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가장 귀한 것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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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10-15 14:06
*** 내 인생에서 가장 귀한 것 / 빌립보서 3:1-9
빌립보서 3:1-9, “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 들어가는 말
사람들은 자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거나 인정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했는데 다른 사람이 엄지를 세우면서 ‘최고’라고 한다면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애(自己愛)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자기애의 또 다른 표현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제일 귀하게 여기기도 하고, 학력이나 권력, 기술, 재능, 자녀, 건강, 재물 등등. 사람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 다를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는 어떤 것이 가장 귀합니까? 요한복음 12:43절에서는 유대인 관리들을 두고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3:4절에서는 마지막 때의 현상에 대하여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과학이 극도로 발달하고 사람의 이성이 최고조에 달하는 마지막 때에는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생각을 따르는 등. 자신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기애 시대가 될 것입니다. 지금의 세계 각 나라와 우리 사회의 변화를 보면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 본문말씀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 감옥에 갇혔을 때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쓴 이유는 빌립보 교회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선물을 보내준 일에 대해 감사하는 것과 교회 내에서 일어난 작은 문제 해결을 위한 것입니다. 작은 문제란, 성도들이 서로 분열되는 것과 율법주의자의 위험과 박해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박해 중에서도 용감하게 살며,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 안에서 살도록 권면합니다. 특히 본문에서 할례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교회 안에 할례파 즉 율법주의자들을 경계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유대교에서 회심한 자들인데 이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자랑거리고 삼고 다른 성도들에게까지 할례를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2절에서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고 하면서, 교회에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과 할례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회심에 대한 간증으로 성도들에게 확신을 심어줍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회심 간증에서 ‘자신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할례를 신뢰했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며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즉 자신이 예수님을 믿지 전에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이전에 자신이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들이 모두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전적인 자기 변화에 대한 고백입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이 율법주의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간증을 통하여 빌립보 성도들이 쓸모없이 되어버린 행위를 따르는 율법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가장 귀한 분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 율법적인 인생이란 어떤 것입니까?
네 명의 젊은이가 중창단을 조직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 다니는 대학생이었고, 모두 주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되어 있었습니다. 훌륭한 음악가들인 그들은 곧 점점 널리 알려졌습니다. 어느 날 밤, 국영 텔레비전의 뮤지컬 쇼의 한 관계자가 어느 그리스도인들의 연주회에서 그들이 노래하는 것을 듣고, 그들에게 음성 테스트를 제의했습니다. 그들은 그 제의에 응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어쩌면 이 기회를 통해서 주님을 증언 하는 문이 더 넓게 열릴지도 모른다.’고 믿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그 쇼에 출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그들은 바빠졌습니다. 여기저기서 공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화려한 무대에 자주 서게 되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그들의 기본적인 동기가 변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증언할 기회를 찾기보다는 그들의 경력을 쌓을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토요일 밤 늦게까지 공연하는 일이 잦아짐으로써 주일 예배에도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멋지고 번쩍거리는 것들이 그들을 현혹시켰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정규 차선’을 달리지 않고, ‘추월 차선’으로 계속 달렸고, 여기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성공을 위해 줄달음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에 나가는 것도, 성경을 읽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완전히 중단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열심히 참여하는 대신 세상 사람들과 어울렸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튼튼하게 파놓은 함정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독교적 가치관은 서서히 허물어졌습니다.
이 세상의 유혹에 저항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인생에 찾아오는 세상의 유혹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한꺼번에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형식적인 신앙으로 변하여 그리스도인의 겉모습만 가지게 됩니다. 형식적인 신앙이란, 내면의 영적으로 주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신앙의 형태만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 2절에서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고 한 것은 이러한 형식적인 율법적인 행위를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외식적인 신앙의 모습을 ‘개들과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혹평을 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형식적인 신앙을 가혹하게 표현 했겠습니까?
디모데전서 6:9-10절을 봅시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아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앞의 예화에 나오는 네 명의 젊은이들이 그러했습니다. 돈과 명예를 사랑했던 이들은 결국 영적으로 파멸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대적인 마귀는 ‘신앙을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양만 가지도록 율법적인 형식의 신앙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율법적인 신앙이 어떤 것인지 봅시다. 마태복음 23:2-7절을 봅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크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경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기록한 것을 넣은 작은 상자인데 머리와 팔뚝에 차고 있었습니다. 이 띠를 넓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옷 술’은 옷소매에 술을 붙인 것인데, ‘이것이 움직이는 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 술을 길게 늘인 것도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는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만 한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에도 이런 율법적인 형식적 신앙인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지난 삶을 예로 들며 간증합니다. 본문 4-6절입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이것을 현대적인 의미로 고쳐본다면, ‘나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 세례도 받았고, 모태신앙인이며, 십일조와 헌금도 잘 하고, 봉사도 하며, 이단들을 싫어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적인 영적인 삶은 죽어 있습니다. 정기적인 기도생활도 없고,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지도 않으며,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사하지도 못합니다. 이런 삶을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삶이라고 하며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 내가 변해야 할 것이 있다면 어떻게 변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알기 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 혹은 신앙이 초보일 때에는 잘 먹고 잘 사는 것, 평안하고 행복한 삶이 관심거리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식이 출세하고, 사업이 잘 되고, 직장에서 지위가 오르고, 좀 더 즐길 수 있는지, 좀 더 편안한 집을 마련할 수 있는지에 관심이 모아졌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전서 4:3절입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이 모든 세상적인 관심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삶의 모습이 이전과는 전혀 달라져야 하고 관심이 바뀌어야 합니다.
‘에드워드 모트(E. Mote)’라는 37세 된 목수가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목수라기보다는 캐비닛 제조공입니다. 이 사람은 젊은 시절. 공장에서 일하면서 열등의식과 반항심. 원망 등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겨우 이런 공장에서 망치나 두들기며 일하다니… 우리 부모는 왜 나에게 이런 삶밖에 주지 못하는 걸까.”
이러한 원망어린 삶은 그에게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고 그에게 소망이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 날. 런던의 거리를 배회하다가 길가에 있는 자그마한 교회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마침 그날은 주일이었고 ‘존 하이야트’ 목사님이 요한복음 3장 말씀으로 ‘거듭남’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던 에드워드에게 “그렇다. 나는 거듭나야 한다.”라는 강력한 소원이 일어났습니다. 그날 성령께서 그의 마음 문을 열어주셔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듭났습니다. 이렇게 거듭난 에드워드 모트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 망치는 이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망치는 이제 춤을 춘다. 그리고 내 눈동자는 생기가 돌고 내 마음 속에는 생수가 솟는다. 예수께서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이다. 나는 거듭났다.”
이제 그는 행복한 목공이 되었습니다. 그의 생은 점점 풍요로워졌습니다. 자기가 고용되어 일하던 목공소가 자기의 소유가 되었으며 그 목공소는 점차 확장되었습니다. 그가 55세 되던 해 그는 자기의 전 재산을 들여서 교회를 짓고 신학을 하여 목사안수를 받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첫날. 그는 주님께 대한 첫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향한 감사의 시를 지었습니다. 그 시가 찬송가 488장입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똑 같은 일이었지만 그의 삶이 변화되기 전과 변화된 후의 관점은 전혀 달라졌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자신의 율법적인 행위가 큰 자랑거리였으며, 사람들에게도 추앙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이전의 모든 삶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예수께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푯대로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본문 다음 구절인 10-14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리스도인은 이 바울의 고백처럼 삶의 목적과 방향이 모두 바뀌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바뀌면 당연히 그 말이나, 행동이나, 모든 생활이 바뀌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귀한 분으로 모시고,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대로 내 삶을 일치시켜 가게 되면, 예수님께서도 우리 삶에 주인이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과 같이 어려워져 가는 세상을 근원적으로 이길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을 내 인생의 가장 귀한 분으로 모시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어서 이 위기로 가득 찬 세상에서 날마다 기쁨과 감사가 있는 승리를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