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의지하는 것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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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12-08 19:57
*** 내가 의지하는 것 / 마가복음 10:17-27
마가복음 10:17-27,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6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 들어가는 말
말씀을 전하기 전에 먼저 하나 물어봅시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의 말이나 표현이 솔직하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요즘 들어 부쩍 ‘사람들이 진심을 잘 표현하지 않고, 우회적인 표현을 많이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마도 요즘 세상이 믿을만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에 신중합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 신앙의 세계를 보면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가장 정직하고 진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진실하지 않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깊이 숨겨진 생각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앞두고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는 생각을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31:21절에서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노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이루어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숨기는 것이나 가리는 것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가 무엇인가를 의지합니다. 신을 의지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기도 하고, 세상의 권력이나 지식, 능력, 돈, 사람을 의지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이 가장 의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물음을 공개적으로 한다면 많은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대답하기 전에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자신의 이미지(image)’일 것입니다. 즉 ‘내가 이렇게 대답하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정직한 모습에 ‘이미지 필터(image filter)’를 끼웁니다. 예컨대, ‘하루에 기도를 얼마나 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두뇌가 신속하게 계산합니다. “내가 목사인데 정직하게 ‘20분 정도합니다.’라고 하면 저 사람이 나를 무시하지 않을까!”라고 답을 낼 것이고, 즉시 이미지 필터를 끼워서 “몇 시간정도 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생각을 한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스스로도 속을 정도로 외식적인 포장을 잘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사람이 평가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는 ‘의지의 대상(對象)’에 대하여 살펴보려합니다.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삶에 임하는 직접적인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의 이야기는 어느 날, 예수님을 찾아 온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와 그 결과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공관복음이라고 부르는 세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19:16-30절에, 누가복음에는 18:18-30절에 있습니다. 그리고 세 곳 모두가 같은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앞 쪽에는 ‘천국이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본문의 뒤 쪽에는 ‘하나님을 따름에 대한 진정한 보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성은 본문의 내용과 관계가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즉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에 대한 내용입니다. 세 복음서를 모두 참조하면,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젊은 청년이며, 돈이 많은 부자였고, 정부의 관원이었습니다.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젊은 나이에 출세한 사람입니다.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경제적인 부, 종교적인 열심, 그리고 젊음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에게 마지막 소망이라면 영원한 생명을 보장 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청년에게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들은 율법을 의미하는 ‘십계명’입니다. 청년은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되묻습니다. 즉 청년은 신앙의 가정에서 자랐으며, 율법에 엄한 교육을 받았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청년에게 한 가지를 더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요구 사항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한 부분’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감이 가득하고, 자랑스럽고 당당하던 청년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이유를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청년은 영원한 생명보다는 세상의 재물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 내가 의지하는 것은 영의 생명과 연관됩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우리를 충격에 빠뜨릴 수 있는 소식이 들어 있습니다. 본문 24-25절인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부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을 문자대로 본다면 그러하지만 예수님의 말씀 의도는 ‘세상의 재물을 의지하는 것이 세상적인 부자이다.’라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보시는 부자는 세상의 재물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세상 재물을 더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통하여 알려주십니다. 누가복음 12:16-21절을 봅시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부자’에 대한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의 생명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의 것을 더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지하는 세상의 것이란, 하나님께 속한 영적인 것의 반대되는 모든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의지하는 것이 영의 생명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영역에 관계됩니다. 좀 더 쉬운 표현으로 봅시다. 부자(富者)는 재물에 대해 과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부자’라는 말은 재물만 아니라 지식이나 명예, 그리고 권력 등에도 사용합니다. 즉 부자라는 말은 대체로 무엇이든지 많이 소유한 사람을 뜻합니다. ‘의지한다.’는 말은 우리가 잘 사용하는 표현으로 ‘집착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소유가 많은 사람일수록 그 소유에 집착하게 됩니다. 이런 소유에 대한 집착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게 합니다. 본문말씀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한 부자는 세상 재물에 집착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부자청년은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지 못하고 세상의 것에 집착한 사람입니다. 즉 세상의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집착한 사람에 대한 경고가 요한일서에도 있습니다. 2:15-17절을 봅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러므로 이 세상의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께 무엇을 얻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예전에 많이 불렀던 M. Reynolds가 지은 복음송이 있습니다.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버리는 것 버리는 것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더 가지지 않는 것. 이상하다 동전한닢 움켜 잡으면 없어지고 쓰고 빌려주면 풍성해져 땅위에 가득하네 오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버리는 것 버리는 것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더 가지지 않는 것. 자 내일 걱정일랑 버리고 모든 염려 주님께 맡기세요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더 가지지 않는 것”(1127) 지금 교회들이 잘 알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은 자신의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맨몸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모든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위하여 사용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생명을 부르시면 사용하던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육신조차 흙으로 돌아가 버리고, 영혼은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가게 됩니다. 욥은 동방에서 지혜 자였고, 부자였습니다. 사탄의 충동질로 그 많은 재산을 하루아침에 다 잃고 열 명의 자식까지 한꺼번에 죽고, 자신의 몸은 병들어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그 때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기 1:21절입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얻은 것을 자신의 것인 줄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해가 되도록 지키려고 합니다. 지금이라도 주님이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모든 것 다 버려두고 가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어진 것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청지기는 후일에 자신이 한 일을 주인으로부터 평가 받게 됩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의지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이나 성공을 자랑하지만 이것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명기 8:18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고 하십니다. 시편 146:3절에서는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라고 하시며, 이사야 2:22절에서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고 하십니다. 잠언 3:5-6절에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9-10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17-19절에서 말씀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주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시자 베드로가 나섰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 19:27) 부자 청년과는 달리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음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한 대가(代價)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친절하게 ‘자신을 따른 자들에게 주어지는 영광과 미래뿐만 아니라 육신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받을 보상’까지 알려주셨습니다. 이것이 본문에 이어지는 28-30절의 내용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난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영생을 택하지 못한 청년과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주님을 따른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을 비교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살면서 ‘영생이냐? 세상의 부귀영화냐?’를 두고 고민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합리화를 하며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부자 청년처럼 세상 것을 버리자니 힘들고 못 살 것 같고,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면 말씀대로 따라야 할 것 같아서 망설이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만 합니다. 하지만 잠깐 사는 세상의 부귀영화가 좋아서 세상의 것에 집착하여 영원한 생명을 포기한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하는 것은 ‘재물을 많이 모으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올바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십니다.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한다고 못 살거나 힘든 삶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는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모든 일에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결코 구원과 영생을 포기하지 않도록 오늘 말씀을 잘 깨달아 하나님을 더 의지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강의 은혜가 삶에 가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