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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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6-17 16:58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요한복음 21:15-22
요한복음 21:15-22,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하시니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 들어가는 말
세상 유행가 중에서 가장 많은 주제가 무엇이겠습니까? 단연코 ‘사랑’이겠지요. 오늘은 사랑 타령을 해보려 합니다. ‘내 나이에 웬 사랑?!’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일단 들어보시면 ‘참 중요하구나.’라고 여기실 것입니다. 사랑에는 종류가 많습니다. 인류 최초의 사랑인 부부간의 사랑을 비롯하여, 부모자식간의 사랑, 형제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이웃 간의 사랑 등. 많은 사랑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사랑은 특정한 사람을 특별하게 생각하면서 시작됩니다. 그 사람에게 관심을 집중시키고, 상대의 허물을 과소평가하고 좋은 점을 과대평가합니다. 이를 ‘핑크 렌즈(pink lens) 효과’라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가 생기면 이 장애는 오히려 사랑의 열정을 더욱 높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떨어져 있으면 분리불안을 느끼고, 같이 있을 때는 감정적으로 일체가 되어 심장 박동, 땀 분비 등이 같아지며 대화를 나눌 때 뇌파가 일치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같이 있고 싶고, 상대에게 맞추기 위해 좋아하는 것도 바꾸고 생활 습관도 바꿉니다.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며, 심지어 죽음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아가 8:6-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나를 도장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며 불길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우리 그리스도인이 사랑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모든 계명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요한일서 4:16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한 마디로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하고 이루어야 할 최고의 계명이자 삶입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요한복음의 끝 부분인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특별한 요청과 명령을 전하시는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제자들 중에서 큰형님 노릇을 했지만, 성질이 급한 다혈질이어서 나서기도 잘하고 실수도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신 직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셔서 대제사장의 집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베드로는 멀찍이서 살피다가 들통이 나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삼일이 지났고 예수님을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가 얼마나 민망하고 부끄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Do you love me more than these?)라고 세 번씩이나 물으셨습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과거와는 달리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겸손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 사람들보다 더”라고 번역된 단어는 꼭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어로는 ‘more than these’라고 ‘지시 대명사’를 사용해서 번역했습니다. 원어인 헬라어로는 사람, 장소, 물체 등을 광범위하게 지시하는 단어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는 것은 ‘네게 관계되는 모든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이며, ‘네 소득이나 눈앞의 이익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이며, ‘네가 사는 어떤 삶의 자리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 주님께서 지금 이 말씀을 들으시는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께서 사랑이시어서 당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십계명 두 번째 계명인 출애굽기 20:5-6절입니다.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아실 것 같습니까?
※ 사랑이 왜 중요하겠습니까?
세상 적으로도 사랑이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사랑할 때에 수많은 호르몬들이 활성화 된다.’는 것입니다. 신경 경제학자인 ‘폴 잭(Paul J. Zak)’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대표적인 사랑 호르몬으로 불리는 ‘옥시토신’이 있는데, 현재에도 연구가 진행될 정도로 인간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옥시토신은 아홉 개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되어 있는 펩티드호르몬인데 신뢰와 결속을 강화하고, 뇌의 신경전달물질로서는 종족 유지에 매우 중요한 신경호르몬이라고 합니다. 이 외에도 사랑을 할 때 활성화되는 호르몬에는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두뇌의 집중력, 기억력, 공간 판단력 등 인식기능에 관여),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상태에서 우리 뇌에는 몇 가지 화합물 생성이 활발하게 진행되는데, 이 화합물 군을 모노아민계라 부르며 노르에피네프린, 세로토닌, 도파민이 이에 속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합니다. 이것이 부족하면 우울증과 치매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설교에 어려운 호르몬 타령을 하는 이유는 사랑의 유익성과 사랑이 우리 신체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사랑에 관하여는 너무 많은 말씀들이 있지만 정말 중요한 몇 구절을 봅시다. 요한복음 15:9-14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 말씀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사에 ‘예수님을 친구’라고 표현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14절 말씀처럼 ‘예수님 명령대로 행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표현하기 전에 먼저 가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사랑해야 함’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4:20절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정한 사랑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 적으로 볼 때도 진정한 사랑이 육체를 건강하게 하고 삶을 활기차게 만듭니다.
※ 그러면 어떻게 사랑할까요?
밥알보다 작은 돌 하나 때문에 이혼한 신혼부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날따라 직장 상사에게 꾸중을 들어 마음이 불편한 새신랑이 있었습니다. 퇴근한 신랑이 밥상을 받아 첫 숟갈을 뜨는데 그만 돌을 씹고 말았습니다. 신랑은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도대체 정신을 어디에 다 둔 거야, 밥도 제대로 못하나?” 인내심이 없는 신부가 맞불작전으로 받아넘겼습니다. “남자가 쫀쫀하게 그깟 일로 화를 내요?” 연이어 신랑의 고함소리 “잘못했으면 사과를 해야지 웬 말대꾸야.” 입을 삐죽이는 신부 “밴댕이 소갈 모리 같은 사람…” 아내의 말대꾸에 화가 난 신랑이 신부의 뺨을 때렸습니다. 보따리를 챙기며 화를 삭이지 못하는 신부가, “우린 완전히 실패한 결혼이야. 맞고는 못살지.” 결국 이 신혼부부는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모래알만한 돌 하나가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조금 더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랑의 고갈이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것입니다. 남편이 조금만 더 인내하고 아내가 조금만 더 지혜로웠다면 불행은 없었을 것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정 반대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54번째 결혼기념일을 맞이한 어느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친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남편이 밖에서 일하다가 흙투성이인 작업용 장화를 신은 채로 집으로 왔습니다. 씻기 위해 세면장으로 들어서자 깨끗하게 잘 청소된 바닥이 금세 흙덩어리들로 지저분해졌습니다. 그의 아내가 불쾌하게 생각하리라 생각하면서 친구가 말했습니다. “저 사람, 온통 흙투성이를 만드는 군요.” “그래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빗자루를 가지러 갔습니다. “하지만 그 장화가 그이도 데리고 오지요.”
따뜻한 이해와 배려가 담긴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오랫동안을 함께 하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이 두 이야기 속에서도 사람들은 서로의 사랑 안에서 살고 있음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둘이 아니라 하나로 만드셨기 때문에 서로 사랑을 확인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2:24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가장 가까운 사이의 사람 사랑부터 시작하여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 사랑까지 우리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사랑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가장 큰 고민이 우리교회의 영구표어처럼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예를 봅시다. 에베소서 5:22-25, 28절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교회 관계를 남편과 아내 사랑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즉 촌수도 없는 부부의 사랑이 하나님과 교회의 사랑으로 비유된 것입니다. 앞서 본 요한일서 4:20절의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대로입니다. 내 가장 가까운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랑은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것이지요. 사랑의 근원 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도 사랑을 원하십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화해의 제물로 내어주시기까지 하셨지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확인하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속의 사랑, 입술의 사랑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나는 실제적인 사랑을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사랑을 확인하시려고 100세에 얻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듯이 말입니다. 여러분, 고민되시지요? 그러나 고민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주님을 뵈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1절)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2절)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3절)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참 이상합니다. 항상 자신부터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이 부담스럽고 부끄러웠던지 곁에 있는 요한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말을 일언지하에 묵살하시며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르심과 부활의 기쁨은 나 개인적이기 때문입니다. 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개인에게 고백받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여겨지거나 불쌍히 여겨지고, 배려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기뻐하십시오. 이는 내가 주님께 가까이 다가서고 있으며 주님을 닮아가고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기 이전에 내 가까운 사람들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이 사랑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시이며 우리를 살리는 능력이 됩니다. 이해, 배려, 관용, 섬김 이런 사랑의 삶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기쁨과 평안과 행복으로 가득한 매일의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