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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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5-22 12:57
*** 기다림 / 하박국 1:13-2:4
하박국 1:13-2:4, “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14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15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16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 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들어가는 말
2006년 상영된 영화 ‘에이트 빌로우’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1959년 남극기지에서 실제로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남극에서 운석 탐사를 하던 대원들에게 25년 만의 강력한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그리고 8마리의 썰매견과 함께 빙판과 눈밭을 탐사하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게 됩니다. 탐사대는 서둘러 피신해야 했습니다. 탈출하는 헬리콥터에는 사람이 탈 자리도 부족했기 때문에 당연히 썰매 견들을 태울 자리는 없었습니다. 사람도 겨우 빠져나가는 긴박한 상황에서 썰매 견들은 당연히 방치되었습니다. 대원들은 최대한 많은 먹이를 남겨두고 떠나야 했습니다.
“어디 멀리 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야 해!” 꼭 다시 돌아와서 너희를 데려갈게.”
철수하던 대원들은 개들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을 먼저 탈출시킨 후 돌아와서 개들을 데려갈 예정이었지만 기상은 더욱 나빠지기만 했습니다. 극한의 땅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개들을 구하기 위해 대원들은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개들을 구출하기 위한 비용을 지불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대원들은 사비를 털어서라도 개들을 구하기 위해 남극으로 가려고 했지만, 폭풍을 뚫고 날아갈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대원들은 생각했습니다. ‘엄청난 추위와 굶주림에 개들은 죽었을 거야. 거기에 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뿐이야’ 하지만 그중 한 사람은 썰매 견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혼자 힘으로 비용을 마련하고 어렵게 지구 반 바퀴를 돌고 돌아서 175일 만에 남극으로 갑니다. 너무도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썰매 견들은 그곳에 있었습니다. 개들은 주변의 다른 짐승들을 사냥해 먹으며 여전히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멀리서 눈밭을 가르며 달려오는 개들을 끌어안고 남자는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다.
서두에 이 긴 이야기를 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의 주제인 ‘기다림’의 중요성을 살펴보기 위함입니다. 한갓 미물인 썰매 견들도 주인의 약속을 믿고 자리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는 신실함을 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2-3절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제자들에게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1:11절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지금의 우리는 우리 이전의 수많은 성도들이 그러했듯이 이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이 기다림의 시간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하박국 선지자는 남 유다의 16대 요시야 왕 시대의 사람으로서 BC 650-627년 사이에 활동한 듯합니다. 이 시기는 남 유다의 멸망기에 해당합니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져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하박국 1:1절과 3:1절에 의해 그가 선지자였다는 것만 확실합니다. 또 하나는 3장에 나오는 그의 시에서 “영장(성가대 지휘자)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고 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성전의 정규 성가 대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성전의 음악을 담당하는 레위족으로 추정됩니다. 내용적으로 보면, ‘하나님, 왜 불의가 용납되고 그로 말미암아 의인이 고난을 받습니까?’라는 호소적인 기도의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전체의 내용으로 볼 때, 남 유다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하며 악을 행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멸망의 길을 걸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웃의 강대국인 바벨론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남 유다를 징계하려고 계획하시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경고하셨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본문1:13절입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 정결하셔서 악을 보지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더 나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덜 나쁜 하나님의 백성을 징계하십니까?’라고 항변하는 내용입니다. 이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본문을 포함하는 2:20절까지에 있습니다.
하박국이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물었던 ‘하나님, 왜 불의가 용납되고 그로 말미암아 의인이 고난을 받습니까?’라는 것을 신학에서는 ‘신정론(神正論)’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사기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잘 되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힘들고 어렵게 살고 고난을 당합니까?’라는 항의성 질문입니다. 여러분도 때로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저도 종종 이런 생각으로 잠을 설칠 때가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본문 2:2-4절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을 먼저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내 약속을 크게 적어서 모두가 볼 수 있게 해라. 내 약속은 정한 때가 있고 때가 이르면 반드시 이루게 된다. 더디다고 생각되더라도 기다려라.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룰 것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정한 때’가 우리도 기다리는 때입니다.
※ 우리가 이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사실 우리 인생은 거의 대부분이 기다림으로 채워집니다. 아이가 태어나길 기다리고, 성장을 기다리고, 직장을 기다리고, 결혼을 기다리고, 성공을 기다리고, 마지막에는 죽음을 기다립니다. 매일 매 시간이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가지가 더해져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내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혹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무언가 자신만의 일들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 일이 자신이 기다리는 것의 결과를 좌우하게 됩니다. 운동선수는 경기를 기다리며 죽도록 땀 흘리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합니다. 시험을 기다리는 사람은 최선을 다하여 지식을 쌓습니다. 그러면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겠습니까? 본문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지금 나라의 패망이 선언된 기가 막히는 현실 앞에서 탄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이와 비슷한 상황이 아브라함에게도 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패역으로 하나님께서 멸망시키려 하실 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18:25절입니다.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이 구절도 역시 신정론입니다. 이렇듯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가 막히는 현실 앞에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부르짖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분이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나 여러분도 지금의 현실 속에서 매일 기다리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채우느냐가 기다림의 결과를 좌우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당연히 내 생명뿐만 아니라 내게 속한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부탁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한바탕 부르짖은 후에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이 선지자의 행동에 대한 설명 구절 같지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이사야 30:18절에서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하시며, 로마서 8:25절에서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서의 ‘기다림’은 마냥 손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린다는 것인데 이는 주님께서 이 일을 이루실 때까지 주님의 인도하심을 묵묵히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는 자식이 없어서 애끓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자식을 허락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 때 성전에 있던 엘리 제사장이 한나를 축복했고 한나는 믿음으로 기다리게 됩니다. 사무엘상 1:17-18절입니다.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한나는 자신의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실 줄을 믿고 근심하지 않고 주어진 일에 충실했습니다. 그 결과로 얻은 것이 사무엘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기다림에 대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본문 2-4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루어주겠다고 약속하시면서 그 보증으로 ‘이 약속의 말씀을 달려가는 사람도 읽을 정도로 크고 명확하게 새겨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혹시 너희 생각에 더디다고 생각될지라도 기다려라. 나의 때에 반드시 이룰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때를 의미하며, ‘지체되지 않는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때’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시간을 고집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때를 믿고 한나처럼 의심 없이 생활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매일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 개인의 마지막 때나 혹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입니다. 베드로후서 3:10-13절을 봅시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마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드러납니다. 이는 마지막 때뿐만 아니라 지금 매일 매 순간의 생활을 하나님께서는 벌거벗은 듯이 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지금의 나의 생활을 하나님 앞에서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을 기다린다거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면 모든 상황과 모든 일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신뢰하며 감사하십시오. 힘들고 어렵고 속이 타들어가는 때에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며 성실한 생활로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매일의 생활을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믿고 기뻐하십시오.
어느 날 아침, 농부는 창문을 활짝 열어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담장 가득 나팔꽃들이 화려하게 피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보지 못했던 황홀한 광경을 바라보면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나팔꽃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즐겼으면 좋으련만 오늘은 밀밭을 갈아 놓아야 하니 빨리 밭을 갈고 돌아와 저 꽃을 즐기리라.’ 농부가 저녁 늦게 밭에서 돌아와 보니 이미 꽃은 모두 시들어 볼품이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농부는 창문 밖 나뭇가지에서 귀여운 새들이 아름다운 소리로 지저귀는 것을 보고는 중얼거렸습니다. ‘빨리 젖소들의 우유를 짜 놓고 저 아름다운 새 소리를 즐기리라.’ 농부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새들은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농부는 이렇게 매일 아침마다 아름다운 일들을 보았지만, 다른 일들로 바빴기 때문에 한 번도 그 아름다움을 누려보지도 못한 채 어느 날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일에 바빠서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하시는 주님과의 시간을 배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쁘다’, ‘시간이 없다.’, ‘차차 하지!’, ‘조금만 더 있다가!’, ‘이 일만 끝내고 하지!’ 하면서 자신의 계획과 뜻을 앞세우면서도 하나님의 야속에 대한 일은 뒤로 미룹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영원을 준비도 못한 채 생애를 마감하게 됩니다. 내가 바쁘다고 하나님도 바쁘십니까? 내가 서두른다고 하나님께서 내 뜻에 맞추어 서두르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일찍 오시는 법도 없으시고, 늦게 오시는 법도 없으십니다. 정확한 때 정확한 시간에 오십니다. 이 하나님의 때를 믿음으로 기다리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함으로서 매일의 삶이 주님으로 말미암는 기쁨과 평안과 행복으로 채워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