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내게 믿음의 능력이 있습니까?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2,578회 작성일 2020-10-27 13:57
*** 내게 믿음의 능력이 있습니까? / 야고보서 2:14-22
 
 야고보서 2:14-22,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약속을 잘 지키는 편입니까? 약속은 성경의 주제이기도 하고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중요한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얼마 전, 극동방송 중에 ‘어떤 약속’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진행자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진행자가 얼마 전에 후배 신입사원을 만났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는 헤어지면서 “다음에 연락할 테니 그때 같이 식사라도 합시다.”라고 했습니다. 며칠이 지난 어저께 그 후배 신입사원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언니, 저번에 연락할 테니 식사 같이 하자고 해서 기다렸는데 연락이 안 와서 전화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진행자는 당황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여러 생각들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 말은 인사치레로 한 것이었는데, 순진한 후배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겉치레적인 약속, 겉치레적인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지키지 못할 약속을 너무 쉽게 해버립니다. ‘다음에 식사한 번 합시다.’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등등. 체면치레로, 위기모면용으로, 인사치레로, 등등. 어떻든 이들의 공통점은 애당초 지킬 생각도 없이 약속을 남발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신실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까지도 겉치레로 변하고 있습니다. 겉치레 신앙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믿음이 좋은 것 같은데, 실제로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무능력한 믿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디모데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말세에 일어날 불신앙적인 현상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말세는 경건한 신앙의 모양은 갖추었지만, 믿음의 능력은 아예 기대하지도 않는 형식적인 신앙의 시대가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서 형식적인 무능한 신앙에 빠져들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11:12절의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적극적으로 기대하고,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믿음은 모아서 쌓아두거나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전시용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믿음을 소유했다고 할지라도 그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림 속의 떡’에 불과합니다. 믿음은 자신이 믿는 것을 실행하는 사람에게만 능력이 됩니다. 빛은 어두울 때 필요하며, 소금은 맛을 내고자 할 때에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불신의 시대에는 믿음대로 행동하는 진실한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즉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믿음을 행하는 사람’이 정말로 필요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형제 중 한 사람인 야고보에 의해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진 편지입니다. 기록된 연대는 주후 45-70년 까지 다양한 주장이 있지만, 내용적으로 볼 때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기 시작한 45-60년경이라고 추정됩니다. 이 시기는 기독교가 유대교와 우상숭배자들에 의하여 박해가 시작된 시점이어서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워지고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환난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위로하고 격려함과 동시에, 신앙에 도취하여 행위를 무시하는 자를 경계하도록 강조합니다. 즉 1:22절처럼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여 자기를 속이는 자가 되지 말고 이를 행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야고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신앙만을 중시하고 행위를 경시하고 있음을 경계하여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아! 어리석은 사람아! 너도 행함이 없는 믿음이 무익하다는 것을 알고 싶은가?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렸을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 아닌가? 너희가 본대로 그의 믿음에 행함이 따랐기 때문에 햄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이다.”(2:20-22) 야고보는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2:24)라고 강조합니다.
 
이처럼 야고보는 박해가 심해지는 환난의 때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행함이 없는 마음 속에서의 신앙만 가지는 것은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2:26). 이와 같은 사실을 본문말씀에서는 실제적인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이같이 신앙이 실제적인 면에서 행동하지 않으면 진실도 아니고 가치도 없다는 것이 야고보서의 주제입니다.
 
※ 능력이 없는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허브 윌러’가 쓴 ‘Connecting with God(하나님과의 연결)’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적한, 아주 평화로운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 마을에 나이트클럽이 들어왔습니다. 나이트클럽이 개업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큰 걱정에 빠졌습니다. 그 술집 때문에 평화롭던 마을이 밤늦도록 시끄러울 것이고, 젊은이들은 타락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훤했기 때문입니다. 마을교회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철야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합심기도를 하면서 성도들은 “하나님, 우리 마을의 나이트클럽을 불태워주십시오. 그래서 이 모든 죄악으로부터 우리 마을을 건져주십시오.”라고 구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번개가 번쩍이면서 천둥소리가 요란하던 어느 날, 나이트클럽에 벼락이 떨어져서 정말로 불이 났습니다. 나이트클럽 주인은 ‘마을의 교회가 자신의 영업소를 불타게 해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교회를 상대로 법원에 고소했습니다. 그런데 법정에서 교회의 대표는 ‘우리가 기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도 때문에 나이트클럽이 불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책임을 부정했습니다. 양쪽의 주장을 다 들은 재판장이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누가 범죄를 했던지 간에 분명한 것은 나이트클럽의 주인은 기도의 능력을 믿고 있는데, 교회의 교인들은 기도의 능력은 완전히 부정하고 있군요. 내가 보기에는 나이트클럽 주인의 믿음이 훨씬 더 훌륭하게 생각됩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기가 막히지요? 이러한 경우가 전형적인 ‘겉치레 신앙’의 모습입니다. 말씀을 듣지만 그 말씀이 내게도 유효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서도 기도에 대한 응답을 꿈꾸지도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성경에도 나옵니다. 사도행전 12:1-17절에 나오는 감옥에 갇힌 베드로와 그를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5절에서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12-15절입니다.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첬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하더라.” 교회가 왜, 무엇을 기도했을까요? 당연히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어 감옥에서 풀어주셨는데, 기도하던 성도들은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신앙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는 겉치레 신앙은 오늘 날에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아니, 믿는 대로 행동하는 진실한 신앙보다는 말로만의 겉치레 신앙이 더 많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4:2절입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찬양하고 경배하고 예배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을 기도하면서도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기대하지도 않는 이러한 신앙은 자신의 믿음을 무능하게 가두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동이나 생활 속에서 실현되지 않는 것이 능력이 없는 믿음입니다.
 
※ 그러면 능력이 있는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본문 20-22절을 봅시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 행함으로 온전하게 되는 믿음의 실례로 아브라함을 듭니다. 다음 구절인 23절입니다.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처럼 행동을 수반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하시도록 하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의 기도는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도 합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모든 곳에는 믿음이라는 통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다가왔던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지만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선포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수많은 기계를 움직이는 전기가 전선을 통하여 흐르듯이, 하나님의 능력은 실천되는 믿음을 통하여 실현됩니다. 히브리서 11: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말씀하시듯이,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통로입니다.
 
믿음이 이처럼 위대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추상적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합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하여 자신의 마음에 사실로 인정하고 확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을 과학적으로 실험하고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것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추상적인 존재로 머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즉 믿음이 능력을 나타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내 삶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 좋은 예로 야고보는 생활 속의 실례를 듭니다.
본문 15-16절을 봅시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돌아보면 우리도 이 말씀처럼 말로만 위로하거나 격려하는 때가 많았음을 알게 됩니다. 입장을 바꾸어서, 내가 파산하여 힘들어 있는데 친구가 와서 ‘잘돼야 될 텐데.’ ‘앞으로 잘 될 거야. 힘내’ 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차라리 구겨놓은 쌈짓돈이라도 손에 쥐어주는 것이 더 위로가 될 것입니다. 요즘 휴대전화로 문자를 하면서 emoticon이라는 것을 많이 사용합니다. 축하할 일이 있으면 꽃다발 사진이나 정말 먹고 싶어지는 케이크 사진을 보내기도 하고, 말 대신 각종 포즈를 담은 그림들을 보내곤 합니다. 저는 그런 것이 참 싫습니다. 차라리 한 줄 글로라도 표현하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바쁜 세상에 글 쓸 시간조차 없어서 emoticon으로 때우는 것이 싫게 느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을 능력 있게 하는 믿음은 이런 땜질식 믿음이 아니라 작은 행동이라도 믿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했던 예화인데 다시 한 번 들어보십시오.
 
중세 수도원 시대에 ‘안토니’라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일생을 보내기 위하여 사막에서 지냈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일과 기도 외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뜨거운 한 낮에 음성이 들렸습니다. “안토니, 그대의 아름다운 생활이 나를 기쁘게 한다. 그런데 저쪽 한 도시에는 그대보다 더 신앙이 깊은 사람이 있다.” 안토니는 자기보다 더 경건하고 신앙심 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사는 것이 더 경건한 삶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음성이 다시 들렸습니다. “내 아들아, 너는 네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안토니는 자신보다 더 경건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길을 떠나서 사막을 지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존’이라는 이름의 구두 수선공을 만났습니다. 안토니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시기에 그 덕행이 하나님께 까지 알려졌습니까?” 그 사람은 ‘자신은 아무것도 한일이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구두 한 켤레를 수선할 때마다 예수님 것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여 수선한 것뿐이랍니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아시겠지요? 믿음을 행하지 않은 채로 자신 속에 가두어두는 행위는 불신의 행위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 구두수선공처럼 자신의 삶에서 믿음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이루는 통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진정으로 믿고 이 믿음을 성령 안에서 실천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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