다림은 분명합니다. 이 소망이 확실하게 되면 불안과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만일 내 삶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지속적으로 계속된다면 자신의 신앙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불안과 두려움은 임마누엘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시편 42:5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이 시는 레위지파의 고라 자손이 쓴 것인데 42-43편에서 세 번이나 똑 같은 고백을 합니다. 이는 시인의 현재 상황이 매우 불안하고 두렵게 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불안한 상황 때문에 불안감이 몰려오는 자신을 느끼면서 스스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격려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찬송하겠다.’고 고백합니다. 본문말씀의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불안과 두려움이 일어났지만, 결국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모든 불안과 두려움이 해소되었습니다. 앞서 읽었던 마태복음 24:4-13절에서도 예수님께서 장래의 일을 미리 알려주신 이유를 ‘예수님을 믿고 끝까지 견뎌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 한 곳을 봅시다. 마태복음 10:26-31절입니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이 말씀에서도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헤아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결국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는 길은 ‘임마누엘 하나님’ 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주님이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불안해하지는 않습니까? 나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또 함께 하심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그냥 생각 속에서 믿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실제 생활 속의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불안도 두려움도 모든 염려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4:27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말씀대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신하면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불안과 두려움이 일어나게 되면 빨리 그 요소를 찾아서 제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에는 하나님의 징계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18절을 봅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리고 요한계시록 21:8절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무서운 경고말씀이지요? 이렇게 불안과 두려움은 방치하면 안 되는 무서운 영적인 질병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의 평안이 주장하도록 하십시오. 그것은 나와 함께 하시며 모든 일에 주인이 되셔서 내 머리카락 까지도 세시고 아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아무리 세상이 험하고 위기가 닥친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따르는 진실한 삶으로 두려움이 없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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