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경계목록2 - 헌신과 희생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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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9-18 23:10
*** 영적경계목록2 - 헌신과 희생 / 요한계시록 3:14-22
요한계시록 3:14-22,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들어가는 말
독일의 의사이며 사상가, 음악가, 신학자인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박사의 일화 속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슈바이쳐 박사가 운영하는 아프리카 ‘랑바레네 병원’에는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미모의 “마리안 프레밍거”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마리안은 헝가리 귀족의 딸로 태어나서 한때 재색을 겸비한 미녀로 세상의 추앙을 받았는데, ‘빈’에서 유명한 배우로 명성을 떨치며 화려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사치와 방탕한 생활 때문에 두 번의 결혼을 모두 실패하고 힘든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리안은 슈바이처의 연주를 들었는데 듣는 순간, ‘꿈에서 깨어나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결연하게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아프리카 행을 결심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내 인생은 허상일 뿐이었다. 남을 위한 삶에 진정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 후 20년 동안 슈바이처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다가 그 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헌신과 희생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언제나 마음 찡한 감동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영적경계목록 두 번째로 ‘헌신과 희생’이라고 했는데, 왜 헌신과 희생이 영적경계목록이 되겠습니까? 헌신과 희생이 경계 대상이 아니라 ‘외식적인 헌신과 희생을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헌신이나 희생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代價)가 요구됩니다. 즉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헌신이나 희생은 거짓이며 남에게 보이려는 외식적인 행위에 불과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에 의하여 새로운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예컨대, 나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람의 헌신이 있고, 내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 수고와 희생과 헌신의 사람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한 희생’입니다. 에베소서 1:7절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이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랑과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주님과 또한 다른 이들을 위하여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전하게 하신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마지막 일곱 번째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보낸 예수님의 편지는 꼭 소아시아 지역의 일곱 교회에만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각 교회에 나타내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 지역의 영적인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보이셨습니다. 이는 주님의 몸 된 교회들이 자신들의 영적인 상황에 적용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게 당신 자신을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로 표현하셨습니다. “일곱 금 촛대”는 ‘교회’를 의미하며, “일곱 별”은 ‘교회의 사역자’를 의미합니다. “일곱”이라는 수는 완전수로써 ‘모든 교회와 모든 목회자’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교회 사이를 거니시면서 살피시는 분이시며, 목회자들을 능력의 손으로 잡고 인도하시고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보편적인 이 땅의 모든 교회에 해당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은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였습니다. 이로 보아,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마지막 때의 교회를 나타내며, 충성스럽고 참된 신앙의 모습을 찾으신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수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이 형상은 지금 이 마지막 때의 세상과 교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의 의도를 찾으셨습니까? 본문 17절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이 말씀의 의도는 ‘가식적이고 외식적인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깝게 하는 것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알면 고칠 수 있는 기회라도 있지만, 깨닫지 못하면 패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 가식적인 헌신과 희생은 무엇입니까?
본문 15절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을 우리는 들어도 ‘뭐가 잘못됐다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물이 미지근하다고 토할 정도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라오디게아 지역의 사람들은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금방 압니다. 왜냐하면 라오디게아 주변지역에는 미네랄 온천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미네랄 온천수가 미지근하게 되면 구역질나는 맛이 난다는 것을 다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신앙에서의 미지근함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한마디로 하면 ‘생동감과 열정이 없다.’는 것인데, ‘영적인 감격도 없고 감동도 없고, 열정적인 마음도 없는 무감감한 상태’를 말합니다. 단지 종교적인 의무감으로 교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로마서 10:2-3절의 말씀처럼 ‘자기열정’으로 교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영적인 삶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뜻으로 일하는 것’을 뜻합니다. 더 나쁜 것은 다른 사람들의 헌신으로 이루어놓은 일들에 젓가락만 올려 거저먹으려는 파렴치한 행동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열정적으로 헌신하고 희생해도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외식적이고 가식적일 뿐입니다.
창세기 11:2-4절을 봅시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이 말씀은 ‘바벨’이라는 말의 기원을 보여줍니다. 노아의 홍수를 경험한 노아 이후의 세대 사람들이 또 다시는 그런 멸망을 당하지 않으려고 자신들의 이름으로 성읍과 탑을 높이 쌓아 올렸습니다. 자신들의 이름으로 건설한 바벨탑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이 하는 말을 보십시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이들은 자신들의 풍요로운 삶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우리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등 따습고 배부르면 기도, 말씀, 찬양 생활을 멀리하게 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헌신과 희생도 없고 다만 ‘그런 척 하는’ 형식적인 헌신과 희생의 무늬만 가지게 됩니다. 이런 예배에 감격이나 감동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진정한 헌신도 희생도 없는 예배는 미지근한 온천수와 같아서 하나님께서 ‘토하여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 어떻게 회복하라고 하십니까?
본문 18-20절을 봅시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에서 핵심되는 구절들을 보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단어는 18절의 “내게서” 라는 말입니다. 이는 모든 회복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제를 헌신과 희생이라고 하게 된 배경인 단어입니다. “사서”라는 단어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흰 옷을 사서 입어”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이 말씀에 등장한 금, 옷, 안약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세 가지는 라오디게아 지역의 특산물입니다.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의 은행업의 중심지였고, 세계적인 검은 털을 가진 양 사육지여서 양모가 유명하며, 유명한 의료학교가 있었는데 나드(nard)로 만든 연고(귀를 치료)와 테프라 프리기아(Tephra Phrygia)라는 안약이 유명했습니다. 이러한 특산물들로 라오디게아는 부요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가 자랑하는 특산물이 아닌 주님께서 연단하여 주신 금과 흰옷과 안약을 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사서”라는 말은 ‘우리의 힘과 정성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세상적인 금은 없어질 것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하는 영원한 하늘의 보물을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하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6:19-20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하지도 못하느니라.” 그리고 세상의 비싼 옷감으로 자신을 화려하게 가꾸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해 주신 구원의 흰옷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육신적인 안약이 아니라 영의 눈을 밝게 하는 안약을 사라고 하십니다. 이 모든 준비는 자신의 헌신과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시간을 투자해야 하며, 힘들게 얻은 돈도 투자해야 하며, 여러분의 노력과 정성도 투자해야 합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얻기 위한 희생이며 헌신입니다. 마태복음 10:40-42절을 봅시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고린도전서 3:10-15절에서 말씀하듯이 헌신과 희생이 따르지 않는 상급은 없습니다.
세계적인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오케스트라(Orchestra) 지휘자인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 이탈리아)’는 원래 첼로 연주자였습니다. 그는 심한 근시(近視)였기 때문에 연주 중에는 악보를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연주 때마다 연주할 악보를 모두 외워서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주회를 앞두고 그 악단의 지휘자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단원들 중에 누군가에게 지휘를 대신 부탁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그때 악보를 모두 외우고 있던 단원은 ‘토스카니니’뿐이었습니다. 결국 그가 선발되어서 임시 지휘를 했었는데 이 후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세계적인 대 지휘자가 되었습니다.
만일 ‘토스카니니’가 시력이 나쁘지 않았다면 유럽의 한 첼로 연주자에 불과했었을 것입니다. 시력이 나빠서 악보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악보를 모두 외울 수가 있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세계적인 지휘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이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좋은 환경에서도 불평했고 타락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또는 교회생활에서 헌신과 희생이 힘들고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또한 지금의 내 환경에서는 신앙생활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주님을 위하여 진정으로 헌신하고 희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힘이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19-20절에서 적극적으로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6:9-10절에서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들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하나님의 일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우리의 헌신과 희생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응하시고 갚아주십니다. 다만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명목만의 헌신과 희생을 경계하셔서 항상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복과 능력의 삶을 이루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