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이것을 믿느냐?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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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4-15 13:00
*** 네가 이것을 믿느냐? / 요한복음 11:17-27
요한복음 11:17-27,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 들어가는 말
부활!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소망입니다. 오늘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감사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서 부활의 소망을 빼버린다면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도록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5:13-14절에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참 소망이며, 지금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도 우리의 부활에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며칠 후에 오는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하여 조사차 마을에서 꽤 괜찮다고 하는 식당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들어와도 별로 반기는 기색도 없고, 식탁보는 더럽고, 음식을 나르는 종업원들의 옷도 더럽고 불친절 했습니다. 그래도 음식은 어떤가 싶어서 주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역시 음식 맛도 좋지 않았고 정성이 들어있지 않은 듯 했습니다. 목사님은 크게 실망하고 예약하려던 계획을 취소해 버렸습니다. 얼마 후, 그 식당 앞을 지나던 중에 문 앞에 큰 현수막이 붙어 있었는데, ‘새 주인이 경영합니다.’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호기심이 일어난 목사님은 새 주인이 경영하는 식당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싶어 들어가 보았습니다. 깨끗한 차림의 종업원들이 친절하게 인사를 하면서 안내를 했습니다. 식탁과 식탁보도 바뀌어 있었고 분위기도 새롭게 바뀌어 있어서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음식도 깔끔하고 맛도 매우 훌륭했습니다.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다음에 손님들을 청해서 대접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있지요? 같은 식당이 왜 그렇게 바뀌었겠습니까? 경영하는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식당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는 모든 곳에서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도 속사람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가치관도 삶의 모습도 전혀 달라집니다. 이런 현상을 로마서 8: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내가 주인이 되었던 예전과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신 지금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달라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다니라는 마을에 사는 나사로와 두 동생을 방문했을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불과 2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 마을에는 나사로와 그의 두 여동생 마리아와 마르다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부모 없이 어렵게 사는 가정이어서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두 자매가 기둥처럼 여기며 살던 오빠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다급해진 자매는 예수님이 계시는 곳으로 사람을 보내어 위급한 상황을 전했습니다. 자매로서는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며칠을 미루다가 조금 늦게 베다니 나사로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도착하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었고 장례까지 치른 후였습니다. 마르다는 원망 섞인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수님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하면서,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라고 한 가닥 희망을 말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셨는데,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못 알아듣고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가 그럴듯하면서도 전혀 의미가 다릅니다. 예수님은 현재적인 부활을 말씀하셨는데 마르다는 종말적 부활로 이해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지금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지만 마르다는 세상 마지막 때에는 살아나는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대화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부활의 신비가 있습니다.
유대인 의사이며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Viktor Emil Frankl, 1905.3.26. - 1997.9.2.)’이 쓴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나치에게 잡혀서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서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찌 수용소에서 말할 수 없이 잔인한 고문과 무서운 형벌과 비인간적인 학대 속에서 나를 생존하게 만든 것은 희망이었다.”
그는 나찌의 무서운 고문을 받으면서도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이들의 무서운 고문의 시대가 언젠가는 끝난다. 그러면 나는 이 수용소에서 나가서 내가 붙잡은 이 삶의 희망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말해 주겠다. 이 끔찍한 고문을 넘어서서, 이 절망적인 환경을 넘어서서 저 건너편에 있는 희망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는 끝까지 이 고문을 견디겠다.’ 그는 자신의 소망대로 극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다짐했던 것을 실천하여 지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이 삶의 의미와 희망전하는 심리학자로 살다가 9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습니다.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프랭클 교수의 소망의 삶을 보기 위함입니다. 프랭클 교수를 그 혹독한 환경에서 살게 한 것은 오직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보여주겠다.’는 소망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소망이 있습니다. 다만 프랭클 교수는 절망에서의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우리는 영원한 멸망에서의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28-29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손해를 보기도 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하며, 극단적으로는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환경에서도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생명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1-3절을 봅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여도 참고 견디면서 믿음의 생활을 계속하는 것은 우리 앞에 준비되어 있는 영원한 기쁨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쁨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1-3절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거서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우리가 세상에서 인내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이유가 바로 이 기쁨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두 가지 부활에 대한 것입니다. 부활이 두 가지라고요?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두 가지 부활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있을 때에 주어지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첫 번째 부활을 봅시다. 요한복음 5:24-25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 말씀은 마지막 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적으로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길이 되심을 믿는 사람은 지금 살아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5절의 “죽은 자들”이란, 영의 생명이 죽은 자 즉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신 구원을 믿어 이미 영의 생명이 부활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첫 번째 부활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죽은 자들을 ‘잠잔다.’ 혹은 ‘쉰다.’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가 가야 할 지옥의 형벌을 이미 대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죽음의 자리에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을 예수님께서 본문 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영의 생명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이미 영의 생명이 살아난 사람은 지옥의 형벌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이 사실을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렇게 영의 생명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분명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어떤 청년이 자신의 신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당시의 유명한 스승인 ‘성 마카리우스’를 찾아왔습니다. 청년이 물었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성자는 대답은 하지 않고 청년에게 이렇게 시켰습니다. “지금 공동묘지에 가서 무덤에 대고 욕을 한 바탕 퍼붓고 오게.” 청년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성자가 시키는 대로 하고 왔습니다. 그러자 성자는 청년을 다시 공동묘지로 보내면서 “이번에는 자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칭찬을 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다시 시키는 대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성자가 물었습니다. “자네가 욕설을 퍼부어 대니까 시체들이 성을 내던가?” 청년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칭찬을 하니 그들이 좋아하던가?” 이번에도 청년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성자는 청년을 보면서 말했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네.”
성 마카리우스가 청년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의 차이’였습니다. 로마서 6:6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영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옛 사람이 살던 세상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어떤 현상에 대하여 울고 웃고, 염려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마르다는 부활에 대한 소망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빠의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아직 자신에게 있는 영의 생명이 회복되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현재적인 부활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믿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 지나 이미 부패하기 시작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의 영이 이미 부활하여 생명이 있다는 사실과 마지막 때 즉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있을 육신의 부활까지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재림 때에 있을 이 육신의 부활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두 번째 부활입니다. 즉 영의 부활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순간에 주어지며, 육신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주어집니다.
그러면 지금 영의 생명이 있어서 마지막 때의 생명의 심판까지도 면제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의 모든 권면들은 바로 영의 생명이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나타내야 하는 합당한 생활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경험하셨겠지만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오른 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도 주고, 오리를 가게 하면 십리까지도 동행하는”(마 5:39-42) 뿐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마 18:21-22). “종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라.” 등등. 이런 삶을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내가 참아야지!’ ‘내가 죽어야지!’ ‘내려놓아야지!’ ‘맡겨야지!’ 라고 다짐해보지만 돌아서면 또 다시 옛 모습으로 살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의 이런 약함을 아시고 항상 함께하시며 도우십니다. 다만 말씀과 기도에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 행복한 부활을 주신 주님의 부활을 감사합시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영의 생명이 있는 사람으로서의 합당한 삶을 이루어서 영광의 날을 맞이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