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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것이 힘입니다.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2,313회 작성일 2021-03-29 13:25

*** 하나님을 아는 것이 힘입니다. / 야고보서 4:13-17, 마태복음 10:32-33

 

야고보서 4:13-17,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마태복음 10:32-33,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는 편입니까? 아니면 변명으로 일관합니까? 역사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주된 공통점 중의 하나가 ‘자신의 잘잘못을 시인(是認)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하면 ‘so cool'(cool한 사람, 시원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소인배들의 특징 중 하나는 ‘책임전가(責任轉嫁)’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남에게 떠넘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즘 말로 ‘오리발’입니다. 이런 오리발의 사람은 세상에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반면에 시인할 줄 아는 사람은 설령 잘못을 했을지라도 용서받게 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중요한데, 그 중요성이 영혼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과 두 번째 왕인 다윗이 그 좋은 예를 보여줍니다(참조, 삼상 13:8-12, 15:17-23/ 삼하 12:1-15). 그런데 오늘의 많은 교인들이 그 중요성을 모르고 카멜레온처럼 살아갑니다.

 

‘파브르 곤충기’로 유명한 프랑스 생물학자인 ‘장 앙리 파브르(Jean-Henri Fabre, 1823,12~1915,8)’의 연구 일화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파브르 교수가 날벌레를 연구하던 중에 신기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날벌레들은 자신의 앞에 날아다니는 것만 따라 다니다가 결국 굶어죽는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곳에 먹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앞에 것만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파브르 교수는 더 신기한 현상도 발견했습니다. 곤충들 중에도 초목에 따라 피부색이 변하는 ‘보호색 곤충’이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철따라 보호색으로 갈아입는 보호색 곤충은 그 수명이 일 년도 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보호색 동물들은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주변의 색에 자신의 몸 색깔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인들 중에도 ‘보호색 교인’이 있습니다. 즉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자신의 신분을 바꾸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군에 있을 때에 보았던 것이 있습니다. 지휘관의 종교에 따라서 교회가 만원일 때가 있는가 하면, 절이나, 성당이 만원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유는 지휘관에게 잘 보이려는 ‘보호색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보호색 교인이 많은 것은 신앙을 ‘자기 유익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면 ‘기독교인’이지만, 상황이 불리하게 되면 ‘입을 닫아버리거나’, ‘무종교’로 색깔을 바꿉니다.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나, 하나님을 욕하거나 교회를 비난하며 따지는 사람 앞에서 두려움 때문에 침묵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covid19 펜데믹 상황에서 많은 교인들이 세상에 자신을 맞추는 보호색을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보호색 신앙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시인하는 늘푸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사야 26:3절에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야고보서 본문의 내용은 ‘자기 확신의 죄’에 대한 비유입니다. 즉 불확실한 미래에 대하여 마치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대로 이루어질 것처럼 확신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것입니다. 왜 이것이 어리석은 것입니까? 이유는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본문 15-16절에서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모든 생명의 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계획을 믿는 것은 악하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마태복음 본문의 내용은 보호색 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이 말씀은 사람들 앞에서나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시인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살고 있음을 기억하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야고보서 본문에 등장하는 상인을 봅시다. 이 사람은 신앙인이지만 하나님의 뜻에는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또한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도 없이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로마시대의 ‘순회상인’들입니다. 이 순회상인들은 유대인들로써 지중해 지역이나 세계 전역에 걸쳐 떠돌면서 이익이 많이 남는 수지맞는 장사를 했습니다. 이들은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고 하면서, 장사를 위해 지역이나 물건에 대하여 신중하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장사에 대한 계획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이들이 잘못한 것은 ‘불확실한 것에 대한 신뢰와 자랑’입니다.

 

이들이 무시했던 것 첫 번째는 장래의 불확실성입니다. 14절에서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하나는 ‘장래 일에 대한 불확실성’입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상인은 일 년 앞의 일을 장담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장래 일을 위한 아름다운 환상과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로 못 가게 될 수도 있고, 전혀 이익을 남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생명의 불확실성’입니다. 우리는 단 몇 초 앞의 생명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일 년 앞의 생명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자신이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장래의 일과 생명에 대하여 확신하고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무시했던 것 두 번째는 주권자를 무시한 것입니다. 본문 15-16절에서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들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모든 생명과 물체의 주인 되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이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뜻이면 …’이라고 해야 했습니다. 즉 자신의 모든 생각과 계획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맡기는 신뢰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뜻에 맡기지 않았고, 마치 자신의 계획대로 될 것처럼 확신하고 자랑했습니다. 이처럼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이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장래의 일과 생명에 대하여 확신하고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음을 넘어서 ‘악한 죄’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루를 시작하면서, 또는 어떤 일을 계획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거나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대로 나아가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지금까지 수없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매일 시작하기 전에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로 그날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주인 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행하지 않는 것은 분명한 죄입니다. 그 말씀이 본문 17절입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그러므로 미래와 생명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이 불확실함을 알고, 이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본문을 봅시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이 말씀은 영혼의 생명에 관계되는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앞에서 제자 됨을 시인하겠다고 하십니다. 반면에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예수님께서 보증해 주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증해 주지 않으시면 지옥행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돈 때문에, 사회적 신분이나 명예 때문에,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혹은 부끄러워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히길 꺼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가복음 8:38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시인해야 합니까? 본문에서 “누구든지나를 시인하면”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또는 주인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는 공적인 신앙고백입니다. 디모데후서 2:11-12절에서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주를 부인(否認)한다.”는 것은 베드로처럼 한 순간의 부인이 아니라 전 생애를 통한 부인을 말합니다. 그러면 일순간의 부인이나 부끄러워하는 것은 괜찮습니까? 물론 베드로처럼 회개하고 돌이키면 됩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면 당연히 신앙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시인(是認)하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입술만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고백인지 입술만의 거짓 고백인지는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아시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며 구원자이심을 어느 장소 누구에게라도 시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이 됩니다. 멀리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예수님께서 나의 보증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을 수 있는 자녀의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깝게 본다면,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인을 위한 놀랍고 선하신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우리의 장래를 아시며,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일들이 성취 되어야 할 시기를 아십니다. 이사야 45:7절에서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고 하시며 11절에서는 “네 장래의 일을 내게 부탁하며 내 손으로 한 일들에 관하여 내게 물으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6:32절에서는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죽을 아시느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모든 필요와 장래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자녀의 모든 걸음을 인도하십니다.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신앙인이었던 샤프츠버리(Anthony Ashley Cooper, 1st Earl of Shaftesbury, 1621-1683) 백작의 일화입니다.

샤프츠버리 백작이 런던의 대로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횡단보도 앞을 지나가는데 어린 소년이 자신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저씨, 나를 도와주세요!” 아이는 자신이 그 넓은 횡단보도를 건너기가 무서워서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백작은 아이를 안고 길을 건너가서 내려놓았습니다. 백작은 이 일을 상기하면서 어린 소년으로부터 받은 신앙의 교훈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주여, 나를 도와주소서.’라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에너지를 공급받아 승리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나의 구원자로, 온 우주의 주권자로 시인하고 도움을 구할 때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됩니다. 여러분이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자신의 인생이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생애에서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며, 자신의 구주가 되심을 모든 사람 앞에서 시인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이 이처럼 장래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모든 일에 예수님을 시인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현실의 복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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