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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녀야 할 영성 5 - 소망과 기쁨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515회 작성일 2022-02-22 20:11

*** 우리가 지녀야 할 영성 5  - 소망과 기쁨 / 히브리서 6:9-12

 

히브리서 6:9-12,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 들어가는 말

 

오늘로 다섯 주째 우리가 지녀야 할 영성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영성’이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하게 지녀야 할 행동하는 영적 성품’을 말합니다. 오늘은 다섯 번째 시간으로 ‘소망과 기쁨’에 대하여 살펴보려 합니다. 첫 번째 영성으로 ‘믿음의 영성’을, 두 번째 영성으로 ‘하나 됨의 영성’, 세 번째로 ‘오래 참음의 영성’, 지난주 네 번째 영성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최상의 영성인 ‘사랑과 순종’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의 영성인 ‘소망과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영성(靈性) 가운데 단짝 친구이며, 둘 다 그리스도인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비타민과 같은 활력소입니다. 왜냐하면, 소망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박해와 고통과 어려움의 시기를 살았던 믿음의 선조들이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게 한 것이 곧 소망입니다. 본문 다음에 나오는 17-19절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소망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게 하는 닻과 같습니다. 그리고 기쁨이 소망과 단짝을 이루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소망하는 성도에게 나타나는 외적인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천국의 소망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이루는 것입니다.

 

※ 본문 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의 앞부분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두 종류의 결말을 보여주십니다. 7-8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이 말씀에서 “”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하며, “자주 내리는 비”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성령의 역사하심’을 말씀합니다. 즉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두 종류의 삶을 살게 되며 각각의 결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한 종류는 받은 은혜에 합당하게 생활하여 좋은 결과를 이루었지만, 다른 종류는 쓸모없는 결과만을 나타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판이한 두 결과에 대하여 각각 보응(報應) 하십니다. 좋은 쪽을 본다면 10절에서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삶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고 봉사하는 생활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삶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소망의 풍성함을 이루게 하며’, 결국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게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우리의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오늘을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봉사와 섬김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 우리가 가져야 할 소망과 기쁨은 어떤 것입니까?

 

‘슈바이처’ 박사는 현대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프리카에는 물 없는 강이 많습니다. 모래 언덕 사이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 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할 만큼 초라하고 비참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물 없는 강처럼 억지로 흘러가는 신앙생활, 메마른 정신, 형식과 전통만 겨우 유지하는 교회를 많이 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의 신앙이 아니라, 지옥을 면하려 마지못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성도(聖徒)의 그리스도인 됨은 ‘참된 소망’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소망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소망은 어떤 것입니까? 로마서 8:21-23절을 봅시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표류하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닻과 같은 참된 소망을 알려주십니다. 그 소망은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며,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영원한 자유와 영광의 삶인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소망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즐겁게 하는 기쁨이 되겠습니까?

 

어느 날, 유명한 목사님의 아들인 청년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청년은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아버님은 은퇴하셨는데, 전과 다름없이 늘 화가 나 계신 것 같고, 또 우울해하십니다.”라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목사님은 어쩐지 불길한 느낌을 주는 청년의 말에 놀라 차근차근 이유를 캐물었습니다. 청년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늘 일에 중독되어 살았던 아버지가 자신을 실패자로 여기고,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신다.”라고 했습니다. 청년의 아버지는 목회하는 동안 줄곧 성도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자신보다 더 훌륭한 목회를 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작은 도시의 목사님은 이 경우와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분이 섬기는 교회는 마을 공용 건물을 빌려서 예배했고. 그의 차는 털털거리는 낡은 차였으며, 트레일러를 개조해서 만든 사택 역시 낡아 빠지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제게는 좋은 아내가 있고, 섬길 교회가 있고, 또 햇빛 비치는 일 년 365일의 날들이 있으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활도 변변치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기까지 했습니다.

 

이 두 경우에서의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목회의 이유, 삶의 이유, 참된 소망의 유무(有無)가 차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환경이나 여건, 성공과 실패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나라를 소망하는 삶이 기쁨입니다. ‘막스 러너’라고 하는 사람이 텔레비전 대담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행동의 제재를 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충격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생각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면서도 기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기쁨을 잊어버린 현대인들에 대한 탄식입니다. 이는 마치 맛있는 음식을 처음 먹을 때는 감사하고 즐겁지만, 계속 먹으면 결국, 감사도 기쁨도 사라지고 질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신앙 초기에는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가 감사하고 기쁨이 충만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한 것처럼 여겨서 감각이 둔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며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 어떻게 주님에 대한 소망과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며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관심을 가집니까? 우리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나 취미가 있다면, 항상 그것이 생각나고 하고 싶어집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주님을 좋아한다면, 주님과 교제하고 싶어지고 주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싶어집니다. 반대로 주님과의 교제를 멀리하고 말씀을 멀리하면 자연히 주님에 관한 관심이 멀어지고 기쁨도 사라집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기쁨이 사라진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퇴색되고 무관심해짐을 나타내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세상의 기쁨이 아닌 주님의 기쁨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15:11절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라.”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풍기는 기쁨은 세상 사람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예수께서 주시는 특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은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다.’라고 마음으로 느껴지는 일들이 자주 있습니까?

 

세상의 즐거움과 흥분, 모험을 찾아 한평생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해보지 않은 일이라고는 없을 정도로 온갖 일을 다 했습니다. 스페인에서는 투우사가 되었고,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전선(戰線)에서는 구급차 운전병으로 일했습니다. 그리스와 터키 전쟁에서는 종군기자로 일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사냥꾼이 되어 사자와 코끼리를 사냥했습니다. 쿠바에서는 군수 공장을 경영하는 사업가로 수완을 발휘하며, 틈틈이 바다낚시를 즐겼습니다. 파리에서는 특파원으로 일했으며, 파리와 스페인을 무대로 한 소설작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탄 비행기가 두 번씩이나 추락했지만 살아남았으며, 세 번 이혼하고 네 번 결혼했습니다. 그가 쓴 한 소설 작품의 첫머리에는 이런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 말라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 하나가 나둥그러져 있다. 과연 표범은 그 높은 산봉우리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는 마침내 1954년 노벨 문학상 수상(受賞)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62세가 되던 해인 1961년 7월 미국 아이다호의 자택에서 그가 애용하던 사냥총으로 스스로 생명을 끊었습니다. 자신이 쓴 소설의 주인공처럼 그는 정상의 산봉우리에서 쓰러져 피 흘리는 표범의 운명이 된 것입니다. 이 작가는 ‘킬리만자로의 눈’,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노인과 바다’ 등. 수많은 명작을 남긴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입니다.

 

그는 한평생 인생의 기쁨, 곧 스릴을 찾아 도전했고 또 어느 정도 그 기쁨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도전할 것도, 찾아낼 기쁨도 고갈되자 더는 살아야 할 의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가 헤밍웨이처럼 다양한 삶과 다양한 기쁨을 누려보았겠습니까? 그런 생각이나 해보았겠습니까? 그러나 이보다 더하여 온 세상을 다 헤집고 다닌다 해도 세상에서는 영원한 소망도 기쁨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1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말씀처럼, 나의 소소한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대로 순종하여 실천함이 참된 소망을 이루며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길입니다.

 

혹시 이 말씀을 들으면서, ‘아휴,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주님만 생각하고 주님 뜻만 따라갈 수 있나?! 세상이 그렇지 않은걸.’이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5:10절에서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숭배 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담쌓고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억지로 그리스도인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살려면 너무 힘들어서 소망이나 기쁨은 고사하고 숨이 막혀 살아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숨이 막히도록 계명에 얽매여 살게 하지 않으십니다. 갈라디아서 5: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어떤 자유입니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하지만 자유에는 분명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환기하시면서 13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라고 하셨으며, 베드로전서 2:16절에서도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라고 하십니다. 즉 내 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매 삶의 순간을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첫 시간과 마지막 시간을 주님과 교제의 시간으로 하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교제 안에 있으면 진정으로 자유롭습니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8:31-32절에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 때, 본문 10-12절의 내용처럼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삶을 이룰 수 있으며, 주님이 주시는 기쁨의 삶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세상이 점점 혼탁해지고 있습니다. 온 세계가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을 잃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영적인 무감각과 불안과 불평과 원망, 짜증이 내 생활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 회복과 주님 안에서의 생활에 열정과 관심을 가져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기쁨과 능력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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