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의 소통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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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11-24 13:46
*** 주님과의 소통 / 요한복음 4:21-24
요한복음 4:21-24,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 들어가는 말
오늘은 소통(疏通, communication)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가장 큰 공통된 특징은 ‘소통’입니다. 동물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식물들도 꽃이나 꽃가루, 꽃모양, 꿀, 향기 등으로 소통을 합니다. 우리 인간들의 사회는 최근 들어 엄청난 발전을 거듭하여 ‘스마트시대’라고 부르며, 하루에도 수많은 정보들이 다양한 채널을 통하여 소통합니다. 현대는 사회 관계망 구축인 ‘SNS(social network service / facebook, twitter, Nave, instagram, google, youtube, cacaotalk 등등)’를 통하여 온 세계가 마치 한 도시에 있는 것처럼 빠른 정보공유와 소통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통을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왜냐하면 영의 세계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영과 마음의 소통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텔레파시(telepathy)라는 말을 아시지요? ‘한 사람의 생각이나 말, 행동 등이 다른 사람에게 전이되는 심령 현상’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소통은 마치 텔레파시와도 같습니다. 소통의 의미는 ‘서로 말과 마음이 통한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6: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시고, 요한복음 17: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는 구절입니다. 지금의 세상은 소통의 방법들이 너무나 빠르게 발전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하나님과의 소통은 점점 더 막히고 있습니다. 영적인 소통의 부재(不在)는 마치 우리 몸의 혈관이 막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과 육신의 모든 삶은 하나님과의 소통에 달려 있기 때문에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에 대하여 살펴보려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사마리아의 수가 성 입구에 있는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수가 성 여인과의 대화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1절부터 42절에 이르는 긴 내용입니다. 사마리아 지역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사이에 있는 이방인의 지역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이방인의 지역으로 다니지를 않고 광야를 통하여 멀리 돌아서 다니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대에서 갈릴리 지역으로 가시면서 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피하는 길을 예수님께서 굳이 택하신 이유는 사마리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음식을 구하기 위하여 마을로 간 후에 예수님께서는 물을 길러온 여인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과 생수에 대한 말씀을 하시다가 예배에 대한 말씀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수가 성의 여인은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 여인은 예배의 장소 문제를 거론한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아직은 율법의 영향으로 성전 예배가 주(主)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장소 문제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본문 23-24절에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시며, 예배는 하나님과의 소통의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 주님과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소통해야 합니까?
구약성경에서는 교제라는 말을 ‘하바르’라고 하는데, ‘결합하다’, ‘쌓아올리다’, ‘동맹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서로 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성경에서 교제에 해당하는 단어는 ‘코이노니아’와 ‘메토케’입니다. ‘코이노니아’는 ‘교통, 교제, 분배, 우정’등의 의미로 ‘상호교류’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0:16절에서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코이노니아’를 ‘참여하다(partnership)’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서로 소통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메토케’라는 단어는 ‘함께 나눈다, 관여한다, 교제한다.’등의 의미입니다. 이처럼 소통한다는 것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함께 한다는 것은 그저 같은 자리에 있거나 함께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뜻이 통하여 서로 파트너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보았던 고린도전서 10:16절의 말씀이 ‘예수님의 피와 살을 나누어 먹는 교제(성찬식)가 믿음의 가장 중요한 체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소통이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21절에서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십니다.
병원에서 사역하시는 목사님(원목)이 환자들을 돌아보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수술실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거리는 부인을 만났습니다. 목사님은 “가족 중에 누가 아프신가요?”라고 물었습니다. 부인은 “예, 남편이요.”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었고 부인은 ‘교회 다닌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이렇게 초조할 때 생각나는 성경말씀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지만,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부인의 손에는 휴대폰이 쥐어져 있었고, 통화를 하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열었다 닫았다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 말로는 ‘입원한 환자들의 거의 전부가 휴대폰만큼은 꼭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소통되는 말씀은 전혀 기억하지 못해도 사람과 소통하는 휴대폰만은 가지고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지요.
이렇게 현대인들은 사람들과 단절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의 한 방법이 휴대폰을 가지는 것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현대인들이 필수적으로 가지고 다니는 휴대폰에 대하여 이야기해 봅시다. 요즘 대세는 스마트폰입니다. 스마트폰은 컴퓨터 이상의 역할을 합니다. 스마트폰은 TV, 컴퓨터, 전화기, MP3플레이어, 카메라, 게임기, 네비게이션 등의 역할을 모두 수행합니다. 스마트폰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세상과의 소통’입니다. 전화가 되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실시간으로 세계의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고, 글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앞서 말씀드린 대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입니다. 여기에 가입된 사람들만 10억이 넘습니다. 이들은 어디서든지 네트워크에 연결만 되면 항상 서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의 사람들은 세상과는 소통을 잘 하는데, 하나님과의 소통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마가복음 7:6-7절입니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그리스도인의 무능함의 원인을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과의 진정한 소통이 없는 것이 그리스도인을 무능하게 합니다. 이 말씀 이후의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하나님과의 소통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보이신 글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소통의 기초입니다. 그리고 나의 생각이나 뜻을 하나님께 표현하는 것의 대표적인 것이 기도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의 소통을 이루어야 합니다.
※ 어떻게 소통하며 그로 말미암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방금 말씀드린 대로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의 소통이 이루어지는데, 중요한 것은 그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생각을 읽으신다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즉 내 마음의 생각이 곧 주님 앞에서 사는 나 자신의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 후에 바란광야에 진을 쳤을 때,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으로 보냈습니다. 그들이 40일 간의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서 보고할 때에 정탐꾼들이 ‘가나안은 점령 불가능하다.’고 하자 온 백성들이 통곡하며 아론과 모세를 원망하며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노라.”(신 31:21)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눈에 드러나는 행위를 보면서 판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생각을 읽으십니다. 즉 하나님과 사람과의 소통은 영이며 마음의 생각입니다. 잠언 24:12절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할지라도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사람이 말로 ‘아니라.’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대로 믿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이 이미 하나님께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대목을 하나 봅시다. 창세기 18:11-15절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분명히 사라는 속으로 웃었고,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라 마음의 생각을 들으셨습니다. 한 곳을 더 봅시다. 예레미야 42:19-20절입니다. “유다의 남은 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두고 하신 말씀에 ‘너희는 애굽으로 가지 말라.’하셨고, 나도 오늘 너희에게 경고한 것을 분명히 알라. 너희가 나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전하라. 우리가 그대로 행하리라.’ 하여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 이 말씀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할 때 도망친 일부 백성들이 바벨론 군대가 철수한 후에 유대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하나님께 물어보시고 우리에게 갈 길과 할 일을 보여주십시오. 우리가 그대로 순종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아뢰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속마음을 예레미야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즉 돌아온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애굽으로 피하라.’고 하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가지 말고 지금 이곳에 머물러 살아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도망자들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네가 지어낸 말’이라고 일축하며 애굽으로 갔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가라.’고 하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이곳에 머물러 살아라.’고 하자, 도망자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지어낸 말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보이시면 순종하겠다.’는 것은 거짓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통은 마음의 생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영적이고 진실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소통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베드로후서 1:4절을 봅시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 약속이란 바로 앞 구절인 3절에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능력이며 은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과 소통하는 사람에게는 감사와 기쁨의 찬미가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과 진리의 예배가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소통이 막히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우리 마음에서 기쁨과 평안이 사라집니다. 사는 것이 힘들고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세상의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의 악순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과 마음의 생각을 진실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요한삼서 2절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입니다. 즉 영혼이 주님과 소통하여 잘 되어야 몸의 건강과 모든 일이 잘 되게 됩니다. 본문말씀처럼 하나님 앞에서 영과 마음의 생각을 진실하게 잘 관리하여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소통을 이루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