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선택과 결과
*** 선택과 결과 / 사도행전 1:15-26
사도행전 1:15-26, “15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 들어가는 말
그리스 신화의 영웅 헤라클레스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힘을 보였습니다. 아버지 안피트리온은 그런 아들의 힘에 놀라 키타론 산으로 그를 보내 소 떼를 돌보게 했습니다. 어느 날 헤라클레스가 소 떼를 풀어두고 풀밭에 누워서 자신의 앞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 간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헤라클레스는 갈림길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욕망이라는 여자와 미덕이라는 여자가 각각 양쪽 갈림길에서 헤라클레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욕망이란 여인은 ‘자신과 함께 간다면 아주 쉽게 욕망을 마음껏 채울 수 있다.’라고 말하며 헤라클레스에게 손짓했습니다. 반면에 미덕이라는 여인은 ‘자신을 따르는 길은 고난과 고통이 있지만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두 개의 갈림길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헤라클레스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망설이다가 힘들어도 참된 행복의 길로 가기를 결심하며 꿈에서 깹니다. 이것을 '헤라클레스의 선택'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매일 무엇인가를 선택하게 되고 그 결과를 보게 됩니다. 어떤 결과는 당장 나타나지만 어떤 결과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나타나기도 합니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이 어떤 것을 선택할 때에 자신의 경험이나 자신이 생각하는 관점을 따르게 됩니다. 관점이란, 내 마음이 향하는 방향을 말합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자신만의 삶의 색깔 즉 생활 스타일(life style)입니다. 생활 스타일은 음식, 옷, 음악, 드라마, 영화, 주택, 자동차 등 천차만별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그 사람의 life style로 성격과 심리를 파악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이 원하는 생활 스타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하여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고 추구하는 삶의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잠언 16:9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라고 하시며, 19:21절에서는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할 때에는 하나님의 뜻에 민감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을 만나셔서 마지막 당부를 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의 일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대로 제자들과 성도들 백 이십여 명이 모여서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때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팔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던 가룟 유다를 언급하면서, 한 자리가 비어버린 사도의 자리를 메워야 할 것을 제안합니다. 베드로는 사도가 될 수 있는 조건으로 본문 21-22절에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초기부터 하늘로 올라가신 때까지 함께 했던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사도로 보충하겠다는 것입니다. 모인 성도들이 베드로의 제안에 찬성하여 사도의 조건에 합당한 두 사람을 추천했고, 제비로 선택하여 맛디아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이 내용에서 주의해서 보아야 할 대목이 본문 25절 후반절인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라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둘도 없이 귀한 자리를 스스로 버리고 세상의 재물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는 더 참혹합니다. 구약에서 이미 예고된 말씀을 인용한 내용인 본문 20절에서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이는 저주이며 멸망의 자리이고, 자신에게 주어졌던 고귀하고 영원한 영광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우리에게서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의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정치인들이나 성도들, 심지어는 목회자들까지도 영광스러운 자리를 세상의 권세와 재물과 바꾸어버리는 상황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우리는 그러하지 않아야 합니다.
※ 선택의 기준을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자신이 선택한 관점으로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적이든지 영적인 것이든지 어느 쪽이든 분명히 우리가 사는 방향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에서 ‘재물을 섬긴다.’라는 말은 ‘재물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따라간다.’라는 뜻입니다. 이 재물은 자신이 좋아하는 세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적인 것이든지 하나님이든지 둘 중의 하나는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고 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은 ‘세상 재물이나 세상의 것 모두를 멀리하거나 추구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5:9-10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숭배 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세상의 것을 전혀 추구하지 않으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 삶의 관점을 세상에 두지 말고 하나님께 두며 영원한 것을 우선으로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즉 모든 선택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며 영원한 것에 두라는 뜻입니다.
‘삼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현상에 대한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실험을 해 본 내용입니다.
도시의 큰 도로에 건널목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건널목의 중간 지점에 서서 팔을 들어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하늘을 향해 무엇인가를 보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양방향으로 지나가지만 아무도 관심 두지를 않습니다. 잠시 후에 한 사람이 더 서서 두 사람이 같은 모양으로 하늘을 보고 있습니다. 역시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간간이 한, 두 사람이 그 사람들을 이상한 듯이 쳐다보며 지나갈 뿐입니다. 한 사람이 더 가세해서 세 사람이 같은 모양으로 하늘을 쳐다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이 볼 때까지 아무도 관심 두지 않던 사람들이 세 사람이 보자 거의 모든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같이 하늘을 쳐다보며 무엇인가를 찾으며 웅성거립니다.
이를 두고 군중심리(群衆心理)라고 합니다. 하늘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처럼 세 사람만 의기투합해도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휩쓸리게 됩니다. 이 삼의 법칙 현상을 좋지 않은 면으로 본다면, 이런 군중심리를 사탄이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까지도 판단력을 흐리게 하여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정말 주의해야 할 선택입니다. 이 삼의 법칙을 좋은 면으로 본다면 ‘교회가 힘을 모아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전도서 4:12절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사탄이 군중심리를 사용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마지막 때에는 힘을 모아서 세상의 세력을 대항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악한 영적 세력들은 과거에 아담과 하와를 속여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판단을 의지하게 하여 선악과를 먹게 했던 것을 반복하게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판단이나 군중심리를 따라가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면 안 됩니다. 어떤 것이든지 선택하기 전에 먼저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그리스도인인 내가 해도 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선악과가 아니라 생명 열매입니다. 선악과는 불순종이지만, 생명 열매를 선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택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30:15-16절을 봅시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잃어버린 인간들에게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주셨습니다. 즉 에덴동산의 생명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 길은 성전입니다. 성전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잃어버린 생명을 회복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구약의 율법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사람이 없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2:19-21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이 성전 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는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생명 열매를 선택한다는 것은 새롭게 열어놓으신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즉 우리 생활의 모든 선택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 내가 선택한 것의 결과를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현대신학의 거장인 미국 신학자 ‘라인홀드 니이버’의 기도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을 주시고, 내 힘으로 고칠 수 있는 일에 대하여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며, 그리고 이 두 가지 차이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우리가 세상에서 살다가 보면 우리의 한계를 벗어난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변화시킬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는 일에 대해서 불평하고, 속상해하고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니이버는 이러한 일을 평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영국의 ‘조지 5세’는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달의 세계나 엎질러진 우유에 대해 울지 않도록 가르쳐 주옵소서.”라는 좌우명을 벽에 걸어놓고 지표로 삼았다고 합니다. 즉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불가항력적인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순복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한계를 알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복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조차 환경이나 상황을 탓하며 포기하고 체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용기가 아니라, 비겁한 일이고 나약한 태도일 뿐입니다. 그래서 니이버는 “내 힘으로 고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즉 자신에게 어렵고 힘겨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고칠 수 있는 일이고, 고쳐야 하는 일이라면 담대하게 행할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삶의 결과를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사는 길입니다. 본문의 가룟 유다의 삶은 영광된 길로 시작했다가 스스로 죽음을 택해야만 했던 파멸의 길로 마쳤습니다. 이 길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며 강제로 가게 한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선택한 결과였습니다. 유다서 1:5-7절을 봅시다.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역사 속에서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알려주시며 우리의 거울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인정하든지 하지 않든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행한 말과 모든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10-14절을 봅시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우리의 결론은 다시 오실 주님을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게 되면 결단코 잘못된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다시 오실 예수님과 그의 나라를 기준으로 삼아서 후회를 남기지 않는 행복한 결과를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