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잘 되는 길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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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3-18 15:35
*** 세상에서 제일 잘 되는 길 / 에베소서 1:3-14
에베소서 1:3-14,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 들어가는 말
북한을 다녀온 어느 전도자의 이야기입니다.
평양 외곽의 어느 공장에서 지하교회 성도들이 기도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성경이나 찬송가가 없었기 때문에 종이쪽지에 성경구절을 적어서 돌려가며 읽고,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며 찬송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노동당 반장이 뒤에 와서 서있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소리 없는 찬송을 하고 있는데, 그 반장이 다가와 “동무들. 뭐하는 거요?”하고 물었습니다. 성도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한 대담한 여자 성도가 “우리는 지금 독보회를 하고 있소. 동무도 같이 앉아서 안하시려오?”라고 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그 반장은 한참 앉아 있다가 “동무들이나 많이 하소.”라고 하고는 가버렸습니다. 그 순간 성도들은 ‘그 반장의 눈을 어둡게 하여 그들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은 소리도 내지 못하며 입만 벙긋거리며 찬송하고, 눈을 뜨고 기도하는 일이 다반사(茶飯事)라고 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발각되는 순간 처형되거나 강제노역소, 정치부수용소 등에서 죽음에 이르도록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도 왜 그토록 생명을 걸고 예배하려고 하겠습니까? 지금 이 나라의 많은 교회들이 바이러스 공포 때문에 공적예배를 하지 못하고, 가정에서 개별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그나마도 방송시설이 잘 된 교회는 인터넷 예배라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교회는 성도 각 자의 신앙에 맡기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것은 많은 교인들이 ‘집에서 예배하니 너무나 편하고 좋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배의 중요성과 예배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과 복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22-24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이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예배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행복하게 하는지를 전하려고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에베소서는 교회의 성격과 교회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하여 소상하게 밝히는 책입니다. 에베소라는 도시는 소아시아의 서해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카이스테르(Cayster)강 하구의 에게 해에 접한 항구도시입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교통이 발달하고 교역이 활발하여 상업과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고대 아시아 최대의 도시를 이루었습니다. 또한 에베소 성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세 성읍 중 하나였습니다. 에베소는 종종 그리스도 신앙의 셋째 가는 도시라고 불렸습니다. 예루살렘이 첫째이고 안디옥이 둘째였는데 이 중에서 에베소는 가장 부유한 성읍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다이아나(Diana, 로마신화의 ‘사냥의 여신’ ‘달의 여신’ ‘자연의 여신’) 신전을 비롯한 거대한 신전들이 있으며, 난잡한 우상숭배가 생활처럼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의 시민이자 철학자였던 ‘헤라클리투스(Heraclitus)’는 우는 철학자로 유명했는데, 그는 에베소 사람들에 대하여 “신전의 도덕은 짐승들의 도덕보다 더 나쁜 것이었으며, 에베소의 거주자들은 오직 물에 빠뜨려 죽이기에 알맞은 자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2차와 3차 전도여행 때에 이곳에 들러 복음을 전했으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울은 다른 어떤 도시에서 보다 오래 에베소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계시록 2:2절에서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라고 하셨는데, 이는 ‘부귀영화가 있고 타락한 도시에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그만큼 힘들고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신앙에 대하여 조금만 눈감고 세상과 타협하면 부와 쾌락을 누리며 평안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아는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에베소 교회를 염려하며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의 염려하는 마음이 사도행전 20:31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하는 말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편지가 바로 에베소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위치를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목적을 거듭해서 가르칩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기쁘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지키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목적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상황은 지금 우리의 상황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오늘의 성도들도 조금만 신앙에 대하여 눈감고, 세상과 적당하게 타협하게 되면 두루두루 즐기며 평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삶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본문 7절 말씀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말씀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합니다.
※ 세상에서 제일 잘 되는 길은 예배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책이 ‘모세오경’입니다. 즉 모세가 기록한 다섯 책인데,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다섯 책입니다. 이 책들을 ‘율법서’라고 하여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곧 신앙의 법입니다. 이 책 중에서 레위기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방법’을 기록한 책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구약 성경의 전부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올바로 예배하는 것,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증표와 같습니다. 시편 50:4-5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성도들 즉 하나님의 백성 된 증표가 예배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예배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보았던 출애굽기 20:22-24절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에 하나님께서 친히 임하신다고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하는 이 자리에도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우리와 교제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고 우리 영이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혼자서 몰래 예배해도 되는데 굳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모여서 예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마태복음 18:20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비록 두 세 사람이 모였다고 할지라도 예배하는 자리에는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즉 주님께서는 예배하는 사람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를 자녀로 인정하시고, 예배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하필이면 예배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까? 먼저 이사야 43:7절을 봅시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고 하십니다. 이어지는 21절도 봅시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 본문말씀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지요? 본문 13-14절을 봅시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죽은 우리의 영을 살리신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의 목적에 걸맞게 예배할 때에 영광을 받으시고 예배하는 자에게 모든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 예배에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예배는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모든 예배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에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에는 온전한 헌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헌신이란,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모든 관심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신 경고의 말씀을 봅시다. 이사야 29:13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쉽게 말해서 ‘마음이 담기지 않은 지식적인 예배’를 말합니다. 아래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어느 고등학교 여학생이 월요일 아침에 친구에게 쓴 편지 내용입니다.
나는 어제 너희 교회에 갔었어. 비록 네가 나를 단 한번 초대했지만, 너는 내가 교회에 나오는 것을 진심으로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야. 나는 네 옆에 앉으려고 너를 찾았지만 너는 없었어. 그래서 나는 맨 뒷줄에 앉으려 했는데, 그 줄은 꽉 차서 앉을 수가 없었단다. 그때 안내하시는 분이 오셔서 나를 맨 앞으로 인도해주셨는데, 앞으로 나아가는 나는 마치 행진하고 있는 것 같았어. 곧 예배는 시작되었고 성도들은 내가 모르는 찬송가를 불렀어. 나는 따라서 흉내 내려고 노력했고 노래하는 척했지만 결국은 그 찬송을 하지 못했지 뭐야.
그런데 나는 성도들 중에 몇몇 사람들이 찬송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어. 한숨과 하품을 하면서 그들은 단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내가 학교에서 좋다고 여기던 몇 명의 아이들은 서로 속삭이고 있었으며. 또 어떤 사람은 킥킥대며 웃고 있었어. 나는 너희 교회가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목사님의 설교는 재미있었지만 성가대원 몇 명은 그런 것 같지가 않았어. 피곤해보였고 지겨운 표정이었으며, 어떤 사람은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 중 한 사람에게 계속 미소 짓고 있었어. 목사님은 신앙의 확신에 대해 설교하셨는데. 그 말씀이 내게 와 닿았기 때문에 예배가 끝나면 이것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 하지만 축도가 끝남과 동시에 이 모든 생각은 사라졌어. 나는 옆에 있던 사람에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했으나 그들은 진심으로 답례하는 것 같지 않았어. 나는 그 말씀에 대해서 토론할 친구를 찾았지만 그들은 새로운 화제를 이야기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어. 한 소녀와 잠시 이야기를 했지만 곧 인파에 휩쓸려 우리들의 대화는 중단되었어. 우리 부모님은 교회에 다니시지 않지만 나는 사랑이 있는 모임에 가입하려고 어제 혼자 교회에 갔던거야. 그곳을 떠날 때 교회 입구에 있는 게시판을 보니 ‘사랑이 넘치는 교회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고 씌어 있었어. 그러나 나는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을거야. 미안해.
저는 이 여학생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저 역시 청년시절부터 이런 마음을 너무도 많이 느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목회자들이 모여 예배하는 자리에서도 이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저 역시도 그럴 때가 있었습니다. 예배가 예배 같지 않고 너무나 형식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서 관심을 거두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으셨습니다. 말라기 1:6-10절에 그 내용이 있습니다. 6절입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8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이 내용들은 마음에도 없이 형식적으로 드리는 제물 즉 형식적인 예배를 의미합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10절에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얼마나 싫으셨으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성전 문을 닫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줄도 모르고, 마음을 담지도 않은 예배는 오히려 하나님을 화나게 하고 떠나시게 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예배는 하나님의 응답과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사무엘상 7:9-10절입니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하나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온전한 헌신의 예배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됩니다.
예배의 중요성에 대하여는 정말 할 말이 많지만, 예배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 된 표징이라는 것과 마음을 담은 진정한 헌신 예배라는 두 가지만 말씀드렸습니다. 잠언 16:7절에서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본문말씀도 전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 모델인 진정한 감사와 찬양의 예배를 말씀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과 진리의 예배만 할 수 있어도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위기가 닥쳐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정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진정한 예배자가 되어서 세상에서 가장 잘 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