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나에게 주어진 생명의 시간
*** 나에게 주어진 생명의 시간 / 요한복음 11:5-16
요한복음 11:5-16,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6 디디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더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세상에서 모두에게 주어진 가장 공평한 것이 시간이며, 이 시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는 동일한 시간이 적용됩니다. 한 시간의 길이가 부자라고 더 길고, 가난한 사람이라고 더 짧은 것도 아니고, 아이라고 길고 어른이라고 짧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시간을 계획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7:31절에서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하십니다.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라는 전도서 3:1절의 말씀처럼 모든 일에는 정해진 기한이 있습니다. 재난이나 행운이 한없이 계속되지 않듯이,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기회도 계속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예회가 있습니다. 루이스(C. S. Lewis)가 쓴 ‘엄청난 이혼’(The Great Divorce)이라는 우화적 작품입니다.
이 내용은 지옥의 장면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뜨겁고, 날마다 비가오고, 언제나 어두운 거리입니다. 하루도 거기에 살고 싶지 않은 환경입니다. 그러나 빛나는 천국으로 옮겨갈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이 마련하셨습니다. 천국행 정기 버스(Shuttle Bus)를 보내신 것입니다. 매 시간마다 떠나기 때문에 기회는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천국행 버스를 타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버스 정거장에 시간 맞추어 나옵니다. 그러나 버스에 올라타지를 않습니다. 요금은 무료이기 때문에 누구나 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거장에 나와 버스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저쪽으로 가면 못할 일이 많아진다. 남의 흉을 보던 즐거움도 없어지고, 약간의 재주로 어리석은 인간들의 박수를 받고 보스 노릇할 만족도 없어진다. 지위노름(status game)이 거기서는 안 된다. 자랑할 수도 으쓱댈 수도 없는 세상에 무엇 때문에 가는가?…”
그래서 그들은 일주일에 한번쯤 정거장에만 나왔다가 버스는 타지 않는 일을 오래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한 가지 예고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정기버스가 운행 중지 되는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시기에 주님께서 예고하신 이 세상의 종말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멀지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시대에 우리를 살게 하셨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잘 알려진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예수님의 이적 이야기입니다. 하나의 이적 이야기치고는 긴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고자 하시는 내용이 많고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질병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부활에 대하여’, ‘생각의 관점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등 중요하고도 뜻 깊은 주제가 많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 대하여 살펴보려합니다.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에는 예수님께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세 남매의 가정이 있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와 오빠인 나사로 세 남매였습니다. 그런데 가정의 기둥이자 가장 역할을 했던 오빠인 나사로가 심한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다급한 자매는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빠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고쳐주시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듣고서도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시고는 그대로 이틀을 더 계셨습니다. 그 사이에 나사로는 죽었고, 이미 장례까지 치렀습니다. 그제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며 나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자고 하셨을 때 제자들이 펄쩍 뛰면서 만류했습니다. 제자들은 “선생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대 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는데 또 그리고 가시려합니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계획을 제자들이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해하지를 못하자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제자인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이는 전혀 예수님께서 주도하시는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혹 지금 내가 그렇지는 않겠습니까?
※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때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때’에 대한 궁금증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자신의 때에 대하여 알 수 있다면 주어진 시간을 헛되게 낭비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심과 그 때를 알지 못하도록 장치를 마련해두셨습니다. 전도서 7:14절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신의 때 즉 장래 일을 알지 못하게 하셨겠습니까? 당연하지만 ‘사람이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그 때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성경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때에 대한 이야기들이 아주 많이 담아두셨습니다. 이 기록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때에 조금이라도 깨닫게 하시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소식을 듣기 전에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빨리 가지 않으시고 그대로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그 사이에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후에야 출발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야속한 분이십니다. 나사로가 병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으면서도 가지 않으셨습니다. 소식을 들었을 때만이라도 가셨더라면 자매의 애타는 마음이 덜 했을 것입니다. 자매는 그 며칠 동안 얼마나 애타게 주님을 기다렸겠습니까? 그래도 세상에서 의지가 되던 오빠였는데, 자신들만 남겨진다고 생각하면 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환경은 자매가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힘든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렇게 여유롭게 시간을 끌고 계셨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때’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즉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전도서3:1절에서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는 사람이 생각하는 때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생각하는 때에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늦게 오시는 법도 없고, 일찍 오시는 법도 없이 언제나 정확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악한 사람은 잘 되는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고통만 더한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박국 2:3절입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계획에는 정하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사람이 볼 때에는 늦다고 생각되기도 하겠지만 결코 거짓됨이 없이 정확하게 이르게 됩니다.
요셉은 억울한 고통을 당하며 13년을 기다렸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졌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풀무불 속에 던져졌습니다. 아브라함은 ‘후손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서도 인간의 가능성이 끊어질 때까지 25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때가 되기까지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도, 소경 바디매오도, 난쟁이 삭개오에게도 모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남았다고 하는 것은 아직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급하다고 문제를 덮어두고 역사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믿음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히브리서 10:36절입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야고보서 1:4절에서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소망하고 기도한 계획들이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포기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하며 소망을 품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반드시 이루십니다. 갈라디아서 6:9절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고 내게 생명의 시간을 주셨음을 확신한다면 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도 반드시 이루심을 믿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때를 어떻게 분별합니까?
앞에서 했던 루이스의 ‘엄청난 이혼’의 내용을 생각해봅시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매 시간마다 출발하는 천국행 셔틀 버스의 운행이 곧 멈춘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즉 우리도 매일 당연한 것처럼 여기던 일과 상황들이 언제 갑자기 멈출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처럼 내일도 그렇겠거니’ 하면서 경각심 없이 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우리랑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자고 하셨을 때, 제자들이 기겁을 하며 만류했습니다. “선생님, 방금도 유대 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대답에서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라는 말씀을 생각해봅시다. “낮이 열두 시간”이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먼저 ‘한낮’이라는 의미입니다. 한낮에는 두려워하여 숨거나 잠자는 때가 아니라, 한참 일할 때입니다. 그리고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임을 의미합니다. 빛이신 주님이 함께 하시고, 건강하고, 기회가 있고, 능력이 있는 때입니다. 반대로 밤이 올 터인데 인생의 밤은 불신의 때, 병약할 때, 기회가 사라지고 없는 때, 고통의 시기이며, 이 때에는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종합해 보면, ‘지금은 빛이 있으므로 일할 때’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관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세상적인 이치로 볼 때에 ‘지금은 숨어있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방금도”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노리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나 자신들이 유대인들 앞에는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때를 분별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관점입니다.
이런 내용은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 이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긴 여행에 배고프고 피곤하여 마을로 음식을 구하러 간 후에 예수님은 물을 길으러 온 여인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생수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메시아’라고 밝히셨습니다. 여인은 마을로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했으며,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음식을 구해서 왔으며 예수님께 음식을 드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받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제자들은 계절적으로 추수하려면 넉 달은 더 있어야 한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수가성 마을 사람들의 영적인 추수의 때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환경과 여건을 보면서 일을 가늠합니다. 즉 사람의 관점은 눈에 보이고 이해되는 환경과 상황과 여건에 의하여 만들어집니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계획과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적인 환경과 상황에만 매달려 삽니다. 우리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때를 조금이라도 짐작하려면 영적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인 시각은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하며 성령께서 충만하실 때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일과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 속에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계시면서, 우리가 이해하는 환경과 상황과 여건을 초월하여 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나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해를 구하지 않으셨고, 오직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기회는 모두 하나님의 계획과 때를 위한 것임을 믿고, 주어진 생명의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