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항상 지녀야 할 영성 1
*** 항상 지녀야 할 영성 1 / 마태복음 14:25-33
마태복음 14:25-33,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외출할 때, 항상 지니고 가는 것이 있지요? 예컨대, 현금이나 카드와 같이 필요에 따라 지불(支拂)할 수 있는 재화(財貨)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믿음’이라는 카드입니다. 지금 이야기하려는 믿음은, 세상적 신뢰와는 다른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를 말합니다. 야고보서 1:6-8절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그리고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전적인 신뢰입니다. ‘두 마음’이란, 육신적인 계산과 영적인 신뢰가 뒤섞인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내가 원하는 그 어떤 것에도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이,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이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영성(靈性)입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물 위를 걸으신 이적’ 이야기입니다. 이 이적은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성인 남성 오천 명을 먹이신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내시는 동안 제자들을 벳세다에서 갈릴리 호수 건너편 게네사렛 땅으로 보내셨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배를 저어 호수를 건너고 있을 때, 예수님은 홀로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밤이 되자 갈릴리 호수는 강한 바람이 일어나서 제자들이 힘겹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이를 아신 예수께서 새벽 3시가 지난 한밤중에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가셨습니다. 한편, 힘들게 노 젓던 제자들은 캄캄한 밤중에 무엇인가 호수 위를 걸어오는 물체를 보았습니다. 제자들에게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유령이다.” 이 한 마디가 당시 제자들의 두려운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를 아신 예수께서 즉시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라며 제자들의 마음을 안심시키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미심쩍은 마음으로 반신반의할 때, 베드로가 나서서 확인 작업을 합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예수님은 간단하게 “오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즉시 물 위로 뛰어내렸으며, 물 위를 걸어 예수께로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이었고,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포말(泡沫)을 일으키며 일어나는 파도를 보자 그만 두려움이 재발했습니다. 베드로에게 두려움이 일어나는 순간 그는 물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건져 올리시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됩니다.
이 이적 이야기를 자세하게 풀어 말한 이유는, 지금의 우리가 매일 겪는 일상의 일들에도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임을 느껴보기 위함입니다. 당장 우리 앞에 있는 상황인 전염병 사태만 하더라도 그러합니다. 제자들을 힘들게 하고 두려움에 떨게 했던 갈릴리 호수의 풍랑과 캄캄한 밤중에 다가오는 미확인 물체처럼, 전염병 사태는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 치 앞도 가늠하기 어려운 국가의 운명도 제자들이 당면했던 환경과 비견(比肩)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항상 우리를 지켜보시며 돕는 분이신 예수님을 신뢰하라.’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오.
※ 우리가 지니고 있어야 할 믿음의 영성은 어떤 것입니까?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만일 큰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나는 반드시 나을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한다면 그 병이 낫겠습니까?” 물론 그 사람이 “나는 나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낫게 해 주실 것이다.”라는 희망과 믿음이 있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면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만 가지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기도만 하고 있다면, 과연 그 병이 낫겠습니까?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을 지나실 때, 소경 둘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질렀으며(마 9:27),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가셨을 때, 가나안 여자(수로보니게 여인)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소리치며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예수께서 그녀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라고 경멸적인 무시를 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자는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와서 절하며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며 예수께 매달렸습니다(마 15:21-28).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 길가에서 구걸하던 소경 둘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냅다 소리쳤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마 20:29-34)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시끄럽다고 그들을 억압했지만, 두 소경은 더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마 20:30-31). 혈루증으로 예수님의 겉옷을 몰래 만졌던 여인도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아 죽을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예수께 다가갔습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에 가셨을 때,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달라고 찾아왔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찾아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소망을 이루어 받았습니다. 이런 맥락으로 성경을 읽으시면 자신의 소망을 이루었던 사람들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공통점은 ‘예수님을 온전하게 믿었을 뿐만 아니라. 믿음을 행동으로 옮겼다.’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께서 자신을 또는 자녀를 고친다고 믿었으며, 그 믿음을 주변의 방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타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들은 믿음이 없었으며, 잠시 믿음을 가졌고 행동했지만, 주변 환경에 억눌려 의심했습니다.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열정이 없이는 주님의 능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지녀야 할 믿음은 ‘예수님을 온전하게 믿는 것과 그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예수께서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너의 믿음을 나타내 보이라.”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보기를 원하시는 믿음은 행동으로 그 믿음을 나타내는 진정한 믿음입니다.
※ 그러면 어떻게 이런 믿음의 영성을 보일 수 있습니까?
미국 남침례교 학장을 역임한 ‘스카보로’라는 유명한 박사님의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박사님의 어린 아들이 학교에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와서 아버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정말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고 믿으세요? 과학적으로 얼른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그 이야기를 말예요.” 이때 스카보로 박사님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들아, 나는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는 사실을 믿는단다. 그뿐만 아니라, 만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나에게 물고기를 삼키게 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면 나는 그대로 믿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그 일이 왜 불가능하겠니.”
믿음의 영성의 기본은 스키보로 박사의 표현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오라.”였습니다. 이것은 ‘와도 좋다.’는 허락이 아니라, ‘나를 믿고 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고 싶으면 해도 좋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라는 명령입니다. 만일 그 명령을 불편하게 생각하여 듣지 않게 되면 생명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실 때, 혹은 사람들에게 어떤 임무를 주시거나, 병을 고치실 때도 ‘순종’과 ‘거역’의 자리를 두고 기다리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고기 잡는 어부들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기다리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만나신 38년 된 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라고 하시고는 역시 기다리셨습니다. 이사야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도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시고는 기다리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의 순종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38년 된 병자나, 이사야 선지자나 모두 ‘별 싱거운 사람 다 보겠네.’라며 무시할 수도 있고, 그 말씀을 신뢰하고 그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서 즉시 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싶어 하시는 믿음을 보이는 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생각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는 믿음을 말하면서도 생활에서는 전혀 행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2:14절에서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묻습니다. 많은 성도가 지금도 “오라.”고 하시는 주님의 명령을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면서 순종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마음으로 “주님, 조금 더 확신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십시오. 증거를 보여주십시오.”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물 위를 걸어와도 빠지지 않게 하겠다.’라는 어떤 설명도 증거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오라.”는 명령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싶어 하시는 믿음은 어떤 환경이나 증거로 인하여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은 증거가 사라지고, 환경이 변하면 따라서 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으며,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만났다.’라는 말을 믿지 않고 ‘증거를 보아야 믿겠다.’라고 했습니다. 8일 후에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은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하시며,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마처럼 꼼꼼하게 따지고 계산하여 순종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조건 없는 믿음의 순종’을 원하십니다. 신앙은 과학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과학을 초월합니다. 신앙은 초과학의 세계, 초자연적인 영역까지도 다룹니다. 신앙에서 초자연적인 영역을 제거하면 신앙은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의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여 행동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믿습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세상적인 불신을 극복하고 이기도록 순종하는 믿음을 구하여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지만, 주님과 함께라면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이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이 이적에 앞서 있었던 ‘오병이어의 이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적은 제자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눈앞에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 오천여 명, 전체로 하며 일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고서도,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여 두려움으로 물에 침몰했던 것입니다.
종말의 때를 사는 우리는 열 처녀의 비유처럼, 어느 날 느닷없이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도록 믿음의 영성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믿음을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11:12절에서 세례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가만히 있어도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차지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유명한 책을 쓴 독일의 경건한 그리스도인인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절대 허송세월하지 말라. 책을 읽든지, 글을 쓰든지, 기도하든지, 명상하든지 또는 공익을 위하여 노력하든지 항상 무엇인가를 하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면 주어진 생명과 시간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물고기를 잡으려면 낚시를 던지든지, 그물을 치든지, 통발을 놓든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도서 11:6절입니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에서 주어진 시간과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여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하는 믿음의 영성입니다. 이런 믿음을 나타내는 생활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