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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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6-24 20:42
***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 / 고린도전서 1:26-31
고린도전서 1:26-31,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 들어가는 말
2000년도의 세계 인구는 60억 정도였습니다. 20년이 지난 2020년 6월 현재 세계인구는 77억 8천만 명 정도입니다. 일 년에 8100만명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은 무슨 목적으로 살고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면,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들 중에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참된 삶의 목적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2020년 현재 세계종교인구동향에 따르면, 기독교가 23억으로 세계인구의 31.2%입니다. 기독교로 분류된 것에는 개신교 8억, 가톨릭 11억, 정교회 2억, 유사기독교 2억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개신교 8억 명 중에서 영의 생명을 추구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진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몇 %나 되겠습니까? 예로부터 동서의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참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많은 노력들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야 할 분명한 목적을 가지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삶에 활기가 있고 난관을 헤쳐 나가는 능력도 탁월하게 발휘됩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가려 하자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가면 잡혀서 고난을 당하게 된다.’며 만류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 21:13) 바울처럼 문명한 삶의 목적이 있으면 죽음조차 불사하는 담대함이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고린도 시는 바울시대에는 인구 670만으로 알려진 그리스의 대도시로서 상업의 중심이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인종이 모여 있었으며, 학문도 대단히 성행하여 당시의 역사가는 ‘철학자를 만나는 일 없이 고린도의 거리를 다닐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상숭배가 성행하여 도덕적으로 너무나 퇴폐해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고린도인의 생활’이라고 하면 ‘퇴폐한 삶’의 대명사로 사용되어질 정도였습니다. 이 도시에 바울이 온 것은 2차 전도여행 때(행 18:1-8)인데, 그 기간에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바울이 떠난 후, 유대교에서 회심한 사람들이 들어와서 교회 내에 여러 가지 파벌이 형성되고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 사람의 퇴폐적인 생활이 교회에도 스며들어 와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고린도전서 3:3-4절입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그리고 5:1절에서는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이렇게 바울이 고생하며 세운 고린도교회가 목적을 잃고 세속으로 표류하는 것을 보고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실질적인 삶의 지표를 교훈합니다.
※ 모든 피조물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일찍이 역사 속의 철학자들은 ‘사람이 무엇인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라는 질문들을 했습니다. 이러한 ‘삶의 목적에 대한 인간의 고민’들은 아마도 모든 사람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존재의 목적은 사람에게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게 동일하게 존재합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장면이 장엄하게 펼쳐집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옹위하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 그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천사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하며 경배합니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요한계시록 5:13-14절입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요한계시록 5장의 장면은 온 우주의 모든 피조물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하며 경배하는 모습입니다. 다시 말하면, 온 우주의 모든 피조물의 지음 받은 목적은 오직 하나,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온 우주적인 모든 피조물이 포함됩니다. 좀 길지만 시편 148편을 봅시다.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2 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3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4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5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6 그가 또 그것들을 영원히 세우시고 폐하지 못할 명령을 정하셨도다. 7 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8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 말씀을 따르는 광풍이며 9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10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11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들과 고관들과 땅의 모든 재판관들이며 12 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13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14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이시로다. 할렐루야.”
이 찬송 시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분명한 목적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들고 ‘호산나’라고 예수님을 환영할 때에 바리새인들이 불편한 기색을 하며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눅 19:39)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눅 19:40)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는 돌들을 증인으로 세워 기념비로 세우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는 만물이 살아있는 존재이며 그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러시아의 소설가인 ‘안드레이 비토프(Andrei Bitov)’는 무신론적인 공산주의 사회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삶의 뚜렷한 목적을 느끼지 못하고 우울한 마음으로 방황하던 어느 날, 삶의 큰 변화를 가져올 사건을 경험합니다. 그는 그 날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스물일곱 살 되던 해 어느 날, 나는 레닌그라드(현, 상트페레르부르크)에서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너무나도 절망하여 그 순간 삶이 멈춰버릴 것 같았고, 나의 미래는 통째로 없어질 것 같았다. 삶의 의미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때, 갑자기 한 구절이 눈에 띄었다. ‘하나님 없이는 삶을 이해할 수 없다(Without God life makes no sense).' 나는 그 구절을 계속 되새기며, 그 구절을 계단삼아 절망 속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한 걸음씩 들어가게 되었다.”
온 우주의 만물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가장 고귀한 피조물인 인간은 분명한 목적을 두고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분명한 목적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 택하심의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8:19절입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것이 선민 이스라엘의 출발이었습니다. 또한 이사야 43:21절에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향하여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성도의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온 우주의 목적도 있고,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에 대한 목적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 개별적인 부르심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성도 각자에게 나타내시고 역사하십니다. 다만 ‘이 개별적인 부르심의 목적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회적으로 깨닫게 하시는 말씀이 본문말씀입니다. 본문 26-29절을 요약하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인 가치 판단 기준으로 볼 때 강하고 능력 있고 지혜롭고 있는 사람들을 택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가치 기준으로서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나타낼 수 있는 사람을 택하시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삶의 목적을 아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본문 30절을 봅시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이 말씀에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근본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아는 첫 번째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두 번째 근거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에는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경외하는 삶을 나타냅니다. 종합해 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하나님이 기초가 되어야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여 의롭고 거룩함으로 구원을 이루는 삶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14절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사람들에게는 선과 악, 의와 불의, 진실과 거짓, 영의 삶과 육의 삶 등 두 면이 공존합니다. 신약성경 27권 중에 13권을 기록한 그 위대한 사도 바울 조차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로마서 7:21-2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저도 여러분도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이루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육신의 삶을 접할 때면 미운 사람도 생기고, 생활의 염려도 생기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삶의 욕망도 일어나고, 하나님의 뜻에 항상 깨어 있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현실의 삶에 마음이 매어서 일을 결정할 때도 앞서 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적용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담대하지 못하고, 신앙적인 갈등과 가책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방법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나를 만드시고 이 시대에 부르시고 이 자리에 보내신 주인이신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셨던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 이름으로도 아신다고 하셨고, 아브라함은 벗이라고 부르셨으며, 노아, 다니엘, 욥은 의인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모든 기록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던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좋아하셨는지 살펴보니, 한 가지 특징이 ‘매사에 하나님께 물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시시콜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이 사실은 나를 부르신 삶의 목적을 위하여 정말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깨달은 바울이 이렇게 알려줍니다. 빌립보서 4:6-7절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러분은 얼마나 주님께 묻습니까? 저는 이 비밀을 깨달은 후 내게 대한 모든 것을 주님께 묻고, 아뢰고, 지난 온 것들에 대하여 보고하는 것을 힘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을 하나님께서 너무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13-14절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이 말씀이 본문말씀과 일치합니다. 이 말씀을 믿고 여러분의 삶에서 적극적으로 시행하십시오. 분명한 삶의 변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분명한 목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하나님이 기초가 되어야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여 의롭고 거룩함으로 구원을 이루는 삶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목적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내 삶이 세상에 하나님의 자랑이 되도록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에 성실하고 진실하게 순종하고 따라가십시오. 이 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찬송과 영광과 자랑이 되기를 소망하는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위대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