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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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3-15 20:14
***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 요한복음 14:16-21
요한복음 14:16-20,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들어가는 말
‘기적을 사고 싶어요.’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올라온 동영상 이야기입니다.
한창 바쁜 약국의 점심시간, 7-8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녀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와서 작은 젤리 통을 약사에게 내밀었습니다. “내 동생이 많이 아파요 수술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데요. 그래서 … 기적을 사러 왔어요.” 약사는 피식 웃으며 “하지만 꼬마야, 우린 기적을 팔지 않아요.” “여기는 아픈 사람을 낫게 해주는 약을 파니까 기족도 팔지 않나요? 저 돈 있어요! 보세요!” 소녀는 서둘러 뚜껑을 열다가 손이 미끄러져 버렸습니다. 바닥으로 떨어진 젤리 통 … 사방으로 쏟아진 동전들… 소녀는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있었습니다. 소녀가 생각합니다. 지난 밤, 소녀의 아빠는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아이를 살리려면 이젠 기적이 필요해…” ‘아빠는 기적이 필요하댔어! 내가 그걸 가져가면 동생이 나을 수 있어!’
그렇게 동전을 줍고 있던 소녀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습니다. “울지마렴 꼬마야, 동생이 많이 아프니?” “머릿속에 나쁜 게 살고 있대요. 기적은 얼마예요? 어디서 살 수 있어요?” 남자는 소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얼마를 가지고 왔니?” 소녀의 젤리 통에는 겨우 1달러 11센트가 전부였습니다. 남자는 젤리 통과 소녀의 작은 손을 꼭 잡았습니다. “1달러 11센트면 충분하단다. 우리 같이 동생을 만나러 가볼까?” 소녀는 남자와 함께 집으로 향했습니다. 남자는 소녀의 가족에게 인사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기적이 왔습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칼튼 암스트롱’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뇌수술 전문의였습니다. 남자는 소녀의 동생을 자신의 병원으로 옮겼고 10시간의 대 수술이 다행히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소녀의 부모는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저는 1달러 11센트나 받았답니다. 게다가 꼬마가 아끼던 젤리 통까지 받았으니 그걸로 충분합니다.”
기적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소녀의 믿음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소녀는 기적을 살 수 있다는 신념으로 정말 기적처럼 뇌수술 전문의를 만났습니다. 소녀의 순수한 믿음이 기적을 만났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도 이러한 신념이 있습니다. 그 신념으로 자신의 소망을 이루고자 하지요.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가진 신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실제적인 능력의 주이신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본문 16-17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친히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혀 사용하고 있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활 속에서 믿고 경험합니까? 이 시간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본문말씀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본문 앞쪽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본문에서는 성령 하나님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제 곧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제물이 되셔야 할 예수님께서 자신을 대신하여 성령님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즉 예수께서는 육체적으로는 제자들을 떠나겠지만 그 자리에 성령님이 오셔서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은 사도 요한만 사용한 용어인데 ‘조력자’(공동번역-‘협조자’)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보혜사로 표현한 것은 예수님과 동등하신 또 다른 하나님을 뜻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사역이 단순히 성도들을 돕는 것만이 아닌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보증이 되십니다. 고린도후서 1:22절에서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17절에서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별적 임재를 의미합니다. 즉 성령님께서는 내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20절의 “그 날”은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의미합니다. 즉 성령님께서 임재하실 그 날(오순절)에는 성령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는 성령님의 임재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본문 16-17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여러분은 생활 속에서 성령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경말씀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합니까? 아직 성령님의 존재나 임재하심에 대하여 확실한 믿음이 없는 분도 계시지요? 이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는지를 확신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래서 중요합니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를 알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을 진정으로 ‘나의 주인’ 즉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이 고백을 하신다면 성령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시는 때가 언제입니까? 사도행전 2:38-39절을 봅시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이 말씀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는 때는 ‘내가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은 때’입니다. 세례가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세례는 죄를 씻고 거듭났다는 의미입니다. 회개란 내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행하였던 모든 행위를 예수님께 아뢰고 용서를 구하며, 그 불신의 길에서 떠나 예수님을 나를 구원하신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양자로 삼아주시고 그 보증으로 성령님을 보내주십니다. 요한일서 1: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사실은 우리 육신이 생명을 다하는 마지막 호흡할 때까지 확실하게 잡고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3:14절을 봅시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그리고 요한계시록 2:26절입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이 말씀처럼 하나님의 자녀 된 명분은 이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지켜야 합니다. 이삭의 장남인 에서처럼 배고프다고 한 그릇 팥죽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리고 결국 장자의 복을 빼앗겼던 것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즉 이 세상에서 육신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이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하나님 자녀 된 명분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것입니다.
※ 내 생활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이렇게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확실하게 믿으면 이제는 실제로 생활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동행해야 합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통장에만 넣어두면 아무런 능력도 가치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아무리 지혜롭고 능력 있고 재능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본문 21절을 봅시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제로 활동하시도록 해야 하나님의 사랑도, 능력도 내 생활에서 실제로 나타나게 됨을 말씀합니다.
어느 등산을 좋아하는 기업가가 일상을 떠나 겨울 산으로 등산을 떠났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산을 오르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겨울의 짧은 해가 저물고 갑자기 눈보라까지 쳐서 ‘이러다가 얼어 죽겠다.’고 생각할 때 멀리서 작은 불빛이 보였습니다. 힘들게 겨우 찾아간 집은 작고 초라한 초가집이었습니다. 문을 두드리자 할머니가 나왔습니다. 그는 집 안에 들어가자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할머니가 자신을 간호하고 있었습니다. 죄송해하는 그에게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눈보라가 멈추고 산을 내려가려면 며칠은 더 있어야 한다오.” 그리고는 “나도 자네만한 아들이 있었다오, 지금은 이 세상에 없지만 … 이 놈의 산이 문제요, 이 놈의 산이 변덕이라 …”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할머니는 아들을 대하듯이 정성으로 보살펴 주었고 가난한 할머니의 겨울 양식으로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는 어느 기업의 회장이었습니다. 그가 떠나는 날, 할머니의 정성에 조금이라도 보답해 드리고 싶어서 다 쓰러져 가는 집을 새로 지을 수 있을 만큼의 큰돈을 백지 수표에 적어서 봉투에 넣어 할머니에게 드렸습니다. “이게 뭐요?”라고 묻는 할머니에게 그는 “이것이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실 수 있을 거예요.”라며 그 집을 떠났습니다.
겨울이 지난 이른 봄에 그 회장은 지난겨울의 악몽도 떨쳐버리고 그 할머니가 잘 계시는지도 궁금하여 다시 그 산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 집은 변한 것 없이 그대로였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할머니는 방에 누운 채 부패해 가고 있었습니다. 아마 지난겨울의 추위와 굶주림으로 동사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거액이 적힌 수표와 봉투는 문의 구멍 난 곳에 붙어 있었습니다. 회장은 사후 처리를 잘 해드리고 할머니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가장 귀한 것이라도 깨닫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이 없다.”
수표는 그 기업가에게는 보배였지만 산 속에서 사는 할머니에게는 그저 바람 막는 종이에 불과했습니다. 호세아 4:14절에서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거나 하나님께 내 삶을 맡기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전히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고, 기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의 특징이 기쁨과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뒤쪽의 27절을 봅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리고 16:24절입니다. “지금까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여러분의 생활을 여러분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잠언 16:3절에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4:35-41절에는 ‘바람과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이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 지역에서 갈릴리 동쪽 광야지역으로 가시려고 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배의 뒤쪽에서 잠이 드셨습니다. 그 사이 갈릴리 호수에 큰 풍랑이 일면서 도저히 노를 저을 수 없도록 험하고 배에 물까지 들어찼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로 잔뼈가 굵은 제자들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일어나신 예수님은 바람과 풍랑을 향하여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령하셨고 즉시 바람도 그치고 물결도 잔잔해졌습니다. 이 사건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예수님이 함께 하셔도 예수님께 맡기지 않으면 그저 인생이 힘들뿐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 맡기면 세상의 어떤 풍랑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내 생활에 역사하시도록 여러분의 삶을 맡기십시오. 어떻게 맡깁니까? 기도할 수 있잖아요. 기도로 하나님께 자신의 일을 아뢰고 인도하시도록 맡기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알도록 성경말씀을 매일 꾸준히 읽고 묵상하십시오.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생활을 인도해 주시도록 맡기십시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심을 확실하게 믿고 육신이 생명을 다하는 마지막 호흡할 때까지 확실하게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내 생활에 역사하시도록 삶을 맡겨야 합니다. 이 일을 가장 확실하게 지켜가는 길이 매일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삶을 주님께 맡겨서 모든 삶이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하며,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믿음을 지켜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요한복음 14:16-20,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들어가는 말
‘기적을 사고 싶어요.’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올라온 동영상 이야기입니다.
한창 바쁜 약국의 점심시간, 7-8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녀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와서 작은 젤리 통을 약사에게 내밀었습니다. “내 동생이 많이 아파요 수술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데요. 그래서 … 기적을 사러 왔어요.” 약사는 피식 웃으며 “하지만 꼬마야, 우린 기적을 팔지 않아요.” “여기는 아픈 사람을 낫게 해주는 약을 파니까 기족도 팔지 않나요? 저 돈 있어요! 보세요!” 소녀는 서둘러 뚜껑을 열다가 손이 미끄러져 버렸습니다. 바닥으로 떨어진 젤리 통 … 사방으로 쏟아진 동전들… 소녀는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있었습니다. 소녀가 생각합니다. 지난 밤, 소녀의 아빠는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아이를 살리려면 이젠 기적이 필요해…” ‘아빠는 기적이 필요하댔어! 내가 그걸 가져가면 동생이 나을 수 있어!’
그렇게 동전을 줍고 있던 소녀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습니다. “울지마렴 꼬마야, 동생이 많이 아프니?” “머릿속에 나쁜 게 살고 있대요. 기적은 얼마예요? 어디서 살 수 있어요?” 남자는 소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얼마를 가지고 왔니?” 소녀의 젤리 통에는 겨우 1달러 11센트가 전부였습니다. 남자는 젤리 통과 소녀의 작은 손을 꼭 잡았습니다. “1달러 11센트면 충분하단다. 우리 같이 동생을 만나러 가볼까?” 소녀는 남자와 함께 집으로 향했습니다. 남자는 소녀의 가족에게 인사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기적이 왔습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칼튼 암스트롱’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뇌수술 전문의였습니다. 남자는 소녀의 동생을 자신의 병원으로 옮겼고 10시간의 대 수술이 다행히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소녀의 부모는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저는 1달러 11센트나 받았답니다. 게다가 꼬마가 아끼던 젤리 통까지 받았으니 그걸로 충분합니다.”
기적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소녀의 믿음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소녀는 기적을 살 수 있다는 신념으로 정말 기적처럼 뇌수술 전문의를 만났습니다. 소녀의 순수한 믿음이 기적을 만났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도 이러한 신념이 있습니다. 그 신념으로 자신의 소망을 이루고자 하지요.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가진 신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실제적인 능력의 주이신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본문 16-17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친히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혀 사용하고 있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활 속에서 믿고 경험합니까? 이 시간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본문말씀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본문 앞쪽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본문에서는 성령 하나님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제 곧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제물이 되셔야 할 예수님께서 자신을 대신하여 성령님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즉 예수께서는 육체적으로는 제자들을 떠나겠지만 그 자리에 성령님이 오셔서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은 사도 요한만 사용한 용어인데 ‘조력자’(공동번역-‘협조자’)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보혜사로 표현한 것은 예수님과 동등하신 또 다른 하나님을 뜻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사역이 단순히 성도들을 돕는 것만이 아닌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보증이 되십니다. 고린도후서 1:22절에서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17절에서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별적 임재를 의미합니다. 즉 성령님께서는 내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20절의 “그 날”은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의미합니다. 즉 성령님께서 임재하실 그 날(오순절)에는 성령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는 성령님의 임재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본문 16-17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여러분은 생활 속에서 성령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경말씀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합니까? 아직 성령님의 존재나 임재하심에 대하여 확실한 믿음이 없는 분도 계시지요? 이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는지를 확신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래서 중요합니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를 알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을 진정으로 ‘나의 주인’ 즉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이 고백을 하신다면 성령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시는 때가 언제입니까? 사도행전 2:38-39절을 봅시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이 말씀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는 때는 ‘내가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은 때’입니다. 세례가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세례는 죄를 씻고 거듭났다는 의미입니다. 회개란 내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행하였던 모든 행위를 예수님께 아뢰고 용서를 구하며, 그 불신의 길에서 떠나 예수님을 나를 구원하신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양자로 삼아주시고 그 보증으로 성령님을 보내주십니다. 요한일서 1: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사실은 우리 육신이 생명을 다하는 마지막 호흡할 때까지 확실하게 잡고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3:14절을 봅시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그리고 요한계시록 2:26절입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이 말씀처럼 하나님의 자녀 된 명분은 이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지켜야 합니다. 이삭의 장남인 에서처럼 배고프다고 한 그릇 팥죽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리고 결국 장자의 복을 빼앗겼던 것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즉 이 세상에서 육신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이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하나님 자녀 된 명분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것입니다.
※ 내 생활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이렇게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확실하게 믿으면 이제는 실제로 생활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동행해야 합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통장에만 넣어두면 아무런 능력도 가치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아무리 지혜롭고 능력 있고 재능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본문 21절을 봅시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제로 활동하시도록 해야 하나님의 사랑도, 능력도 내 생활에서 실제로 나타나게 됨을 말씀합니다.
어느 등산을 좋아하는 기업가가 일상을 떠나 겨울 산으로 등산을 떠났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산을 오르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겨울의 짧은 해가 저물고 갑자기 눈보라까지 쳐서 ‘이러다가 얼어 죽겠다.’고 생각할 때 멀리서 작은 불빛이 보였습니다. 힘들게 겨우 찾아간 집은 작고 초라한 초가집이었습니다. 문을 두드리자 할머니가 나왔습니다. 그는 집 안에 들어가자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할머니가 자신을 간호하고 있었습니다. 죄송해하는 그에게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눈보라가 멈추고 산을 내려가려면 며칠은 더 있어야 한다오.” 그리고는 “나도 자네만한 아들이 있었다오, 지금은 이 세상에 없지만 … 이 놈의 산이 문제요, 이 놈의 산이 변덕이라 …”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할머니는 아들을 대하듯이 정성으로 보살펴 주었고 가난한 할머니의 겨울 양식으로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는 어느 기업의 회장이었습니다. 그가 떠나는 날, 할머니의 정성에 조금이라도 보답해 드리고 싶어서 다 쓰러져 가는 집을 새로 지을 수 있을 만큼의 큰돈을 백지 수표에 적어서 봉투에 넣어 할머니에게 드렸습니다. “이게 뭐요?”라고 묻는 할머니에게 그는 “이것이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실 수 있을 거예요.”라며 그 집을 떠났습니다.
겨울이 지난 이른 봄에 그 회장은 지난겨울의 악몽도 떨쳐버리고 그 할머니가 잘 계시는지도 궁금하여 다시 그 산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 집은 변한 것 없이 그대로였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할머니는 방에 누운 채 부패해 가고 있었습니다. 아마 지난겨울의 추위와 굶주림으로 동사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거액이 적힌 수표와 봉투는 문의 구멍 난 곳에 붙어 있었습니다. 회장은 사후 처리를 잘 해드리고 할머니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가장 귀한 것이라도 깨닫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이 없다.”
수표는 그 기업가에게는 보배였지만 산 속에서 사는 할머니에게는 그저 바람 막는 종이에 불과했습니다. 호세아 4:14절에서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거나 하나님께 내 삶을 맡기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전히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고, 기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의 특징이 기쁨과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뒤쪽의 27절을 봅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리고 16:24절입니다. “지금까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여러분의 생활을 여러분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잠언 16:3절에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4:35-41절에는 ‘바람과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이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 지역에서 갈릴리 동쪽 광야지역으로 가시려고 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배의 뒤쪽에서 잠이 드셨습니다. 그 사이 갈릴리 호수에 큰 풍랑이 일면서 도저히 노를 저을 수 없도록 험하고 배에 물까지 들어찼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로 잔뼈가 굵은 제자들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일어나신 예수님은 바람과 풍랑을 향하여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령하셨고 즉시 바람도 그치고 물결도 잔잔해졌습니다. 이 사건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예수님이 함께 하셔도 예수님께 맡기지 않으면 그저 인생이 힘들뿐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 맡기면 세상의 어떤 풍랑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내 생활에 역사하시도록 여러분의 삶을 맡기십시오. 어떻게 맡깁니까? 기도할 수 있잖아요. 기도로 하나님께 자신의 일을 아뢰고 인도하시도록 맡기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알도록 성경말씀을 매일 꾸준히 읽고 묵상하십시오.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생활을 인도해 주시도록 맡기십시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심을 확실하게 믿고 육신이 생명을 다하는 마지막 호흡할 때까지 확실하게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내 생활에 역사하시도록 삶을 맡겨야 합니다. 이 일을 가장 확실하게 지켜가는 길이 매일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삶을 주님께 맡겨서 모든 삶이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하며,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믿음을 지켜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