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단절과 소통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2,874회 작성일 2020-04-01 13:05
*** 단절과 소통 / 히브리서 10:19-25
 
 히브리서 10:19-25,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들어가는 말
 
지금의 세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소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세계가 일일생활권을 이루고 있으며, 각종 social media '블로그(blogs), 소셜 네트워크(Social Networks), 메시지 보드(Message Boards), 팟캐스트(Podcasts), 위키스(Wikis), 비디오 블로그(Vlog)', sns(social network services, 트위트, 페이스북) 등으로 세계의 정보를 즉시 검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어가 달라도 번역 프로그램들로 세계의 소식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덕분에 세계 모든 종족들의 소통의 길이 열려서 안방에 앉아서도 세계인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군중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러한 소통의 세계가 열렸지만 문화와 민족성의 차이가 단절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처럼 생활 속에서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적인 소통이 더 중요합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이사야 1:2-3절에 있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요한복음 11장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적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봅시다. 11-16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어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동문서답(東問西答)을 보는 듯 답답하지요? 지금 우리의 시대에 이런 불통의 답답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진정한 소통의 삶을 생각해보려 합니다.
 
※ 진정한 소통이란 어떤 것입니까?
 
동양의 3대 격언집에는 ‘명심보감’ ‘채근담’ ‘증광현문(增廣賢文)’이 있습니다. 이 중에 증광현문은 명나라 때부터 자녀들을 계몽하는데 사용되었던 지혜서입니다. 이 책에 ‘청인권 득일반(聽人勸 得一半)’이라는 말이 있는데, ‘다른 사람의 권고를 들으면 반은 얻은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예로부터 인간세상에서는 소통이 잘 되는 민족은 흥하였고, 민족주의나 쇄국주의 같은 불통한 민족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답보적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 예로 우리나라는 1636년의 병자호란 이후로 조선왕조의 쇄국정책 덕분에 발전이 늦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활발한 소통의 장이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나라들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성향이 두드러지면서 시대를 역행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의 세계적인 초유의 사태로 말미암아 국경을 봉쇄하고 지역을 봉쇄하는 불통의 극치를 보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환경이 어려울 때 그 사람의 본성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각 나라의 상황을 보면 그동안 선진국이라고 여겼던 나라의 민족들이 완전히 불통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이러한 역사를 보면서 진정한 소통은 외적인 소통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인 소통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외적인 소통이란 환경과 상황의 흐름이며, 내면적인 소통은 인간 내면의 교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sns, 문자, 전화, 교통 등을 통한 생활의 소통은 외적인 소통이며,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을 내면적 소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기말적인 교회의 표본으로 보이신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17절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사람들은 외적으로 자신들의 삶이 풍부하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면적인 헐벗음의 실상을 말씀합니다.
 
철학자 ‘칸트’는 행복의 세 가지 조건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할 일이 있고, 둘째,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셋째, 희망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처럼 모든 것이 풍성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계의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에 대한 발표를 보면, 대부분이 가난한 나라가 최고의 행복지수를 가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어느 심리학자는 ‘우리가 만족하지 못하고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걸 누리고 감사하기보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걸 탐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만족과 행복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은 것이라도 나누고 주변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삶의 소통이며 진정한 소통입니다. 신약성경의 황금률이 마태복음 7:12절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예전의 교회학교에 이런 노래가 있었습니다. “옛말에도 있었네. 콩 한쪽도 나눠 먹자 예수님이 오늘도 내 귀에 속삭이신다. 대접을 받으려면 남을 대접하여라.” 우리 민족은 가난했지만 생활을 나누는 소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풍부하지만 생활이 단절되고 있습니다. 진정한 소통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이 통하고 마음을 나누는 내면적인 소통입니다.
 
※ 어떻게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습니까?
 
어느 인터넷 글에서 옛날과 오늘을 비교하는 글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달나라는 가까워졌지만 마주 보는 이웃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옛날엔 먼 길을 발로 걸어서도 어른을 찾아뵈었지만 오늘은 자동차를 타고도 어른을 찾아 볼 줄 모른다. 옛날은 병원은 없어도 아픈 곳은 적었지만 오늘은 병원은 늘었어도 아픈 곳은 더 많아졌다. 옛날엔 짧게 살아도 웃으며 행복하게 살았지만 오늘은 길게 살지만 불행하게 울상으로 살아간다. 옛날엔 대가족이 살아도 싸움을 모르고 살았지만 오늘은 소가족이 살아도 싸움을 벼슬로 알고 산다. 옛날엔 콩 한 쪽도 이웃과 나누기를 좋아했지만 오늘은 이웃의 콩 반쪽도 빼앗기를 원한다.”
 
누구의 글인지는 모르지만 현실을 꼬집은 내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므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소통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요한삼서 2절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면 육신의 모든 삶에도 형통과 강건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사람으로 보내셔서 속죄 제물로 삼으신 목적은 단 하나, 하나님과 사람의 소통입니다. 본문 19-20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던 순간, 성전의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찢어져 열렸습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로 하나님께서 사람과 단절하신 것을 예수님의 속죄로 말미암아 다시 여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13-16절을 봅시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진정한 영적인 소통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진정한 영적인 소통을 이룰 수 있습니까? 본문 21-22절입니다.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아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즉 진정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모든 죄를 씻음 받는 것이 영적인 소통의 첫걸음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면 마태복음 5:23-24절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나님과의 관계 소통을 원한다면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사람과의 소통이라는 뜻입니다.
 
예전의 어느 심야기도회에서 어떤 성도가 “하나님, 어떻게 하면 제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저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라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성도는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때 곁에서 기도하던 그의 이웃 사람 하나가 기도하다 말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서 ○○○씨에게 미루고 있는 소 값이나 지불하시오!”
아마도 옆에서 계속 같은 내용을 기도하니까 듣고 있던 성도가 그 사람의 현실적인 상황을 먼저 깨우쳐 준 것이겠지요. 이 이야기처럼 자신의 생활이 사람들에게 올바르지 못하다면 하나님과의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4: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그래서 본문 23-25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워진 우리의 때에는 더욱 이 말씀이 절실합니다. 지금은 모이는 것도 심드렁하고 서로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는 일도 잘 없습니다. 아니,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소통은 관심입니다. 무관심은 곧 불통입니다. 똑 같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달라집니다. 똑 같은 벽돌을 가지고 다리를 놓으면 서로를 이어주는 소통의 길이 되지만, 담을 쌓으면 서로를 단절시켜버립니다.
 
얼마 전에 경찰과 한국생명보호예방협회 주관으로 ‘자살하려는 사람을 예방하기 위한 사회 실험 영상’이 제작되었습니다.
한 젊은 청년이 다리 위에서 흐르는 강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한겨울 강물은 차가워 보였고 수심은 아주 깊었습니다. 그런데 청년이 갑자기 신발을 벗더니 다리 난간 위를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뛰어내릴 기세입니다. 지나가던 젊은 여성이 그 모습을 보고는 급하게 달려와서 다급하게 청년의 허리를 붙잡고 매달렸습니다. 여성은 청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습니다.
“지금 여기서 뛰어내리면 너무 추워요. 저를 봐요. 그러지 마세요.”
여성은 청년이 벗어둔 신발을 손수 신겨주며 계속 위로했습니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됐는지 다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청년을 데리고 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한참을 위로하던 여성이 눈물을 글썽이며 청년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내일도 죽지 마세요.”
 
이 실험은 사회적인 관심도를 동시에 관찰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행되었는데 어느 중년의 어머니는 마치 자신의 자식인 것처럼 그렇게 애타게 만류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적인 소통이나 영적인 소통 모두는 서로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무리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여 세계인이 한 사회인 것처럼 된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나누고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진정한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제 가까운 사람들에게 종종 마음을 담은 안부전화라도 하십시오. 더욱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매일 매 삶의 순간마다 주님과 교통하는 영적인 소통이 우리의 생명이며 우리 삶의 형통입니다. 이처럼 인간적인 소통이나 영적인 소통이 원활하여 건강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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