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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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1-29 15:58
*** 인간관계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 / 누가복음 14:12-14
누가복음 14:12-14,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렵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요? 저는 개인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여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계 종교 철학자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년~1965년)’는 1923년 ‘나와 너(Ich und Du)’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 책에서 부버는 인간을 일종의 ‘사이(between)’ 속에서 살아가는, 즉 ‘관계의 존재’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세계를 대하는 태도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나-너(I-Thou)’ 관계와 ‘나-그것(I-It)’ 관계이다. 나라는 존재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주변에 항상 다른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선호하는 타입을 ‘만났을 때 편안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만나면 편안한 사람’에 속합니까? 아니면 부담스러운 사람 혹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에 속하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한 가지 관계가 더 있습니다. 곧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공적인 관계가 성공적인 인생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40절에서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곧 우리의 인간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관계의 정석을 살펴보려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을 포함하는 14장에는 하나의 이야기를 통하여 관련된 여러 주제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은 한 바리새인의 지도자 집에 음식초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보신 것은 수종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이를 통하여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안식일 개념을 고쳐주셨습니다. 다음으로는 식사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를 보시면서 ‘청함을 받았을 때에 낮은 자리에 가서 앉으라.’며 겸손한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초청한 주인에게 ‘사람들을 대접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갚으실 수 있도록 자신에게 되갚을 수 없는 사회적인 약자를 초대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큰 잔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잔치에 합당한 사람’과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합당한 자세’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이 모든 말씀들은 모두 ‘관계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이 여러 주제 중에서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했던 주인에게 하셨던 말씀이 본문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했던 주인은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하여 높은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즉 그 마을에서 유지들을 초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광경 속에서 주인의 속마음을 간파하셨습니다. 즉 주인의 다른 속셈은 자신이 초대한 이 사람들이 다음에는 자신을 초대해 줄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고 하시면서, 주인의 계산이 너무 세상적이어서 영적으로는 유익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서로를 초대하여 갚음이 되면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고 하시며,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이 있도록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대접을 하거나 어떤 도움을 줄 때,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젠가는 되갚음에 대한 기대를 품을 때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행사나 가정에 애경사가 있어서 사람들을 초대할 때면 당연히 자신의 신분을 높여줄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명망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될 사람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쌓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는 합당하지 않는 인간관계라고 하십니다. 본문 14절에서도 말씀하시지만 마태복음 6:1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는 당장 눈앞의 것에만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 예수님께서 경계하시는 관계가 있습니다.
동물들 세계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사자가 총지휘관이 되었고 동물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습니다. 동물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수군거렸습니다. “당나귀는 멍텅구리라서 전쟁에 방해만 될 테니 돌아가는 게 낫지.” “토끼는 어떻고, 저런 겁쟁이가 어떻게 싸움을 한다고 온 거야! 한심하군.” “저 개미는 저렇게 작고 약해서 어디다 쓰겠어?” “저 덩치 큰 코끼리는 적에게 금방 들통이 나고 말걸.” 이렇게 서로를 헐뜯고 있었습니다.
이 소란을 들은 총지휘관인 사자가 호통을 쳤습니다. “시끄럽다. 모두 조용히 해라! 당나귀는 입이 길고 소리가 커서 나팔수로 쓸 것이다. 그리고 토끼는 걸음이 빠르니 전령으로 쓸 것이며, 개미는 작아서 적의 눈에 안 띄니 적진에 게릴라로 파견할 것이고, 코끼리는 힘이 세니 전쟁 물자를 운반하는 일을 할 것이다.”
이 우화는 ‘지혜로운 용병술’을 말합니다. 즉 각 사람의 장점을 살려서 적시적소에 사용하는 지혜로움과 함께 좋은 인간관계를 보여줍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단점도 장점으로 살려서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관계나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 다른 사람의 단점 때문에 힘들어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면 고린도전서 12:14-27절을 봅시다. 긴 내용이지만 함께 읽어봅시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5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22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아보게 하셨느니라. 26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이 말씀에서는 서로 차별하는 인간의 전형적인 관계 오류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속에서 ‘이웃이 누구냐?’라는 물음에 대하여 강도만난 사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시당하고 차별받던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을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를 죄인으로 돌로 치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를 용서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 세리들, 멸시받던 어부들, 나면서 맹인 된 사람 등. 예수님께서는 인간 사회에서 가난하거나, 병들거나, 죄인 취급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에 대하여 경계하셨습니다. 야고보서 2:6-9절입니다.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그러므로 어떤 이유에서든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관계는 어떤 것입니까?
누가복음 19:9-10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여리고 세관의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있을 때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삭개오가 자신의 행위를 회개하고 주님께로 마음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회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인간관계의 핵심입니다. 곧 좋은 인간관계를 이루는 것은 이해하고 관용하는 넓은 마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동원하여 시시비비를 가리며 시시콜콜 따지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해야 할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설령 잘못했거나 실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이해해주고 넓은 마음으로 용납하고 품어주는 따뜻한 마음을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차가운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모이지를 않습니다.
역사적인 인물 중에서 나폴레옹은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는 평가와 함께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없다.’고 하면서, 전쟁으로 유럽을 점령했었지만 결국에는 세인트 헤레나 섬에 유배되어 64세를 일기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는 나약하기 그지없었고 유대인들의 시기와 로마 권력에 의하여 십자가 형틀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그렇게 실패한 인생처럼 보였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며 20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온 세계를 점령하셨습니다. 권력과 힘의 논리를 앞세운 나폴레옹보다 이해와 용서와 사랑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서셨던 예수님을 사람들은 더 사랑했고 모여들었습니다. 본문 1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세상적인 논리로는 도저히 계산이 되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 인정받는 결과를 남기는 것이 됩니다. 사람들은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던 황제보다는 소외된 사람, 연약한 사람을 품으시고, 죄인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좋아하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23-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 말씀은 인간관계가 회복되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저는 이 짧은 글을 읽으면서 이 글의 의미가 ‘관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자세히 보지도 않을 것이고 오래 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불평하고 미워하고 싫은 감정을 느끼는 것은 관심어린 마음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 하나 설렁설렁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지극한 사랑과 관심으로 사람들을 대하셨고, 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조차 강압적으로 바꾸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먼저 본을 보이셨고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려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인간관계였습니다. 우리는 비록 바쁜 일상을 살아가지만 사랑과 이해와 관용의 마음으로 관심을 가지고 답답하더라도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면서 기다려주는 마음을 가집시다. 거친 바람보다는 따뜻한 사랑의 관심이 사람을 변화시키며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의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닮아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어 주님의 사랑을 실현해 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