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치고 힘들 때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3,610회
작성일
2020-06-10 22:07
*** 내가 지치고 힘들 때 / 고린도후서 4:6-15
고린도후서 4:6-15, “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3 기록된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마음이 가장 약해질 때가 언제라고 생각합니까? 반면에 마음이 가장 담대해질 때는 어떤 때였습니까? 사람은 사실 강한 것 같지만 정말 나약하고 보잘 것 없습니다. 능력 면에서는 때때로 동물들이 훨씬 우월합니다. 독수리의 시력은 사람보다 일곱 배가 좋고, 박쥐나 고래 등은 초음파를 사용하며, 개미나 곤충들은 지진이나 천재지변을 감지하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동물들은 자신에게 닥치는 환경의 변화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가장 큰 장점은 영이 있다는 것과 발달한 두뇌와 소통의 능력입니다. 아마도 사람의 마음이 가장 약해질 때는 육신이 병들거나 소망이 사라질 때가 아닌가 합니다.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기를 환경이 어려워지고 환난이 닥치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지만 사실은 이러한 때에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러한데 하나님의 사람들은 더욱 강해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8-9절에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담대한 이유를 본문 바로 다음 구절인 16-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그래서 이 시간에는 지금 세계적으로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과 우리를 힘들게 하는 환경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어떠한지를 살펴보려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바울 당시의 고린도는 인구가 670만 정도로서 그리스의 대도시이자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각국의 인종이 모여 있었고 학문도 대단히 활발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상숭배가 창궐하여 도덕적인 퇴폐와 방랑적인 생활이 보편화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고린도교회에도 영향을 끼쳐서 분열과 거짓 교사들의 횡포, 세속적인 신앙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보여주는 교리에 대한 가르침보다 구체적인 생활의 문제에 대한 실제적 해결책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우상숭배가 만연한 사회의 한 가운데 놓인 교회의 고민, 싸움, 실패와 승리를 솔직하고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해법을 제시합니다. 이 고린도전서를 에베소에서 써 보낸 후, 디도를 보내어 그 이후의 고린도 교회의 상태를 알아보게 하고, 마게도냐에서 디도를 만나서 그 경과를 보고받았습니다. 그 소식 중에서 기뻐할 일은 고린도전서에 의해 그들이 회개하고, 또 바울을 간절히 사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고린도교회 중에서 반(反) 바울주의자가 있어서 바울에 대하여 비난하며, 바울의 언어태도까지 문제 삼는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이 다시 쓴 편지가 본문이 포함된 고린도후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말씀을 통하여 먼저 우상숭배를 비롯한 고통스러운 생활로 많은 어려움 겪는 고린도교회에 그리스도인의 현실적인 삶을 깨우칩니다. 바울은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질그릇과 보배 관계를 통하여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즉 ‘인간이란 질그릇과 같아서 깨지기 쉬운 존재이지만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보배이자 능력이신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두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인간은 약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능력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세상에 대하여 강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깨달으면 이 사실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은혜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지치고 힘들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9세기 덴마크의 철학자인 ‘키에르 케고르’의 글에 ‘들오리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중해 해변에 살던 철새인 들오리 한 떼가 추운 지역으로 이동하려고 출발했습니다. 한참을 가던 중에 어느 마을 위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마을의 어느 아름다운 집 뜰에 집오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모이를 먹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 들오리는 한 마리가 무척 부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마침 한쪽 날개가 아파온다는 것이 느꼈고, 잠시 쉬어 가려는 생각으로 홀로 대열에서 벗어나 집오리가 있는 집 뜰에 내려앉았습니다. 들오리는 집오리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며칠 신나게 놀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날아오르려고 날개를 퍼덕거렸지만, 그동안 살이 쪄서 잘 날아지지 않았습니다. “에이, 내일 날아가지 뭐.”라며, 들오리는 ‘내일, 내일’하면서 많은 날을 집오리들과 함께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갔습니다. 어느 날, 하늘에 들오리 떼들이 아름다운 수를 놓으며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정신이 번쩍 난 들오리는 날아오르려고 발버둥 쳐봤지만, 이제는 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지금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을 비유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절대 다수가 고민하는 문제는 2주 전에 말씀드렸던 ‘신앙과 현실 사이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적으로는 ‘세상을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아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바로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세상의 부귀영화, 현실을 즐기는 생활이 부럽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조금만 세상의 맛을 보겠다.’고 생각하고 육신의 삶에 젖어듭니다. 때때로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면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세상의 수렁으로 빠져버립니다. 요한일서 2:15-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치고 힘들어하는 이유는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들오리가 집오리들의 평온한 모습을 보면서 부러운 마음이 들자 날개가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육신의 삶을 즐기는 것이 부럽게 여겨지는 순간, 기도하고 예배하고 절제하고 인내하는 영적인 생활이 힘들게 여겨집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서 살고 육신의 생활이 있기 때문에 육신의 욕망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으로 마음이 향하는 순간 삶이 힘들게 여겨집니다.
민수기 11:4-6절을 봅시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출애굽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던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받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섞여 있던 이방인들이 세상적인 욕망을 나타내며 불평하자 이스라엘 자손들도 세속적으로 살던 옛날이 생각났습니다. ‘아, 옛날이여.’라는 유행가도 있듯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에 마음을 두게 되면 세상에서 즐기던 것들이 다시 그리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어려움도 기쁘게 여기며 살던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을 따르며 즐기던 삶이 생각나면 좁은 길을 가는 신앙의 삶이 힘들고 어렵게 여겨지고 불평과 원망이 일어나게 됩니다.
※ 그러면 우리가 지치고 힘들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내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한다면 어려움도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8-19절을 봅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리고 요한복음 17:14절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세상에서는 미움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하고 미움을 받는다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인 표시임을 알고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육신을 가진 사람이므로 세상에서 받는 미움이나 어려움 때문에 지치고 힘들 때가 많습니다. 바로 이런 때를 위하여 본문말씀을 주셨습니다. 본문 6-11절을 읽어봅시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 엄청난 생명의 약속과 혜택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신뢰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진정으로 신뢰한다.’는 것은 이 약속과 혜택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두려움, 염려, 걱정, 근심, 낙심, 좌절 등.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모두 하나님께 대한 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5:35-36절을 봅시다.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두려운 마음은 불신으로 비롯되는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4:18절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두려워하는 마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 수 없으며 오히려 형벌이 따르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거나 어려움을 당하여 지치고 힘이 들 때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를 신뢰하며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영국의 국왕 조지 5세(George Ⅴ, 재위 1910년 5월 6일-1936년 1월 20일)는 대영제국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시련과 어려움이 있었으며, 막중한 책임감과 긴장감에서 오는 불안으로 날마다 힘들어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도자기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작은 도시에 있는 한 도자기 전시장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모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도자기 작품을 관람했습니다.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크게 감탄하던 조지 왕은 두 개의 꽃병만 특별하게 전시된 것을 보았습니다. 두 개의 꽃병은 같은 원료와 타일을 사용하였고, 무늬까지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윤기가 흐르고 색체가 선명했지만 다른 하나는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볼품없는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왕은 관리인에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같은 듯한데 같지 않은 두 개의 꽃병을 나란히 둔 것이오?”
관리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는 불에 구워졌고, 다른 하나는 구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아서 고난과 시련은 우리 인생을 윤기 있게 하고 생동감 있게 하며 무엇보다 아름답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특별히 전시해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신실한 믿음을 인정받은 욥은 최악의 시련과 고통을 겪었으며, 가족과 친구, 주변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까지 받았습니다. 그 시련 속에서 너무나 힘들었던 욥이지만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기 23: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그는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그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주셨으며 잃었던 모든 명예까지도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욥기 42:12-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인생이 힘들고 지칠 때에는 불안해하지 말고 가만히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본문 14-15절에서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은혜를 넘치게 하십니다. 이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