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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642회 작성일 2021-05-23 22:53

***내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 / 베드로전서 3:13-16

 

베드로전서 3:13-16,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 들어가는 말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팬데믹(pandemic) 사태가 일 년 반을 넘어서면서 사람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렀고, 전쟁의 소문, 지진과 화산폭발을 일으키는 지각의 변동, 환경오염으로 말미암는 재해들, 국가 간의 갈등 등. 차라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잊고 싶은 그런 세상이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이며 환경입니다. 예로부터 이렇게 환경이 불안해지면 사람들은 자극적이고 쾌락적인 것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사회는 대상을 가리지 않는 ‘묻지마’ 폭력이 많아지고,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는 ‘분노조절 장애’가 일어나게 됩니다. 불안함을 그렇게 표출하는 것이지요. 세상적 표현으로 ‘이판사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그렇다고 치더라도 하나님의 사람들까지도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 된다면 세상은 그야말로 심각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며,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3-14)고 하신 것은 ‘이렇게 세상이 영적으로 어둡고 오염이 극심할 때를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어두울 때 빛이 더 밝게 빛나는 것처럼, 이렇게 세상이 혼탁하고 영적으로 어두울 때 그리스도인의 진가가 발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라는 말이 있듯이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주님의 군사 된 우리의 상태가 어떤지를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베드로전.후서는 사도 베드로가 ‘본도와 갈라디아와 감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당시는 로마 황제 네로(Nero, 64년)의 박해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겪던 시기였습니다. 일반역사에서도 비두니아의 총독이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은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환난 겪으며, 박해가 점점 더 심해지는 위급한 상황을 본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을 격려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와 환난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다시 복음의 진리와 종말의 소망을 재확인하고, 올바른 신앙의 삶을 지키도록’ 격려하고 권면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5:12절에서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앞에서 권면한 ‘모든 말씀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중에서 이 시간의 짧은 본문말씀에서는 ‘선을 위하여 고난 겪는 것이 복이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소망 안에서 거룩하고 선한 삶을 이루라.’고 권면합니다. 그 중심 구절이 14절-16상반절입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 말씀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할 기준입니다. 이 말씀에는 똑같은 단어가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다.”라는 단어입니다. 14절에서 사용된 말은 ‘인간적이며 세상적인 두려움’을 나타내며, 15절에서 사용된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 내용이 지금 살펴보고 전하려는 내용입니다.

 

※ 내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주도에 사는 어느 청년이 한겨울에 강원도에 사는 친구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맹추위가 계속되다가 영상 5도 정도 되는 포근한 날 오후에 둘은 차를 타고 주변을 구경하기 위하여 시골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꽁꽁 언 호수를 보고 그들은 차를 세워놓고 얼어붙은 호수에서 미끄럼을 타보기로 했습니다. 강원도의 친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호수 한가운데로 뛰어가면서 미끄럼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온 친구는 가운데로 가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얼음 위를 걸으면서 혹시 얼음이 깨어질까 봐 호숫가에서만 있었습니다. 그것도 발끝을 세우고 조심스럽게 걸어 다녔습니다. 그때 ‘부르릉’하는 시끄러운 엔진소리가 나면서 거름을 실은 커다란 트랙터가 호수를 가로질러 건너편으로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 그는 발끝을 세우고 서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농부가 거름을 잔뜩 실은 트랙터를 타고 건너는 그 얼음판 위에 자신은 발끝으로 서 있다니…. 무엇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겼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강원도의 친구나 그 지방의 농부는 호수의 얼음을 알고 있었고 제주도 청년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근심이 쌓이고 두려움이 몰려오는 원인은 그 상황이나 미래를 알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도 알면 대처할 방법도 알게 되고 담대하게 되지만, 알지 못하면 근심이 되고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영의 세계를 알지 못하면 세상의 환경이 두려워지고 근심이 몰려오게 됩니다. 이는 이 모든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근심하고 두려워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2:25-2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걱정해서 될 일이라면 신나게 걱정하겠지요. 그러나 마음이 아프도록 근심하고 두려워한다고 해서 바뀔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근심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고 두렵게 하는 것들은 어떤 것입니까?

 

사람들에게 근심거리를 말하라고 하면, 이것저것 많이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이자 욕구인 의식주 생활에 대한 것도 있을 것이고, 자녀 양육 문제, 취업이나 결혼의 문제, 사람과의 갈등문제, 노후대책 등.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들은 많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상황이 닥치면 근심하게 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왜 이런 근심거리가 쌓이게 되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이런 일을 해결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생각해내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이런 환경을 만나게 되면 벗어나기 위하여 본능적으로 해결책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힘이 되거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러나 문제 대부분은 그 원인 속에 해결책이 들어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있어서는 지난 주일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안에 해결책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처한 현재의 환경이나 상황 때문에 근심이 쌓이고 두려워진다면 내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 내가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2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라는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기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 진정으로 믿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빈 껍질일 뿐입니다.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 사람에게 잡혔을 때에 하나님께 올린 기도가 있습니다. 시편 56:3-4절입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히브리서 기자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히브리서 13: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하노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 싸개에 싸여 있으므로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손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신한다면 세상에서 담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서도 말씀하십니다. 디모데후서 1:7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현대어성경, “성령께서는 그대가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지혜롭고 담대하며 때로는 절제하면서 사랑과 기쁨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지만, 위기를 만나거나,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거나, 물질적인 어려움이 올 때, 때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염려와 두려움이 엄습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지 말고,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지나온 삶을 돌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내게 어떻게 해 주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본문 14절에서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일들에 대하여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필요를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이 충신이었던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했을 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무엘하 12:7-8절입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즉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모든 것이 충분하도록 주셨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불의한 일을 행한 다윗을 책망하셨습니다. 즉 지금 내가 처한 환경과 상황은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왜 나를 이런 환경과 상황에 있게 하셨습니까?’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으십시오. 이러한 형편을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6절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십니다.

 

미국의 유명한 ‘리이튼 포드’목사님이 자신의 경험에 대하여 ‘잊을 수 없는 사건’이라고 하면서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이 여행 중에 비행기가 중간 연료 보급을 위해 착륙한 서부 아프리카 다카 공항에서 어떤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잠깐의 시간 동안 그 프랑스 출신 선교사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선교사는 ‘모슬렘 지역에서 10년 동안을 일 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포드 목사님의 일행 중 한 사람이 선교사에게 물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회심자가 있었습니까?” 선교사는 “두 명”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십 년 동안 선교 활동을 하여 2명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불쑥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10년 동안 겨우 두 사람밖에 구원하지 못했는데, 왜 이곳에 있느냐?’는 의아한 물음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선교사는 오히려 매우 놀란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곳에 왜 있느냐구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이곳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 때문에 제가 이곳에 있습니다.”

리이튼 포드 목사님은 ‘이 일은 자신의 생애 속에 일어난 일 중에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시겠지요? 하나님의 사람이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은 ‘나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만 하면 된다.’라는 것입니다. 즉 모든 일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일이든지 다른 사람의 일이든지 그 일의 결과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습니다. 로마서 14:4절입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이처럼 다른 사람이나 나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본문 15-16절에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게 주어진 삶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맞추어 주신 자리이므로 주어지는 환경이나 상황에 대하여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께 사정을 아뢰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첫 술에 배부르지 않다.’고 했듯이, 낙심하지 말고 계속하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는 여러분의 마음에 반드시 응답해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다가오는 어려움을 능히 이겨가는 능력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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