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육신의 집착은 기회를 놓칩니다.
*** 육신의 집착은 기회를 놓칩니다. / 열왕기하 5:8-12
열왕기하 5:8-14, “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 들어가는 말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니콜라이 고골(Nikolai Gogol, 1809~1852)’의 1842년 작품인 ‘외투’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추운 지방의 어떤 하급 관리가 외투를 사기 위해 철저하게 절약했습니다. 그는 음료수도 사 먹지 않았습니다. 전기료를 아끼기 위해 다른 곳에서 머물다가 집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심지어 구두 뒤축을 닳게 하지 않으려고 살살 걸어 다녔습니다. 이렇게 아끼고 모아서 겨우 외투를 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적이 들어서 그 아끼는 외투를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는 모든 의욕을 잃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작가 고골은 현대인들이 지나치게 집착하는 ‘물질세계’에 대하여 비유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경우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오늘의 많은 사람이 이렇게 허무한 세상의 삶에 연연하며 별것도 아닌 것에 집착하며 살아갑니다. 집착(執捉)을 사전에서는 ‘어떤 것에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하고 매달림.’이라고 정의합니다. 사람은 누구든 자신이 집착하는 것이 한둘은 있을 것입니다. 돈에 집착하고, 명예나 권력에 집착하고, 자녀나 어떤 취미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2:25절에서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일서 2:15절에서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십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도 돈에 집착했던 가룟 유다처럼, 자기 생각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나아만 장군이 있습니다. 이러한 집착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좋은 기회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세상의 것들에 빠져 집착하게 되면 영의 생명뿐만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세상에서의 더 좋은 기회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내용을 봅시다.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아람 나라의 장군이었던 ‘나아만’에 대한 내용입니다. 나아만은 아람을 패망의 위기에서 건진 용맹한 장군이었고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는 나병 환자였습니다. 마침 얼마 전에 포로로 잡혀 와서 장군의 집 식모살이하는 유대인 소녀가 엘리사 선지자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소녀는 ‘자신의 나라 사마리아에 선지자가 있는데 나아만 장군의 나병을 고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포로 소녀의 말조차 귀가 번쩍 뜨인 나아만은 왕에게 그 이야기를 했고, 왕은 즉시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는 편지와 보물을 주면서 나아만을 이스라엘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아람 왕의 편지를 받은 이스라엘 왕은 옷을 찢으며, 아람 왕이 전쟁을 일으키려는 핑계를 만들려고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이 무슨 수로 당시의 불치병인 나병을 고치겠습니까?! 편지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 선지자가 나아만을 자기에게 보내라고 왕에게 전했습니다.
나아만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문밖으로 나오지도 않고는 사환을 통해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습니다. 일국의 이인자인 자신을 무시하는 엘리사가 너무나 괘씸했고, 보잘것없는 요단강에서 목욕하라는 말이 모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생각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나아만의 이 말이 자기 집착입니다. 자기 생각과 판단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이 회복될 수 있는 기적의 기회를 버렸습니다. 다행히도 종들의 간청을 듣고 자신의 고집을 꺾어 엘리사의 처방에 순종하여 깨끗하게 나음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 그리스도인이 피해야 할 집착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집착하는 것에는 어느 것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의 모든 것이 집착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이 곧 집착이라고 착각하기 마련인데, 얼핏 보면 비슷하지만 둘은 근본 자체가 다릅니다. 사랑은 배려심이 포함된 감정이고, 집착은 반대로 이기심이 포함되어있는 감정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랑은 “상대가 어떻게 해야 더 행복할까?”라고 끝없이 고민하고, 상대의 행복을 위해 늘 희생하고 노력합니다. 반면, 집착은 정반대로 상대방이 고통스럽든, 슬프든 자신이 행복하면 그걸로 만족하며 상대방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이 행복하다면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소유하고 싶은 상대방이 완전히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집착이 그만큼 더 심해지게 됩니다. 이처럼 집착의 대상이 사람이든지, 사물이든지, 정신적이든지 그 공통점은 무엇을 소유하지 못하거나 보지 못하면 심한 불안증세가 나타나며, 자신이 소유하고 싶은 상대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나게 됩니다. 만일 이러한 세상적인 집착이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나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주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15-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의 것으로 대변되는 세 가지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일반적으로 ‘향락’이라고 표현됩니다. 안목의 정욕은 ‘탐욕’입니다. 이생의 자랑이란 자신을 나타내고 드러내려는 ‘공명심’입니다. 이러한 세상적인 사랑이나 욕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침입해 들어온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심판 때에 세상과 함께 사라질 것들이므로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나아만은 어떻습니까? 나아만은 자신의 불치병을 고칠 기회를 잡았습니다. 나아만이 얼마나 자신의 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으면, 한갓 어린 소녀의 말을 믿었겠습니까! 그렇게 자신의 모든 체면과 위신도 내려놓고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어렵게 잡은 좋은 기회를 자신의 경험과 생각에 빠져서 분노하고 돌아섰습니다. 나아만의 생각을 보십시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이것을 집착이자 이기적인 생각이라고 합니다. 한 번 자기 집착에 빠지게 되면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뜻을 살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말한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어라.’라는 것은, 단순히 목욕하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즉 요단강물이기 때문에 병이 나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 병 고침의 원인이었습니다. 제가 만났던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기 생각과 경험에 집착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8:34절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절대적인 조건이 ‘자기 생각과 경험, 자기 뜻을 버려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무능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은 자기 생각과 경험, 자기의 뜻입니다.
※ 어떻게 자기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감히 하나님께 말싸움을 건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모세한테 했던 것처럼 떨기나무에 불을 붙여 보십시오. 그러면 따르겠습니다. 하나님, 여호수아한테 했던 것처럼 성벽을 무너뜨려 보십시오. 그러면 싸우겠습니다. 갈릴리에서 했던 것처럼, 파도를 잔잔하게 해보십시오. 그러면 듣겠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떨기나무 옆에, 성벽 근처에, 바닷가에 앉아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지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을 보내셨습니다. 떨기나무에 붙일 불이 아니라 교회에 붙일 성령의 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벽을 무너뜨리셨습니다. 돌로 만든 벽이 아니라 죄의 벽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폭풍을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바다의 폭풍이 아니라 영혼의 폭풍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의 반응을 기다리셨습니다. 기다리시고…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마음이 아니라 떨기나무를, 삶이 아니라 벽돌을, 영혼이 아니라 바다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자 그 사람은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능력을 잃으셨나요?”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눈과 귀를 잃었느냐?”
이 이야기의 의도가 무엇인지 찾으셨습니까? 로마서 8:5-7절을 봅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하나님께 따지고 대들었던 그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의 일로 나타내셨습니다. 마치 ‘동상이몽(同床異夢)’처럼, 그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생각의 방향이 하나님과 방향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방향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방향에 자신을 맞추는 것입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고, 장단이 맞아야 춤도 출 수가 있고, 손발이 맞아야 일도 진척이 됩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인이시며 아버지이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게 맞추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뜻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사야 55:8-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다시 나아만을 봅시다. 나아만이 자기 집착에 빠져 화를 내며 돌아서자, 그의 종들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만류합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이는 나아만이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침이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나아만은 성품까지 고집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어린 계집종의 말을 믿었던 것처럼, 종들의 말을 듣고 고집을 꺾고 요단강으로 향했습니다. 결과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나아만이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된 것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신실한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알았던 그의 겸손한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도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사람의 고집은 교만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합니다. 로마서 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지만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제시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겸손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경험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집착에 빠지지 않으려면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전해지는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영적인 분별을 하지 못하여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조언에 귀를 기울이면 생명이 위태롭게 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법률가로 대성한 사람이 은퇴하던 날, 많은 사람이 몰려와 축하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근심으로 가득한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그는 말했습니다. “다들 나를 성공한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슬프다네. 나는 본래 무용수가 되고 싶었어. 결국, 나는 원하지 않는 것에 일생을 소비했고 이제 그것을 놓쳐 버렸네. 나는 우유보다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온 세상이 우유가 더 좋다고 강요하는 바람에 물컵을 두고도 우유만 마셔댄 거야.”
육신의 삶에 강요당하여 세상에 집착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 앞에 서는 날 후회만 남을 것입니다. 뱀처럼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사람은 땅 위의 수풀이나 먼지밖에 눈에 띄지 않습니다. 하지만 멀리 넓은 곳을 보려면 독수리처럼 높이 날아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삶에만 잠겨 사는 우물 안 개구리로 살지 말고, 영원한 세계를 보는 영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잠시 있을 세상에 잡착하다가 영원한 행복을 잃어버리는 미련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소망의 사람으로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만들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