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세상의 원리와 하나님의 원리
*** 세상의 원리와 하나님의 원리 / 고린도전서 1:22-31
고린도전서 1:22-31,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 들어가는 말
안쓰러운 이야기 하나로 말씀을 열겠습니다.
어느 부부가 사소한 싸움이 큰 싸움이 되어 서로 말을 하지 않고 꼭 해야 할 말이 있으면 글로 적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다음날 출장을 가게 되었고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야 했습니다. 혹시라도 차를 놓칠까 봐 어쩔 수 없이 아내에게 ‘내일 아침 5시에 깨워 줘요’라고 쪽지를 주었습니다. 이튿날, 남편이 아침 눈을 떠보니 벌써 7시가 훨씬 지나 있었습니다. 깨워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아내에게 화가 잔뜩 난 남편이 아내를 깨워서 따지려고 하는데 자신의 머리맡에 종이쪽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여보, 벌써 5시예요.”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서로의 다른 생각이 안쓰럽게 느껴지는 이야기입니다. 서로의 소통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사는 것이 꼭 이와 같습니다. ‘손바닥도 서로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라고 했듯이,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같아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똑똑하고 지혜롭고 재력 있고 재능이 많으면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이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것이 지혜이며 능력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잠언 9:10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라고 하십니다. 본문 22-24절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형통함이며 소망을 이루는 삶이 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의 원리를 살펴보려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고린도전후서 편지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활발한 교회였지만, 문제가 많아 바울을 계속 괴롭혔습니다. 본문이 있는 고린도전서에서는 그러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잘한 것은 칭찬하고, 잘못된 것은 철저한 복음적 관점으로 권면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교회 생활을 지도합니다. 특히 바울을 괴롭힌 것은 교회 내의 당파싸움이었습니다. 1:12-13절입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이처럼 파벌을 형성한 배경은 서로의 지혜를 자랑하며, 남을 배척하는 아집(我執)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임’을 말합니다. 참된 지혜와 능력은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시며, 성령에 의해 계시 된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사상적인 혼란함과 신앙의 혼탁함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꿩 잡는 것이 매다.”라는 말이 있듯이, 잘 살고 형통하고 출세하면 좋은 신앙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번영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성공원리가 교회에까지 침투하여 마치 그것이 좋은 신앙의 표본인 것처럼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원리를 따라가면 잠깐은 잘 되는 것처럼 여겨지겠지만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도 없고, 그리스도인이 원하는 영원한 소망에 이를 수도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2:13-14절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 이 시대에 사는 우리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오마주(Hommage)’라는 말을 아십니까? 이 단어는 프랑스어로 감사, 존경, 경의를 뜻하는 말입니다. 특히 이 말은 ‘영상예술에서 어떤 작품의 장면을 차용함으로써 그 감독에 대한 존경의 표시를 나타내는 행위’를 뜻합니다. 즉 자신이 영향을 받은 영화의 특정 장면을 자신의 영화에 응용하거나 존경하는 감독의 영화 장면을 자신의 영화 속에 삽입하여 존경을 표하는 것입니다. 특정한 감독의 스타일에 대한 오마주도 있습니다.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 장르에도 쓰이는 오마주는 존경을 표현하는 점에서 패러디나 표절과는 다릅니다. 이제는 문화, 예술, 기능 등 ‘모든 분야에서 존경하는 이들의 것을 발전 승화시켜 나가는 모든 것’들을 포괄적으로 '오마주' 라 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서로 존경하고 모방하면서 발전해갑니다. 이런 면에서 영적인 오마주도 있습니다. 즉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존경하며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삶 모방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그렇게 살다가는 바보 취급받거나, 손해만 겪게 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의 시대에는 육신적으로는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지만, 영적으로는 고결한 아름다움으로 세상의 본이 되고 예수님 닮기를 힘썼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육신적으로는 부족함 없이 살면서도 영적으로는 예수님을 점점 더 멀리합니다. 이렇게 영적인 퇴보를 부추긴 주범 중의 하나는 ‘분별력의 부재’입니다. 자신의 인생 경험과 지식을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의 기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13절 말씀에서 그 예를 보여줍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이 말이 왜 잘 못 되었습니까? 14절에서 지적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단 몇 초 앞에 일어날 일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일 년 후의 일을 장담하고 있으니 잘 못 된 것입니다. 이를 두고 ‘자기 확신’ 혹은 ‘분별력의 부재’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며, 매일 접하는 정보만 하더라도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엄청난 양입니다. 이런 때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상황과 환경에 흔들리지 않을 영적인 기준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 기준은 마치 쉼 없이 불어대는 바람과 출렁이는 파도에도 떠내려가지 않도록 고정하는 닻과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념(理念)의 혼란과 정보(情報)의 홍수, 삶의 질을 높이려는 욕구, 질병과 건강에 대한 염려 등. 생각하고 대처할 것들이 너무나 많아서 영의 생명에 관심 가질 여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인류는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잊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22-23절을 봅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세상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원리가 어리석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리보다는 세상의 원리가 더 지혜롭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십니까? 본문 27-28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지혜롭고, 강하고, 고귀하고, 부자라고 여기는 사람을 버리신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두고 ‘교만’이라고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자신을 의지하고 세상의 원리를 따르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자기 뜻대로 살도록 버려두십니다. 시편 81:10-12절을 봅시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하였으나,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예전에 전도할 때에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는데? 차라리 내 주먹이나 믿지!” 그런데 자신이 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 중에도 이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행동으로 이렇게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21절에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기준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마음을 두고 따라야 합니다.
※ 어떤 것이 하나님의 기준으로 사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기준을 적용하는 대표적인 사례를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5:4-5절을 봅시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대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실 때 일어났던 이적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호숫가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실 때였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다가 막 항구에 도착한 베드로의 배를 잠시 빌렸습니다. 말씀을 전하신 후에 배 주인인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지난밤에 고기를 잡지 못하고 빈 배로 왔다는 것을 아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며 대답합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이 말은 ‘자신들의 지식과 능력 모든 것을 동원하여 그물질했음에도 불구하고 허탕을 쳤지만, 선생님 말씀을 믿고 다시 그물을 내려 보겠다.’라는 뜻입니다. 즉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의지하는 기준을 버리고, 주님의 기준을 따라 보겠다.’라는 표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준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지혜를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길을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금까지 수십 년을 살아온 자기 삶의 경험과 비결(祕訣, know-how)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라는 말이 있듯이, 자신의 경험과 쌓아 온 인생의 비결을 내려놓고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주님의 법을 따르기는 어렵지만, 그 결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결실과 능력을 이루게 합니다. 이 표본으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5-11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즉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이 마음을 품으라.’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심으로 이루신 명예와 권세를 우리에게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따르기 어려워하는 우리를 위하여 다 계획이 있으십니다.
어느 목동이 수백 마리의 양 떼를 몰고 마을 실개천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양 떼를 안전하게 마을로 이끌기 위해서는 실개천을 지나야 했습니다. 먼저 목동이 실개천을 건너갔습니다. 하지만, 물을 싫어하는 양들은 목동이 건너가는 것을 보고도 실개천 끝자락에서 어찌할 바 모르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를 지켜보던 한 아이가 다가와 목동에게 물었습니다. “이 많은 양 떼를 몰고 어떻게 건널 수 있나요?” 그러자 목동이 양 떼 무리에서 새끼 양 한 마리를 자신의 어깨에 둘러메곤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생각보다 아주 간단하단다!” 목동은 둘러맨 새끼 양 한 마리와 함께 성큼성큼 실개천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순간, 어미 양이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며 목동 뒤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신호가 되어 수백 마리의 양들이 일제히 물속으로 뛰어들어 무사히 건너가기 시작했고 한 마리의 양도 빠짐없이 건너편으로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양은 온순한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두려움도 많고 고집도 세서 제멋대로인 동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새끼에 대한 어미의 사랑과 보호 본능은 눈앞에 놓인 어떠한 장애물과 두려움도 능히 이기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때로는 이렇게 자녀들을 대하십니다. 앞의 장애물이 두려워 나아가기를 망설이는 성도들에게 그들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가지고 앞서가십니다. 이 소중한 것은 각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떻든 그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하여 주님을 따르게 하십니다. 그 좋은 예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20-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하지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기준으로 산다는 것은 양이 주인을 따르는 것처럼, 앞서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만을 자랑하고 따름으로써 주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우리의 삶에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