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듬직한 사람
*** 듬직한 사람 / 야고보서 5:7-11
야고보서 5:7-11,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 들어가는 말
고사성어(故事成語)에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섶에 눕고 쓸개를 씹는다.’는 뜻인데, ‘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괴로움을 참고 견딘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이렇게 자신을 혹사하면서까지 노력합니다. 운동선수들은 금메달을 받으려고 지옥훈련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대학에 들어가려거나 직장을 얻으려는 젊은이들도 역시 인고(忍苦)의 시간들을 견딥니다. 이렇게 인내에 대하여 말하자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따라올 자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누가복음 21:9절의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받기 위하여 온갖 손해와 어려움과 고통을 인내합니다. 오늘 본문말씀도 결국은 ‘인내하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본문말씀에는 통상적인 인내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8절에서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하셨는데, 이는 다른 말로 하면 ‘환경에 쉽게 흔들리지 말고 듬직하게 주님을 기다리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성품을 평가하면서 ‘저 사람은 참 듬직하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지만,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상황을 잘 제어하며, 자신의 신념을 굳게 지키는 믿음직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품은 하나님께서도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26:2-3절입니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자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그리고 히브리서 13:9절에서도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 환경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직하고 듬직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마음의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은 사람들도 불신하고 싫어하지만, 하나님께서도 싫어하시고 어떤 일도 맡기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함을 받고자 한다면 먼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 듬직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앞서 읽었던 이사야 26:2-3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자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이 말씀에서 ‘신의를 지킨다.’는 것과 ‘심지가 견고하다.’는 것은 모두 ‘믿을 수 있는 듬직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듬직함의 원인이 ‘주를 의뢰함’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잠언 16:3절에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할 이유는 이어지는 9절에서 말씀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내 생각과 내 경험을 총동원하여 좋은 계획을 세웠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 일을 이루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33:2-3절에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현대어로 번역한 성경에서 의미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나는 온 세계를 창조한 주인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도 내가 모조리 일으켜 놓고 있다. 무엇이든지 내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것이 바로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너는 지금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보고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고 오직 나만을 의지하여라. 그러면 내가 네게 응답하고 엄청난 일도 이루어 주겠다. 나는 네가 이제까지 알지도 못하고, 또 전혀 알 수도 없는 큰일들을 네게 보여주겠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온 피조물의 주인이심을 믿지요? 믿는다면 이 말씀도 믿으십시오. “너는 지금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보고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고 오직 나만을 의지하여라. 그러면 내가 네게 응답하고 엄청난 일도 이루어 주겠다.”고 하십니다.
어떤 성도가 한숨을 푹 쉬면서 하소연을 했습니다. “조금만 더 주시면 힘이 될 텐데!”그 성도는 ‘하나님께서 늘 부족한 듯이 주시기 때문에 너무 빠듯하고 살기가 힘 든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신다고 하셨는데 왜 이렇게 힘들게 주시느냐?”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가 만족하도록 풍족하게 주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인색하셔서입니까? 나는 지금 삶이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워서 아무리 일을 해도 끝도 보이지 않아 막막하기만 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척박한 삶을 지낼 때처럼 이런 인생의 광야가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우리에게 보이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습니다. 사도 바울도 전도의 일을 하면서 수많은 고통과 죽음의 위기를 당했을 때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한계를 아십니다. 우리는 조금만 더 있으면 만족하고 감사할 것이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한계를 넘어서면 차라리 없는 것보다 못한 결과가 됨을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고, 잘못하여 생명을 잃어버리는 파멸로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하나님의 자녀들이 환경을 초월하여 흔들림 없는 듬직한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 어떻게 하나님만 의지하는 듬직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영국의 성경 번역가이자 유명한 설교가 이었던 ‘필립 부룩스’ 박사는 성격이 급하여 참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이 문제로 그는 늘 고민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중대한 일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곁에 있던 분이 물었습니다. “부룩스 박사님, 오늘 따라 무엇을 그리 고민하십니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내게 있는 문제도 고민이지만, 더 큰 고민은 나는 급한데 하나님은 도무지 급하지 않으시다는 것이지요.”
부룩스 박사의 고민에 저도 공감합니다. 나름대로는 긴급한 일이어서 조급한 마음으로 기도하지만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이 많습니다. 예전에 군대의 동료가 “자신은 예전에 교회에 다닌 적이 있다면서, 자신의 몸이 좋지 않았는데 ‘예수 믿으면 병도 고쳐준다.’는 말을 듣고 6개월 정도 다녔는데 병이 낫지 않아서 안 갔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3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해주겠다.”는 말씀을 믿고, 그 약속이 이루도록 25년을 인내하며 기다렸습니다. 본문말씀에 등장하는 욥은 갑작스러운 가문의 몰락과 육신의 건강 상실로 수개월을 고통과 조롱과 괴로움을 당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내하여 갑절의 보상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본으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도 극심한 박해와 고통 속에서도 인내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릴 수 있게 하는 것은 단연 ‘소망’입니다. 빌립보서 1:20-21절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우리 그리스도인이 담대하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6:17-19절을 봅시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그 뜻을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4절에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흔들리지 않는 듬직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 변하지 않는다는 맹세’입니다. 위의 말씀에서도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다.” 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맹세로 보증하신 약속을 믿고 우리는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활신념에도 이런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장자크 루소’는 “인내는 쓰고 그 열매는 달다.”라고 했고, 고사성어에도 ‘고진감래(苦盡甘來, 고생 끝에 낙이 온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도 ‘인내한 결과가 달콤한 열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했듯이, 언제까지 인내하고 기다려야 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 답으로 본문말씀에서는 농부와 선지자들의 삶을 제시합니다. 지금 들녘에는 밭갈이가 한창입니다. 농부가 거름을 뿌리고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은 몇 개월 혹은 몇 년 후에 거둘 열매를 기대하기 때문에 그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씨를 뿌리면 반드시 수확의 때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126:5-6절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정하신 진리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의 행위와 그들의 손의 행한 대로 보응하리라.”(렘 25:14) 로마서 2:6-8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철저하게 이 말씀을 신뢰하며,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깨우쳤습니다. 이들을 본 받아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주실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 기다림이 때로는 짧지만, 때로는 한계에 이르도록 멀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반드시 끝이 올 것이며, 약속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피할 수 없거든 즐겨라.’고 합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잘 못하는 것 중의 하나는 ‘기다리고 참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민족은 ‘빨리빨리’문화에 젖어 있어서 더더욱 기다리는 것을 잘 하지 못합니다. 현대인들의 생활습관을 관찰 조사한 통계를 보면 현대인은, ➀교통 신호가 바뀌고 나서 0.5초 내에 앞차가 출발하지 않으면 뒤차의 운전사가 짜증을 내고 ➁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3분을 넘기면 걸어서 올라가고 ➂택시를 기다리는 시간이 5분 이상 되면 기다리던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은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택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성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일이나 생활 속에서의 신앙의 일들도 빨리 진행되고, 결과도 신속하게 나오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필립 부룩스 박사의 말처럼, ‘내가 급하다고 하나님까지 급하신 것은 아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소망은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지금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면서 기쁘게 나아가십시오. 노예에다가 죄수까지 된 젊은 요셉을 하나님께서는 하루아침에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인내하여 하나님께 듬직한 사람으로 인정받아 주님께서 주시는 좋은 결말을 선물로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