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3,933회 작성일 2020-05-27 21:19
***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 마태복음 7:15-23
 
 마태복음 7:15-27,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 갈등(葛藤)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칡 갈자와 등나무 등자를 쓰는 한자입니다. 왜 이해가 대립되는 현상을 갈등이라고 했을까요? 칡과 등나무는 모두 덩굴식물인데 칡은 왼쪽 방향으로 감고 올라가며, 등나무는 오른쪽 방향으로 감고 올라갑니다. 이 두 식물을 한 곳에 심어두면 서로 부딪치고 얽히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부딪히고 얽혀서 갈등을 겪는 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자신을 가장 갈등하게 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신앙의 위인인 사도 바울도 자신의 신앙 갈등을 로마서 7:22-24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처럼 독실한 신앙의 사람도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했습니다. 우리는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그래서 이 시간에는 우리가 가진 신앙과 우리의 삶의 현장인 현실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그 해결책을 찾아보려합니다.
 
2005년 뉴질랜드에서 제작된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60세가 넘은 할아버지가 꿈을 위해 도전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해마다 미국 유타 주에 위치한 ‘보너빌 솔트플랫’ 혹은 ‘보너빌 스피트웨이’라 불리는 소금평야에서 열리는 바이크 대회가 있었습니다. 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이 할아버지는 뉴질랜드에서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참가를 했고, 그 대회에서 40년이 넘은 낡은 바이크로 본인의 꿈을 이루는 내용입니다. 실제 주인공은 뉴질랜드의 '버트 먼로(Burt Munro, 1899~1978)' 라는 사람인데, 1920년식 ‘인디언 스카우트’라는 바이크를 개조하여 '스피드위크' 에 참가했습니다. 1967년 당시 공식 기록 296km/h를 달성하여 우승했으며, 이 기록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이 늙은 주인공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 합니다. 늦은 나이란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명대사를 남겼습니다.
“가야 할 때 가지 않으면 말입니다 … 가려 할 때 갈 수가 없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해야 할 때 하지 않으면 정작 하려고 할 때에는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기회는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13절에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십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마태복음 5장-7장까지의 산상수훈 전체의 결론 부분입니다. 이 결론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5-20절에서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 21-23절에서 ‘참 사역자와 거짓 사역자’, 24-27절에서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등 세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들에는 여러 의미가 들어 있지만, 대표적인 의미는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첫 번째 비유에서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다.’고 하십니다.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듯이 거짓된 신앙에서는 좋은 삶의 열매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아무리 그럴 듯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현실생활이 무절제하고 경건하지 못하다면 거짓 제자입니다. 두 번째 비유에서는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신앙이 좋은 듯하지만, 현실생활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 불순종의 삶’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무리 신앙적이어서 선하고 올바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다면 불순종일 뿐입니다. ‘불법’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모든 것입니다. 세 번째 비유는 산상수훈 전체의 결론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으며, 불순종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건축자와 같다.’고 하십니다. 결론은 ‘하나님을 향하는 진정한 신앙은 현실의 삶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우리의 신앙과 우리가 사는 현실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미국에서 유명한 ‘리이튼 포드’목사님이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목사님은 ‘잊을 수 없는 사건’이라고 하면서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이 여행 중에 비행기가 중간 연료보급을 위해 착륙한 서부 아프리카 다카 공항에서 어떤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잠깐의 시간동안 그 프랑스 출신 선교사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선교사는 ‘모슬렘지역에서 10년 동안을 일했다.’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포드 목사님의 일행 중 한 사람이 선교사에게 물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회심 자가 있었습니까?” 선교사는 “두 명”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십년동안 선교활동을 하여 2명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불쑥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10년 동안 겨우 두 사람밖에 구원하지 못했는데, 왜 이곳에 있느냐?’는 의아한 물음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선교사는 오히려 매우 놀란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곳에 왜 있느냐구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이곳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 때문에 제가 이곳에 있습니다.”
리이튼 포드 목사님은 ‘이 일은 자신의 생애 속에 일어난 일 중에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리이튼 목사님이 잊을 수 없도록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리이튼 목사님을 비롯한 당시의 일행들뿐만 아니라 지금은 많은 사람들도 신앙의 목적을 잘 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전도나 봉사, 헌금, 예배 등. 그 사람이 나타내는 행위를 신앙의 척도로 봅니다. 물론 본문말씀에서처럼 ‘그 사람의 신앙의 됨됨이는 그 사람의 행위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한 가지 물어봅시다. 성경 66권의 방대한 말씀을 짧게 한 마디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표현하시겠습니까? 예를 든다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명은 율법으로 볼 때 613가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요약한 것이 십계명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단 두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37-40절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두 가지입니다. 이것을 포함하여 성경 66권의 내용을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11:4절을 봅시다.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말씀에서 “순종”이라는 단어를 이전 번역에서는 ‘청종’이라고 했습니다. 즉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는 이 말씀인데 한 단어로 요약하면 ‘청종(聽從, 이르는 대로 잘 들어 좇음)’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청종’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표현하면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알고 기쁘게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에게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삼상 15:3)고 하셨습니다. 사울은 백성들을 모아서 아말렉과 전쟁했으며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탐스러운 양과 소들을 죽이지 않고 끌어왔습니다. 불순종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의 변명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삼상 15:15)고 했습니다. 그 때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상 15:22-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의 근본적인 말씀을 버리고 예배하는 것이나 헌금을 드리고 봉사하는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6:6절에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장로교의 교리서인 ‘성경 소요리문답’ 제1번이 “사람이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며, 답변은 ‘사람이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3번은 “성경이 제일 요긴하게 교훈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인데, 그 답변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여 어떻게 믿을 것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을 나타냅니다. 즉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뜻에 청종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이 바로 이것을 말씀합니다. 본문 21-23절을 봅시다.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앞서 들려드린 예화에서 리이튼 목사님이 잊어버리지 못할 기억으로 남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모슬렘 지역에서 선교하시던 그 선교사님의 답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선교사님은 “이곳에 왜 있느냐구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이곳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 때문에 제가 이곳에 있습니다.” 선교사님은 환경이나 일의 결과를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청종하신 것입니다. 몇 사람을 전도하느냐, 무엇을 하느냐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모슬렘 지역에서 사역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리이튼 목사님을 비롯한 다른 일행들은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전도하여 교회를 확장시키고 성장시키는 것을 신앙의 관점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보편적인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리이튼 목사님은 그 선교사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신앙의 본질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 그러면 우리의 신앙과 현실은 어떠합니까?
 
제가 잘 인용하는 유명한 앗시시의 성자 ‘프랜시스’의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프랜시스의 제자가 되기를 자원하는 제자 후보생 두 사람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프랜시스에게, “선생님의 제자가 되어 신앙의 훈련을 닦고 싶습니다. 제자로 받아주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프랜시스는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밭에 나가면 배추들이 많이 있는데. 그 배추를 뽑아서 뿌리가 하늘을 향하도록 해서 다시 심고 오십시오.”
제자 지망생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한 사람은 묵묵히 배추 밭으로 향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허, 정말, 이 성자가 오랫동안 도를 닦더니만 돌았구먼.’이라고 비웃으며 가버렸습니다.
 
잘 크는 배추를 뽑아서 거꾸로 심는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바보가 아니라 미친 짓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보다 더 심한 내용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부자 청년관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청년은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는데 그 청년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요? 지금 세상에 누가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하셨고, 손이 범죄하게 하면 손을 찍어버리고, 발이 범죄하게 하면 발을 찍어버리고, 눈이 범죄하게 하면 눈을 빼버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순종하라는 말입니까? 물론 이 말씀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말씀이며, 결단력 있는 신앙생활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이 외에도 지키라고 하시는 말씀이 너무나도 많은데 어떻게 지금 같은 현실생활에서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이나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주님 명령을 따르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그런 척 하는’ 외식적인 신앙의 모습들입니다. 교회에서는 신앙이 좋은 듯하던 사람들이 세상에서는 비신앙인들과 똑같은 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말뿐인 사람,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으로 조롱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은 앞에서 이미 제시했습니다. 본질적인 신앙을 따르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알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1804∼1864)의 단편소설인 ‘큰 바위 얼굴’이라는 이야기를 아시지요? 어니스트란 소년이 어머니로부터 ‘마을 앞 산 바위 언덕에 새겨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전설(傳說)을 듣게 됩니다. 어니스트는 커서 그런 사람을 만나보았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자신도 어떻게 살아야 큰 바위 얼굴처럼 될까 생각하면서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아갑니다. 훗날 사람들은 늙은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이야기처럼 하나님을 알기를 힘쓰고,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기뻐하며 감사하기를 힘쓰게 되면 그 사람은 주님의 모습을 닮게 됩니다. 잘 실천하지도 못하는 말씀을 억지로 하는 척하는 외식적인 신앙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확신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씩 성실하고 정직하게 따라하면 됩니다. 잘못은 인정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사람들에게 사과하면 됩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깨달은 말씀을 생활 속에서 따르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주님께서도 도와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내 현실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감사함으로 하나씩 실천하여 갈등이 아니라 주님의 기뻐하심을 입는 행복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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