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는 사랑을 합시다.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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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3-12 15:31
*** 후회 없는 사랑을 합시다. / 요한복음 13:31-35
요한복음 13:31-35,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임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들어가는 말
몇 년 전부터 끊임없이 제 마음을 두드리는 관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신앙에서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굳이 이 말씀을 전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것이지만 저 자신부터가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그런 사랑에 이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강권하시는 듯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또 다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다만 이제는 우리가 잘 행하지 못하는 고차원적인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사랑의 길을 찾아보려 합니다.
늦게 얻은 딸을 너무 사랑했던 딸 바보 아빠가 있었습니다. 아빠의 취미는 ‘인형을 좋아하는 딸에게 선물하기 위해 인형을 고르는 것’입니다. 덕분에 딸의 방에는 예쁜 인형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새로운 인형을 사 들고 돌아온 아빠가 어린 딸에게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우리 예쁜 딸은 많은 인형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 어떤 인형이 가장 좋아요?” 잠시 망설이던 딸이 ‘가장 좋아하는 인형’이라고 내미는 것을 보고 아빠는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인형은 오래전 딸에게 사준 인형이라 지금은 매우 낡고 볼품이 없었습니다. 아빠가 왜 그 인형이 가장 좋은지 묻자 딸이 대답했습니다.
“이제는 이 낡은 인형을 좋아하거나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으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해 주는 거예요.”
비록 꼬마의 마음이지만 배려 깊은 사랑이 참 아름답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헌 것보다는 새것을 좋아하고 이왕이면 화려하고 멋진 것을 좋아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본능적인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이런 인간의 욕심에 대하여 잠언 30:15절에서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라고 표현합니다. 욕심으로 채워진 마음은 더 큰 욕심만 자꾸 밀려옵니다. 욕심은 또 다른 욕심을 부르고 그 고리는 끝이 없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대부분 자기 자신에게만 빠져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거나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게 되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 온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할 때는 눈에 콩깍지가 씐다.”고도 합니다. 여러분도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배려의 사랑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3년 공생애 기간이 거의 끝나가는, 즉 대속의 죽음이 다가온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가룟 유다의 배반을 언급하시고,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 위하여 자리를 빠져나갑니다. 본문 31절에서 “그가 나간 후”라는 말씀이 곧 이 상황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머지 열 한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이제 영광을 받을 기간, 즉 죽음의 시간이 다가왔다.’고 하시면서 마지막 부탁을 하십니다. 그 부탁이 본문 34-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께서 “새 계명”이라고 하시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즉 지금까지 제자들이 알고 있었던 율법적인 계명이 아닌, 주님께서 새롭게 주시는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새 계명”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부터 시작된 종말의 때에 지켜야 할 계명’이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을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미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인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중에 ‘호텔 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외롭게 보인다.’고 느낄 그런 그림입니다. 그림의 배경은 작은 호텔 방입니다. 속옷 차림의 여성이 여행용 가방도 풀지 않은 채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무릎 위에는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지만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상념에 잠겨 그저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여인의 그늘진 표정에는 어떤 슬픔 같은 게 배어 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 ‘호퍼’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주의 화가이기 때문에 현대사회의 인간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앞의 서론에서 말씀드렸듯이 현대인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무관심하기 때문에 외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마태복음 24장에서 종말의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12절에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거짓과 불법이 난무하여 국민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죽일 듯이 으르렁거립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이익이 주어지면 대항하고 폭력을 휘두릅니다. 이런 현상은 마지막 때를 향하여 가면서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행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고 경고하십니다. ‘촛대를 옮긴다.’는 말은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사랑을 버린 사람에 대한 경고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본문 35절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표징이 서로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즉 ‘사랑을 버리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 장으로 부르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사랑으로 하지 아니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십니다. 1-3절을 봅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정말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안에 나오는 내용은 최고의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과 큰일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어 내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이런 신앙을 가지고도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작은 일 한 가지라도 진정한 사랑의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의미 있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매그너스 요양병원에는 특별한 의사가 있습니다. 1926년생으로 올해 94세인 우리나라 최고령 의사인 ‘한원주’ 여사입니다. 가족들도 힘겨워하는 치매 노인들을 위해 일하면서 요양병원에서 받는 월급 대부분을 사회단체에 기부하고, 주말이면 외국인 무료 진료소에서 자원봉사하고, 주기적으로 해외 의료봉사도 다닙니다. 한원주 의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만 가지고도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위로만으로도 병이 좋아지는 경우가 있거든요. 대의(大醫, 위대한 의사)는 역시 정신적인 부분까지도, 말하자면 토탈 힐링(total healing)을 하는 그 상태가 대의의 직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비록 힘들고 수입이 적을지 몰라도 역시 우리 의사가 가야 할 길은 그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원주 의사는 큰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과 위로, 이것으로 병이 호전될 수도 있고 나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품음과 사랑을 담은 위로는 돈이 드는 것도 아니며, 힘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사람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책인 아가서 8:6절에서는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장 손쉽게 시작할 수 있는 사랑이 이것입니다. 곧 생활 속에서 사랑을 나타내는 작은 표현인 ‘이해(理解)’와 ‘관용(寬容)’, ‘위로(慰勞)’와 ‘배려(配慮)’입니다. 우리민족은 세계 어떤 민족보다 배려하는 마음이 돋보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지하철이나 버스 등의 대중교통에서의 ‘경로 우대석’ ‘임산부석’ ‘노약자석’ 등이나, 주차장에서의 ‘장애인 주차공간’ ‘여성운전자 주차공간’ 등.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이 격찬하는 배려의 현장입니다.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작은 배려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정에서 다른 가족들을 위하여 화장실, 욕실 등에서 깨끗하게 뒤처리를 하거나 정리하는 것, 공동시설에서의 청결한 사용, 뒷사람을 위하여 문을 잡아주는 것, 무거운 짐을 들어주거나,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 등. 환자나 상을 당한 사람을 방문하고 위로하는 것. 수고하는 청소부나 관리원, 경찰 등에게 음료수나 차 한 잔을 건네는 것. 횡단보도를 힘겹게 건너는 노약자를 잡아주는 것. 그리고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을 이해하과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는 관용도 작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위로와 배려 등의 작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을 매일 만나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을 작은 관심으로 찾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은 사랑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24절에서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라고 하십니다.
미국의 39대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원칙과 시간을 너무도 철저하게 지키는 성격이었습니다. 특히 약속 시간보다 늦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인 로잘린 여사는 조금 여유로운 성격의 소유자여서 외출하기 위해 화장하고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려서 지미 카터는 스트레스를 받곤 했습니다. 지미 카터는 그런 부인에게 자주 잔소리를 하곤 했습니다. 어느 해, 로잘린 여사의 생일이었습니다. 지미 카터는 부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그동안 약속 시간에 관하여 내가 당신을 너무 괴롭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시간에 관하여 좀 더 자유롭게 생각하면서 서로 더욱 사랑하도록 합시다.”
편지를 받은 로잘린 여사는 이 편지가 그 어떤 것보다 최고의 생일 선물로 ‘시간 지키는 것에서 자유로움을 줬다.’며 너무도 기뻐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부부 사이에 작은 불화가 사라지면서 주변에서도 인정받는 가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은 정말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삶의 패턴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감동을 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42절에서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양과 염소 비유를 통하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크고 위대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하십니다. 작은 관심만 가지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내 코가 석자”라고 하면서 ‘자신의 앞 가름에 바빠서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잠언 21:13절입니다.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뿐만 아니라 야고보서 2:13절에서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계시록 22:12절에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행한 작은 사랑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보상은 주님께서 해주십니다.
이 별 것 아닌 작은 이해와 관용, 배려와 위로, 관심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서로 사랑’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우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고,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즉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이렇게 생활 속에서 진정한 마음을 담은 작은 사랑을 실천하여 언젠가 주님을 만날 때에 후회를 남기기 않는 최고의 행복을 만들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