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만드십시오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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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9-09 17:15
*** 행복을 만드십시오. / 로마서 15:1-7
로마서 15:1-7, “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 들어가는 말
교회 설립 기념주일에 어떤 말씀을 주실까! 하고 고심하다가 지금 우리의 삶에서 꼭 찾았으면 하는 ‘행복’이 떠올랐습니다. ‘행복!’ 마음이 훈훈해지는 말이지요! 여러분은 자신이 가장 행복해 지는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행복의 척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돈이 많아서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건강해서 행복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족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고, 성공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가난하지만 서로를 아껴주는 가족이 있어서 행복하다고 하며,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지만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의 즐거움을 가장 많이 누렸던 솔로몬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잠언 15:17절입니다.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리고 17:1절에서는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런 것이 행복이다.’라고 꼭 집어서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시간에는 우리 신앙인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행복인지를 말씀 속에서 찾아보려 합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독히도 불행하게 살았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지냈는데 어느 날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길을 가는데 어느 가게에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다 판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여인은 너무 좋아서 ‘최고의 행복을 사서 다시는 불행해하지 않으리라.’ 결심했습니다. 한달음에 가게로 들어가서는 “마음의 사랑과 평화, 지혜와 행복, 그리고 온갖 걱정을 다 털어버리게 해주세요.”
이 말을 들은 주인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부인, 뭔가 잘못 아신 것 같은데 우리 가게는 열매를 파는 것이 아니라 씨앗만 팔아요.”
아무 노력도 없이 최고의 행복만 가지려 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교훈입니다. 행복은 우연히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것입니다. 사막이 처음부터 사막은 아닙니다. 아무리 토질이 좋은 옥토라 할지라도 물이 없으면 사막이 됩니다. 사람도 처음부터 악한 사람은 없습니다. 옛말에 “일등 답(畓)이 아니라 일등 작인(作人)이라.”고 했습니다. 즉 ‘좋은 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옥토가 박토가 될 수도 있고 박토가 옥토가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처첩을 천 명이나 두었으며 모든 것을 다 누렸던 솔로몬이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전도서 12:13절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즉 ‘하나님 안에 참된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 행복을 어떻게 만듭니까?
앞에서 행복은 만드는 것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행복을 만듭니까? 시골에 가면 천수답(天水畓)이라고 하는 논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로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그런 논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곳에도 자그마한 저수지를 만들고 수로를 내고 땅을 기름지게 만들어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옛말에 “낟알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습니다. 즉 ‘곡식 한 포기 채소 한 포기도 주인의 관심을 먹고 자란다.’는 것입니다. 한 번 김을 매는 것과 두 번 매는 것이 다르고, 두 번 매는 것과 세 번 매는 것은 그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아무리 메마르고 칙칙한 곳이라도 그곳을 밝게 해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로인하여 가정이 달라지고 일터가 달라지고 세상이 분명 달라집니다. 비록 한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뜻을 같이 하려는 노력이 없으면 인생의 행복도 만족도 가질 수 없습니다. 본문 5-7절을 봅시다.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행복의 첫걸음은 뜻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뜻을 같이 할 수 있습니까?
어느 교회에서 여전도회가 봉사 겸 자체 사업비도 마련할 겸, 커피자판기를 교회 식당에 설치했습니다. 여전도회원 중에서 한 권사님이 관리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성도들의 요구사항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달다, 쓰다, 설탕이 많다, 적다, 커피 양이 많다, 적다, 프림이 많다, 적다…” 얼마나 말이 많은지 책임자가 몇 달 만에 커피 사업을 포기하고 자판기를 치워버렸다고 합니다.
뜻을 같이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자신의 방식들을 조금씩 양보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사용하는 동행(同行)이라는 말은 ‘같이 간다’는 뜻 보다는 ‘같은 방향으로 간다.’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뜻을 같이 한다.’는 말도 ‘생각의 방향을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인사말인 ‘샬롬’이라는 말은 ‘평화’ ‘화평’이라는 뜻이지만, ‘하나 됨’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평화는 마음과 뜻이 하나를 이룰 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말씀에서 로마 교회를 이루고 있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서로 뜻을 같이 하는 것이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게 되지만 교회도 분열 없는 행복을 이루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뜻을 같이 하게 하여 주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어디에 염구를 두고 말한 것일까요? 빌립보서 2:2-3절을 봅시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습니다. 이 권면의 모델을 바로 아래에서 제시합니다. 5-8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가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할 것은 자신을 낮추시는 겸손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참 행복을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양보하고 손해되는 것까지도 감수해야 합니다. 서로 자신을 주장하면서 양보하는 것이 없다면 결코 하나 될 수가 없으며,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하면 분열과 불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로마서 14:1-4절을 봅시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니라.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우리가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모든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들이 각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판단하시고 헤아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서로의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방법이며 행복을 만들 수 있는 첫걸음입니다.
※ 하나를 이루는 행복은 능력을 배가시킵니다.
한자말에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이 있지요.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화목한 사람은 공부에서나 일에서나 안정감과 탁월한 능률을 올린다고 합니다. 반면에 가정이 불화로 가득하면 자살률이 높아지고, 두말할 것도 없이 공부나 일의 능률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잠언 21:19절에서는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과 교회가 서로 갈라지고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서로가 뜻을 같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옛말에도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가정이든지 교회든지 일터이든지 어떤 공동체든 서로의 생각과 뜻만을 주장하면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수십만 톤짜리의 거대한 유조선이 순조롭게 항해할 수 있는 비결은 한 가지입니다. 방향을 조절하는 키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키가 배에 비하여 없는 것처럼 작은 것이지만 하나이든지 둘이든지 동시에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배가 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이든지 교회든지 어떤 공동체라도 구성원들이 뜻을 같이해야 다툼 없이 힘이 있고 능력이 더해집니다.
오래 전에 미국의 다카다스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다카다스의 밀밭은 수천 명의 추수꾼들이 며칠을 걸려서 추수를 해야 할 정도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다고 합니다. 밀 추수 때가 되어서 추수를 할 때였습니다. 어느 날, 추수하는 부모를 따라온 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밀밭에서 뛰어 놀고 있었습니다. 해가 질 무렵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어서 만 세 살 된 아이 하나가 없어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들이 놀던 근처를 미친 듯이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그 넓은 곳에서 아이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천 명의 추수꾼들이 함께 밀밭을 뒤지며 밤새워 찾았지만 아이를 찾지 못했습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역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우리 마지막으로 다 같이 손을 잡고 일렬횡대를 만들어서 각자의 발밑만 살펴보면서 찾아봅시다.”
고 했습니다. 모두가 찬성하여 아이들이 놀던 곳을 중심으로 일렬횡대로 서서 손을 잡고 나아갔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여기 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이미 죽은 후였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안으면서 “수고들 했어요. 그런데 처음부터 이렇게 손을 잡고 함께 찾았더라면 내 아이가 죽기 전에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라고 말꼬리를 흐리며 울음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전도서 4:12절에서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맛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두고 뜻을 같이 하면 가정이든 교회이든 직장이든 어떤 공동체이든지 산이라도 옮길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8:19-20절에서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앞으로 점점 더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워지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신앙을 잘 지켜서 행복한 결말을 기대한다면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뜻을 같이해야 합니다. 교회가 뜻을 같이해야 합니다. 서로 이해할 수 없고, 생각이 달라도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이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쁘게 서로 만날 사람임을 생각하면서 한 발 양보하고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조금 더 손해보고 내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을 만드는 길이며,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길입니다. 행복은 만드는 것도 중요하고 어렵지만 지켜가는 것은 더 중요하고 더 어렵습니다. 자신의 뜻만 내세우면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뜻에 맞춰주기만을 바라면 뜻이 같아질 수도 없고 행복은 멀어집니다. 하지만 서로서로가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하면서 뜻을 모은다면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서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하십니다. 시대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져도 서로가 아끼고 위해주는 가정과 교회와 이웃이 있다면 잘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앞으로의 삶이 더욱 행복을 이루고 나눌 수 있도록 서로 아끼고 위하는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서도록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모든 공동체 생활에서 서로 뜻을 같이하여 행복한 생애를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