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능력의 시작입니다.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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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2-24 13:21
*** 믿음, 능력의 시작입니다. / 마가복음 5:25-34
마가복음 5:25-34,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 들어가는 말
거미가 줄을 치는 것을 자세히 본 적 있습니까?
거미는 자신이 줄을 치려고 하는 장소를 물색하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가는 줄을 뽑으며 목적지에 갑니다. 그곳에서 시작하여 거미줄의 본선이 되는 굵은 줄을 뽑으며 버팀줄을 만듭니다. 튼튼한 그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버팀줄인 첫 줄이 가장 중요합니다. 첫 줄이 질기고 강해야 다음 줄을 계속 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미는 첫 줄을 칠 때, 가장 많은 정성을 쏟아 붓습니다. 약하다 싶으면 걷어내고, 다시 첫 줄을 칩니다. 또 약하다 싶으면 미련 없이 걷어냅니다. 그렇게 몇 차례 줄을 치고, 걷어 내기를 반복(反復)하여 질기고 강한 첫 줄을 완성하고는 그물을 짜기 시작합니다.
거미에게 첫 줄이 중요하듯이 그리스도인에게도 첫걸음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첫걸음은 ‘믿음’입니다. 창세기 1:1절을 아시지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왜 성경을 시작을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할까요? 그것은 온 우주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면 신앙의 길에 들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장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서 11: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이자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의 근원이 되는 진정한 믿음에 대하여 살펴보려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두 이적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 계실 때에 회당장인 야이로가 ‘자신의 병든 딸을 고쳐달라.’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을 따라 그의 집으로 가던 중에 혈루증을 앓는 한 여인 때문에 걸음을 멈추게 됩니다. 혈루증이란 만성 출혈병으로 여성의 자궁에 이상이 생겨 피가 멎지 않는 병입니다. 이 병은 현대의학에서 암의 일종인 ‘고립점막하섬유종’(solitary submucous fibroids)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거의 불치병에 해당합니다. 이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몰래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 살짝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나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즉시 12년 동안이나 흐르든 피가 멎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아시고 무리를 돌아보시면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아니 선생님, 지금 이 많은 사람들이 밀고 당기는 것을 보시면서도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고 물으십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제자들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은 계속 무리를 둘러보셨습니다. 여인은 더 숨길 수 없음을 알고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며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사랑, 혈루증 여인의 믿음, 제자들의 무심함 등. 여러 정황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본 포인트는 ‘예수님 주변에서 밀고 당기는 무리들’입니다. 이 무리들과 지금의 예수님을 믿는다는 많은 교인들이 오버랩(overlap)되는 것을 봅니다. 즉 당시의 무리들처럼 지금의 수많은 교인들이 기도하며 예배하며 예수님 주변에서 서성거리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능력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지금부터 찾아보겠습니다.
※ 그리스도인이 무능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께, ‘아니 선생님, 지금 이 많은 사람들이 밀고 당기는 것을 보시면서도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고 물으십니까?’라고 했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을 것이고 예수님을 스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능력이 나가지를 않았습니다. 즉 무리들은 아무도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를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지금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우리나라 인구의 20%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을 빛과 소금이라고 했는데, 만일 20%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한다면 당연히 우리 사회나 직장이나 학교, 모든 모임에서 조금씩이라도 밝아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밝아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까? 왜 예수님의 시대에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할까요? 히브리서 4:2절을 봅시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이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무능함에 대한 정곡을 찌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말씀을 많이 듣고 알고, 기도, 찬양, 예배에 아무리 열중하더라도 단 한 가지 ‘믿음으로 하지 않으면’ 유익도 없고 하나님의 능력도 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기도와 함께 하나님 능력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주변에서 밀고 당기던 무리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에 매료되었지만 ‘자신에게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많은 사람들의 믿음에는 인색하고 우유부단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 말씀이 내게 엄청난 능력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삶이 고달프고, 시련이 많고, 염려하는 일들이 산적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이 모든 것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마치 우물을 곁에 두고도 목말라 허덕이는 형상입니다. 우리 옛 가요 중에 우유부단한 사람들이 부르는 주제가가 있습니다. 예전에도 설교 중에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이정표 없는 거리”라는 노래입니다. ‘이정표 없는 거리 헤매 도는 삼거리길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세 갈래길 삼거리에 비가 내린다. 바로가면 경상도길 돌아가면 전라도길 이정표 없는 거리 저리가면 충청도길 와도 그만 가도 그만…’이런 노랫말입니다. 정말 우왕좌왕 하며 흔들리는 세상 사람들의 삶을 그린 노랫말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런 삶을 살면 큰일 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8:21절입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고 했으며, 요한계시록 3:15-16절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예수님이 경고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 능력을 부르는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링컨 대통령의 유고로 미국의 17대 대통령이 된 앤드류 존슨(Andrew Johnson)은 긍정의 힘을 발휘했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세 살 때에 아버지를 잃었고 몹시 가난하여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열 살에 양복점에서 성실하게 일하여 돈을 벌고 결혼 한 후에야 읽고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후에 존슨은 정치에 뛰어들어 주지사, 상원의원이 된 후에 16대 미대통령인 링컨을 보좌하는 부통령이 됩니다. 그리고 링컨 대통령이 암살된 후 미국17대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지만 상대편으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습니다. “한 나라를 이끌어 가는 대통령이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하다니 말이 됩니까?” 그러자 존슨은 침착하게 대답하며, 다음의 한마디에 상황을 바꾸어버립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초등학교를 다녔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초등학교도 못 나오셨지만 전 세계를 구원의 길로 지금도 이끌고 계십니다. 이 나라를 이끄는 힘은 학력이 아니라 긍정적 의지요 미국 국민의 적극적 지지입니다.”
학력은 없었지만 하나님을 신뢰했던 앤드류 존슨 대통령은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말도 안 되는 헐값인 720만불(현재 한화 900억원)에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말합니다. 즉 사람의 행동과 생활 속의 모든 일들은 그 사람의 생각에 따라 움직여지고 나타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생활로 나타나며,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생활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말씀을 믿음으로 나아가는 실천적인 삶입니다. 혈루증 여인은 병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전 재산을 잃고, 병은 더 깊어지는 절박한 상황이었지만 자신의 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마을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는 사회관습의 벽을 뛰어넘기로 결심했습니다. 왜냐하면 혈루증은 하혈하는 유출병의 한 종류인데, 율법에서 불결한 병으로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민수기 5:2-3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증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되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하시매” 이처럼 혈루증 여인은 사람들을 접촉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 규례를 깨고 사람들 틈에 섞여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이 여인의 생각은 “내가 그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이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모험을 동반합니다. 우리가 이런저런 상황에 휘둘리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자신의 생각에 빠지면 믿음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혈루증 여인은 자신의 모든 불가능한 환경을 이겨내고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일으켰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정말 위대한 믿음이지 않습니까? 마가복음 11:23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여인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예수님의 뒤쪽 옷자락을 잡았습니다. 이 설명은 혈루증 여인의 확고부동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었지만 이런 믿음은 없이 예수님의 관심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든지 아니면 전혀 모른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는 것만으로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에 응답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지금 온 세계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우한발 바이러스와 조류독감, 때 아닌 메뚜기 의 엄청난 떼가 아프리카 지역과 중국을 덮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재난이 시작되었는가?’ 라는 생각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재난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제련을 통하여 순금이 나오듯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진정한 믿음은 어려움이 닥칠 때 나타납니다. 지금은 진정한 믿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믿을만한 상황에서 믿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1절에서 믿음의 정의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쉽게 번역된 현대어성경을 보겠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는 게 아니겠습니까? 또한 아직 눈앞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일지라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게 아닙니까?” 우리가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믿음으로 갈 수 있습니다. 불안, 두려움, 염려, 걱정 이 모두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심각한 영의 질병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6-8절에서 심각하게 경고하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지금은 믿음이 꼭 필요한 때입니다. 성경에 갇혀있는 믿음, 지식으로 쌓인 이론적인 믿음이 아닌 생활 속에서의 실천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이 되심을 믿습니까?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담대하게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의 문제가 해결되고 삶이 회복됩니다. 이것은 배목사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도 예수님 주변을 서성거리는 믿음 없는 무리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을 신뢰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