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경계목록1-편견과 안일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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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09-12 17:08
*** 영적경계목록1 - 편견과 안일 / 누가복음 5:27-35
누가복음 5:27-35,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 들어가는 말
요즘 종종 회자되는 ‘시계제로(視界ZERO)’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데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합성신조어입니다. 이 말은 ‘항해하는 선박이나 항공기 등이 안개나 구름 등의 환경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시야가 가려져서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최근에는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세상살이가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비유해서 시계제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만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도 지금은 시계제로라고 할 만큼 혼탁한 오리무중입니다. 이러한 때에는 영적인 안테나를 곤두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혼탁한 세상에 빨려들어 가서 함께 추락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3:7-10절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하였고” 세상에 마음이 미혹되면 영의 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하니 당연히 엉뚱한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도록 경계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 경계목록 첫 번째로 생각해 볼 내용은 ‘편견과 안일’입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사역 초기에 제자들을 부르시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로 살아가는 형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으며, 본문에서는 세관에서 일하는 세리인 ‘레위’를 부르셨습니다.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의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 잔치에는 레위의 직장동료들인 세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세리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죄인’으로 취급되어 함께 있는 것조차 꺼리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있는 것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보고는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라고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도 비교하면서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라며 비난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잣대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제자들을 평가했습니다. 이들은 옳고 그름의 잣대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법과 기준이었습니다. 이처럼 공공성이 없는 기준을 ‘편견(偏見)’이라고 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편파적인 견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편견이 없지만, 개인의 신앙이나 신앙생활에는 많은 편견들이 있습니다. 이런 편견에 빠지게 되면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부수적인 것들을 사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편견은 편견적인 신앙을 갖게 합니다.
어저께 동네의 가게에 들렀는데 잘 아는 사장님이 허리를 못 펴고 아프다고 인상을 씁니다. 그래서 “허리가 아프세요?”라고 했더니, “허리도 아프고 배가 뒤틀린다.”고 하면서 “매일 주(酒)님을 너무 사랑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제가 뭐라고 했겠습니까? “그런 주(酒)님 사랑하지 말고 이제는 진짜 주(主)님을 사랑하라.”고 하면서 웃은 적이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이는 우스갯소리이지만 영적인 신앙에 있어서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무지와 편견적인 신앙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잘못된 생각에 빠져서 안주하는 생활이 ‘안일(安逸)’입니다. 이는 영적인 생명에 손상을 주는 위험한 요소들이어서 반드시 고쳐야 할 영적인 자세입니다.
※ 편견은 영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본문말씀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인에 대한 자신들의 편견으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했습니다. 이들은 오래된 자신들만의 유전과 교회법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세워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7:6-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교회의 신앙적인 전통이나 교회법이나 개인의 신앙 등. 이런 것들이 편견을 형성하게 하는 주요 요인입니다. 이런 것들이 신앙의 습관이 되면 바른 길이나 진리를 가려서 영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오래된 예화 하나 하겠습니다.
젊은 자동차 정비사가 중고 자동차 시장에서 아주 낡은 자동차를 싸게 샀습니다. 굴러가는 것이 신기할 정도의 고물차를 자신의 실력으로 잘 수리해서 타고 다니니 기분도 좋았고 자기의 실력이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여행 중에 낯선 거리에서 자동차가 시동이 꺼져 버렸습니다. 다시 시동을 걸었지만 엔진은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젊은 정비사는 보닛을 열고 고장원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딱히 고장 난 곳이 없었습니다. 한참을 시름하고 있을 때 지나던 차 정차하더니 노인 한 분이 나와서 젊은 정비사의 곁에 서서 엔진룸을 함께 들여다보았습니다. 젊은 정비사는 그 노인을 바라보면서 “문제없습니다. 그냥 가세요. 제가 정비사거든요.”라며 계속 여기저기를 만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엔진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노인이 “젊은이, 내가 좀 도와주지.” 그러면서 지팡이로 엔진의 이쪽저쪽을 툭툭 치고는 젊은이에게 시동을 걸어보라고 했습니다. 젊은 정비사는 미심쩍어 하면서 키를 돌리니 엔진이 ‘붕’하면서 시동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까. 기가 막힌 정비사는 노인에게 “고맙습니다만. 누구십니까?”라고 하자 그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 자동차를 만든 헨리 포드라고 합니다.”
적어도 자신은 자동차를 수리하는 ‘프로정비사’라는 자만심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편견으로 작용했습니다. 이 이야기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런 자만심이 편견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장 빈번한 예로 기도를 많이 한다거나, 헌금이나 봉사를 많이 한다거나, 신앙심이 좋다거나, 주일을 잘 지킨다는 등.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의 편견을 만들어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봅시다. 누가복음 18:9-14절입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바리새인의 교만과 세리의 겸손을 통한 교훈이지만, 좀 더 자세하게 보면 바리새인의 신앙적인 편견에 의한 교만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성경에 대단히 많지만 한 가지만 더 봅시다.
요한복음 7:22-24절입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화를 내는 것을 빗대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편견을 갖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편견이 의외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이 작용하지만 스스로는 잘 느끼지도 못하여 성도들이 쉽게 빠져드는 함정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성도들에 대하여 말할 때 나타납니다. 어떤 일을 하면서 말합니다. “저 성도는 일을 왜 저렇게 하지. 이렇게 해야 하는데.” 이 말 속에는 이미 자신의 관점이 들어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데 왜 저렇게 해’라는 편견입니다. 또 빈번한 다른 사람들을 비교할 때도 나타납니다. “누구는 이렇게 하고, 누구는 저렇게 하고”하면서 그 사람을 헤아리게 됩니다. 이 헤아림도 공정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편견이 작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1-2절에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5:37절에서도 말씀하십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이렇게 편견이라는 것은 다분히 자기중심적인 견해가 많기 때문에 공공성을 잃어버리기가 쉽고 이로 말미암아 영적인 눈마저 어둡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옳다, 아니다, 라고 표현하며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하십니다.
※ 편견에 안주하면 파멸이 이르게 됩니다.
구맹주산(狗猛酒酸, ‘개가 사나우면 술이 시어진다.’)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한 나라에 간신배가 있으면 어진 신하가 모이지 않는다.’ 혹은 ‘경영술이 좋지 않으면 발전이나 진보가 없어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이 말이 생기게 된 배경은 춘추전국시대 말기의 한(韓) 출신인 ‘한비자(韓非子, BC 280~233)’가 쓴 글에 있습니다. 한비자의 원 이름이 ‘한비’인데, 순자(荀子)에게 배운 중국 고대의 이름난 사상가이자 법가 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한비자는 한나라가 갈수록 약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매우 걱정이 되어 여러 차례 한 왕에게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모략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한비자는 이런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춘추시대 송(宋)나라에 술을 만들어 파는 장씨(莊氏)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술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고 손님들에게도 공손히 대접했으며 항상 양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팔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술집임을 알리는 깃발까지 높이 세워 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집보다 술이 잘 팔리지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는 마을 어른 인 ‘양천’에게 그 이유에 대하여 자문을 구했습니다. 양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간단한 문제인데, 바로 당신 집의 개가 너무 사납기 때문이네.”
장씨는 술장사와 개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양천은
“사나운 개가 술 사러 오는 사람들을 보고 짖어 대서, 특히 아이들이 심부름을 왔다가 놀라 달아나는 판인데, 누가 감히 술을 사러 오겠는가? 이 때문에 술은 시어져 버리고 팔리지 않는 것이네”
결국 양천의 말은 개를 없애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서 구맹주산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이 구맹주산이라는 말을 우리의 신앙에 접목해본다면 ‘편견이라고 하는 자신의 습관과 관점에 빠져 안주하게 되면 바른 신앙이 가까이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습관은 사자처럼 무섭습니다. 습관을 이겨내고 바꾼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습관은 잘못된 편견마저 옳은 것처럼 여기게 만듭니다. 성경에 수없이 등장하는 유대인들, 사두개인,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율법사들. 이들의 편견은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이신 예수님마저 십자가에 못 박게 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초대교회 시대를 지나면서 정말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순교자로 만들었습니다. 편견을 깨지 않으면 진리도 올바른 신앙도 결코 가까이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어려움이 어느 정도인지 예레미야 13: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자신의 편견에 안일하게 안주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된 신앙의 습관이 편견으로 남아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편견을 경계목록 1호로 올린 이유도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이 빠져있으면서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며,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고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본문말씀에서 편견을 깨뜨리시고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31-32절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4-35절입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이처럼 상황을 올바로 판단하면 편견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 중요성을 예수님께서는 본문 이후의 36-39절에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는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편견은 색깔 있는 안경과 같습니다. 자신이 쓰고 있는 안경의 색깔에 따라 세상이 그렇게 보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에서의 삶도 문제가 되지만 영적으로는 영원한 생명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세상적인 편견과 영적인 편견을 잘 살펴서 늦지 않게 바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는 뼈를 깎는 노력을 해서라도 편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관점과 생활을 갖추는 것이 곧 생명의 길임을 기억하고 삶이 새로운 은혜로 가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