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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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9-12-18 13:29
***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 요한복음 21:15-18
요한복음 21:15-18,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 들어가는 말
해마다 돌아오는 성탄의 계절입니다. 사람들은 같은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면 습관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성탄절도 마찬가지로 어릴 때는 성탄절이 다가오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고 무엇인가를 기대하기도 하면서 설렘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계속적으로 반복이 되면서 사람들은 ‘그러려니’하는 마음으로 바뀌면서 습관적인 행사로 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시간이든지 일이든지 반복이 된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것은 없습니다. 설령 매일 반복이 된다고 하더라도 시간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상황도 달라집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오늘이라는 시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날이며 새로운 기회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매일 주어지는 반복되는 일을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날, 새로운 일, 새로운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3:13절에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지금’ ‘현재’라는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2019년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는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받아들이며 감사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은 성탄절을 몽환적인 분위기를 즐기며 자신들의 기쁨을 추구하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마음에 성탄절의 의미를 새롭게 일으켜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 찾아오셨을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자 제자들은 두려웠고, 생계를 위하여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고, 갈릴리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미리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믿지를 않았습니다. 일곱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을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곳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빈 그물로 허탈하게 돌아올 제자들을 위하여 예수님은 그 새벽에 해변에서 불을 피워두셨고 아침식사까지 준비해 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 전에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형제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에 행하셨던 이적을 다시 한 번 보이셨습니다. 빈 배로 돌아오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큰 물고기 153마리를 잡았습니다. 이 제자들은 아마도 3년 전에 자신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상황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앞 12절에서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미안함과 부끄러운 마음에 제자들은 말없이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그 때 침묵을 깨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느닷없는 질문에 베드로는 무척 당황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직전에 베드로는 ‘자신은 결코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 했었지만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모른다고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아도 이 사실이 기억나서 고개조차 못 들고 있을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셨으니 얼마나 무안했겠습니까!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며, 예수님께서 물으신 그 ‘아가페’ 사랑이 아닌 ‘필레오’ 사랑으로 대답했습니다. 아가페는 ‘대가없는 무조건적인 헌신적사랑’이며, 필레오는 ‘가족이나 형제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 필레오 사랑으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는 훗날에 있을 베드로의 상황까지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상하고 낙심한 사람들에게까지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대하게 됩니다.
※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찾아오십니까?
‘파파파노의 크리스마스’라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러시아의 한 작은 마을에 ‘파파파노’라는 착한 구두 수선공 할아버지가 살았습니다. 어느 크리스마스 전날이었습니다. 그는 잠이 들었는데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내일 크리스마스에 할아버지를 방문하고자 합니다.” 잠이 깨었을 때는 눈 속에서 솟아오르는 찬란한 태양이 밝게 비치는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예수님의 방문을 약속 받은 할아버지는 크리스마스 때만 특별히 쓰는 커피 주전자를 난로 위에 올려놓고 구둣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밖을 내다보니 청소부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길 건너편을 향해 “이리 들어와요. 추운데 몸이나 녹이고 커피라도 들어요.” 청소부는 너무나 좋아서 빗자루를 던져두고 언 몸을 녹이고 커피를 마셨습니다. 점심때가 되어도 예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한 누더기 옷을 입은 여인이 홑이불에 어린 아이를 싸들고 걸어옵니다. 노인은 측은하여 그를 가게 안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무심코 아기의 발을 보니 빨갛다 못해 파랗게 얼어 있었습니다. ‘아기가 신발이 필요할 텐데. 쯧쯧.’하면서 어젯밤 보았던 조그마한 신발을 신겨보았습니다. 신기하게도 꼭 맞았습니다. 아기와 여인은 행복한 듯 미소를 지었습니다.
겨울의 해는 빨리도 넘어갑니다. 이미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녁준비를 위해 올려둔 스프와 빵이 데워지고 있을 때 한 무리의 거지들이 나타났습니다. 늘 하던 대로 할아버지는 그들에게 자신이 먹을 스프와 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거지들은 모처럼 성탄절에 행복했고 파파파노는 기뻤습니다. 그러나 결국 저녁이 되어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자 할아버지는 의자에 털썩 주저 않았습니다. ‘결국 꿈이었단 말이지. 혹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놓쳐버렸나!’ 이때 갑자기 어디선가 “파파파노 할아버지, 나를 보셨지요?” 꿈속에서 들었던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어디 계십니까?” 묻자 “나는 오늘 할아버지 가게에 세 번이나 방문하였지요. 한 번은 청소부로. 한번은 아기를 안은 누추한 여인으로. 한 번은 거지로 말이에요. 나에게 베푸신 따스한 사랑. 정말 감사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찾아오시는 모습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기억해야 하는 성탄절의 의미는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을 떠나 죄로 인한 고통의 삶을 사는 인생들에게 평안과 쉼을 주시기 위하여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의 사람의 형상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6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파파파노 할아버지를 찾아오신 주님께서 할아버지로 하여금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맺게 하신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삶에 향기로운 열매를 위하여 우리를 찾아오시고 여러 모양으로 만나주십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꿈꾸었던 그리스도의 왕국의 꿈이 무너지자 실망과 좌절감으로 인생의 패잔병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6:31-32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실망과 좌절감으로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 베드로와 다른 여섯 제자들은 생계를 위하여 다시 그물을 잡았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고기는 없었습니다. 그렇잖아도 마음이 슬프고 무거운데 고기마저 잡히지 않았으니 얼마나 허탈했겠습니까!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셔서 그 실망과 좌절로 허탈한 제자들을 위하여 숯불을 피워두시고 따뜻한 음식까지 준비하셨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지금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실망하고 계획한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 좌절하고 허탈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아시고 따뜻한 사랑으로 준비해 두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삽니다. 하지만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아시고 미리 준비해두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27-29절을 봅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우리가 세상의 환경 때문에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도록 약속하신 것입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나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장래의 일들을 미리 알려주신 것은 그런 일들이 일어날 때에 ‘주님께서 이 일을 하시는구나!’라고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한다면 반드시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주의 깊게 살피며 기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물으셨던 그 물음을 봅시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왜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요한복음 14:23-24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을 듣고 지킬 것입니다. 베드로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의 일도 소홀히 할 것이며, 당연히 주님께서도 일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에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도 부어집니다. 주님께서 나를 찾아오시는 것은 나에게 주님의 일을 맡기기 위함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종교에서 어떤 교주나 우상이 먼저 사람을 찾아왔다는 곳이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비방 종교는 모두가 사람이 신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우상이나 스스로 신이 된 인간은 이사야 46:6-7절 말씀처럼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도금장이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 있고 거기에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불교인이 부처를 찾아가서 자신의 어려운 형편을 하소연하며 자신을 도와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는 ‘인간의 모든 고통은 전생의 업보이며 욕심으로부터 오는 것이니 고행을 통하여 마음을 비우라.’고 했습니다. 이 불교인은 아무런 해결도 주지 않고 도움도 되지 않는 부처의 가르침에 실망했습니다. 그가 교회를 찾아와서 목사님께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말하며 ‘하나님이 자신을 도울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마태복음 11:28-30절을 읽어주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그러면서 목사님은 요한복음 6:65절의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는 말씀을 보여주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셔서 여기 오셨으니, 하나님께서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불교인은 그날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성탄절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신 날입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나를 찾아오신 주님을 생각하며 진정한 감사를 합시다. 그리고 파파파노 할아버지처럼 내 생활 속에서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섬기는 삶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러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쁘게 기다리는 행복한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