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함께 하는 기쁨
함께 하는 기쁨 / 빌립보서 2:1-4
빌립보서 2:1-4,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공동번역)“1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 2 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 3 그렇게 해서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4 저마다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 남의 이익도 돌보십시오.”
** 들어가는 말
흔히 ‘인간은 사회적 동물(社會的動物, social animal)’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384~BC322)가 한 말입니다. 이 말의 의는 ‘인간은 개인으로 존재하고 있어도 홀로 살 수 없으며, 사회를 형성하여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관계를 유지하고 함께 어울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즉, 개인은 개인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우리 옛말에도 ‘독불장군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서로 함께하면서 삶의 의미를 만들어갑니다. 이러한 함께하는 삶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의미는 남다릅니다. 전도서 4:12절에서도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라고 했으며, 본문말씀에서도 하나 됨에 대하여 깊은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면서 가장 먼저 가족공동체를 이루게 하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경험하게 하시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는 인생을 풍요롭게 하며, 기쁨과 행복을 주는 함께 하는 공동체, 함께 하는 삶을 통한 주님의 배려입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빌립보서는 신약성경 열한 번째이며, 바울의 편지로서는 여섯 번째 편지입니다.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서신’으로 불리는데,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에 써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가 기록된 주된 이유로는, 두 가지 정도를 꼽습니다. 하나는, 빌립보 교회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선물을 보내준 것을 감사하는 것이며(4:10, 14-18). 다른 하나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 몇 가지 작은 문제에 관한 조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 작은 문제란, 교회 안의 불일치(1:27, 2:1-4, 4:2, 3), 유대주의(율법주의)자의 위험(3:2), 잘못된 완전주의자의 위험(3:12-16) 등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본문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본문 바로 다음 구절인 5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의 성육신(成肉身)과 자기를 낮추어 십자가를 지신 것을 본으로 보이십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라고 부르는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삼위 하나님의 하나 되심과 성도들의 하나 됨,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 된 성도들이 하나를 이루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17:21-22절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처럼 함께 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명하신 것이기도 하며, 그리스도인 됨의 특징을 이루는 것입니다.
※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철환 작가의 산문집인 ‘연탄길’이라는 책은 2000년도에 첫선을 보인 베스트셀러인데, 내용 중에 결혼식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결혼식 날,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아름다운 신부가 입장하는데, 신부가 한쪽 다리를 절면서 들어왔습니다. 다른 쪽보다 짧은 다리를 이끌고 힘겹게 신랑 앞에 거의 다 왔을 무렵 갑자기 신부가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하객들과 신부 아버지는 당황해했고 신부는 그 자리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신랑이 달려 나오더니 신부의 손을 잡아 일으켜 팔짱을 꼈습니다. 그리고 신부와 같이 걸어가서는 주례자 앞에 섰습니다. 주례가 시작되고 몇 분 지나자 신랑은 자신의 한쪽 발을 웨딩드레스 밑으로 살며시 들이밀어 신부의 짧은 발을 자기 발등 위에 올려놓고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본 하객들은 두 사람의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친한 친구 중의 한 명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결혼식을 보았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부가 신혼여행을 다녀왔을 때, 그 친구가 그 가정을 방문하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결혼 앨범을 보고 있었습니다. 결혼 앨범에서 메모지 한 장이 떨어졌는데 그 친구는 그 메모지에 적힌 메모를 보고 또 한 번 크게 감동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제가 늘 기쁨으로 당신의 한쪽 다리가 되겠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내가 진실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내 한쪽 다리를 절개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부족한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다독거려주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 서로의 지지대가 되어주기로 약속하는 것이 바로 결혼입니다. 그렇게 결혼하여 부부가 되면 ‘같은 곳을 바라보며 먼 미래를 향해 여정을 떠나는 배와 같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함께한다는 것을 말할 때 가장 좋은 예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의 제 일 순위입니다. 창세기 2:24절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하셨으며, 이 말씀을 마태복음 19:5절에서 예수님께서 인용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교회에 관한 설명을 하면서 에베소서 5:31절에서 이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이처럼 부부가 하나 되어 이루는 가정은 교회 공동체에도 적용이 됩니다. 즉 가정과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루게 하신 함께 하는 공동체의 모범입니다. 여기에서 ‘함께 한다.’라는 것은 단순히 ‘같이 있다.’라는 것이 아니라 본문 2절 말씀인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라는 말씀처럼 모든 것에서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 어떻게 함께 하는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까?
지금처럼 개성이 강조되고, 개인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마음과 뜻을 함께하여 하나를 이룬다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라.’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루신 자기희생의 마음을 가져야 함께 하는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 비결을 본문 3-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사도 바울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과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는 관심이, 서로 하나를 이룰 수 있는 비결이라고 하십니다. 히브리서 10:24절에서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라고 했고, 12:15-16절에서는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라고 하십니다. 즉 서로에 대한 선한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돌아본다는 것은 지금 환경에서는 사생활의 침해나 간섭이 될 수 있어서 무척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지금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이 무관심으로 병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종 장애인 단체나 기아대책, 월드비젼 등의 단체에서 후원을 원하는 전화가 옵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 중에 “예전에는 기업체나 단체 등에서 연례적으로 하는 후원들도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끊어졌고, 개인 후원들도 거의 없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전염병 사태를 비롯하여 여러 면에서 어려움이 많기도 하지만, 그만큼 우리 사회가 서로에 대하여 관심을 잃어가고 각박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환경이나 상황에 좌우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생명을 주신 사랑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오히려 상황이 어려울 때 더욱 아름답게 빛나게 됩니다. 즉 우리는 자신의 권리나 이익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양보하면서 마땅한 권리라 할지라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함께 한다는 것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이익과 합당한 권리까지도 포기할 때 이루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훗날 자신이 받을 상급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18절입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이 마땅히 사용할 수 있는 권리까지도 포기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촛불이 불을 밝히려면 자신을 녹이고 태워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즉 자기희생이 없이는 아름다운 빛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이루신 생명의 길이 곧 자기희생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하여서 하나를 이루는 길 또한 자신을 버리고 비움으로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길에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힘들 때 서로 기댈 수 있고 아플 때 곁에 있어 줄 수 있고, 어려울 때 힘이 될 수 있으니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여행을 다녀보신 분을 알겠지만, 긴 여행에서 마음 맞는 동행이 있으면 기쁨이 배가 됩니다. 사랑은 혼자서 할 수가 없고, 맛있는 음식도 혼자는 맛이 없고, 멋진 영화도 혼자는 재미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옷도 보아 줄 사람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함께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욕심으로 가득 차 있을 때는 결코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 3-4절에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라고 하십니다. 자기 욕심은 자기만의 삶의 방향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함께하는 것은 한 방향을 같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동행은 목표가 같고, 목적지가 같을 때 가능합니다. 두 사람이나 혹 여러 사람이 함께할 때, 서로 자기 생각만을 고집한다면 결코 같은 방향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39-4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함께 봅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 말씀은 아마도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대단히 부담스러워할 것입니다. 지금 시대에 이렇게 산다는 것은 바보 취급당하기 딱 알맞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어느 시대에도 이렇게 사는 것이 쉬울 때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요구하신 것은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학생이 교수님에게 다소 어이없는 질문을 했습니다. “교수님,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는 어떻게 공부를 시작할 수 있습니까?” 우문현답(愚問賢答)이라고 했듯이, 교수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시늉(motion)이라도 내보면, 하고 싶은 마음(emotion)이 생길 걸세.”
아직은 하나님의 일을 잘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이 때로는 부담스럽고 익숙하지 못할지라도 흉내라도 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흉내를 내는 것, 즉 모방신앙을 통하여 시작됩니다. 여러분도 처음으로 신앙을 가졌을 때는 아무것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말을 듣고, 말씀을 듣고 배우면서 자신의 신앙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주님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영원한 생명의 삶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운동선수가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최후 승리의 기쁨을 얻기 위한 것이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도 영원한 소망을 얻기 위하여 이를 감내하며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같이하여 함께 할 때에 주님의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12:14절에서 이와 관련된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우리 목적지는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곳에 이르도록 서로 격려하며 한마음으로 함께 나아가는 진정한 영적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