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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랑, 나의 사랑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2,395회 작성일 2021-12-05 23:01

*** 예수님의 사랑, 나의 사랑 / 로마서 8:31-39

 

로마서 8:31-39,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들어가는 말

 

지난 몇 주 전에도 같은 본문 말씀으로 ‘강인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었습니다. 이 시간에는 같은 본문 말씀이지만 ‘사랑과 평화, 헌신’이라는 주제를 잡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처음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기념하는 기간이어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과 이 사랑을 나타내야 할 우리의 삶을 생각해보기 위함입니다.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 말씀들이 많지만, 본문 말씀은 그 어느 말씀보다 강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강력한 사랑은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마무리합니다. 성경 말씀은 모두가 사람의 생명을 위한 말씀이지만, 본문 말씀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주시는 탁월한 말씀입니다. 사랑과 헌신이라면 헬렌 켈러 여사와 그의 맨토 앤 설리번 선생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헬렌 켈러’ 여사와 ‘앤 설리반’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합니다. 헬렌 켈러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삼중 장애를 딛고 일어선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술가입니다. 헬렌 켈러 여사는 평생 두고 잊을 수 없는 은사인 ‘앤 설리반’선생님에 대하여, “내가 만일 눈을 뜬다면 제일 먼저 설리반 선생님을 보고 싶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그분은 나를 한 인간으로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과학의 힘도, 철학의 힘도 아닙니다. 신념을 위해 자기 생명을 맡긴 사랑이 기적을 만든 것입니다. 맡긴다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탁월성에 대하여는 세상의 누구라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만큼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의 힘은 동물이든 식물이든 가리지 않고 작용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식물이나 동물을 키우는 곳에도 음악을 틀어주고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고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치료하는 ‘묘약’임에 틀림없습니다.

 

※ 먼저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로마에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생겨난 것은 아마도 오순절에 복음을 접한 ‘로마에서 온 사람들’에 의한 것이리라 추측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께서 임하셨던 일이 있었으며, 성도들의 성령 충만으로 말미암아 15개 나라의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 당시에 오순절을 지키려고 각 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들이 이 방언의 표적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언어로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중에는 ‘로마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10에서,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이라고 증언합니다. 이들이 복음을 듣고 돌아가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복음이 막 시작된 로마에는 신앙을 가르치고 지도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기독교의 초기였으며, 이방 세력이 강력한 도시였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기초부터 튼튼하게 세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율법과 복음의 차이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는 율법과 복음에 대한 설명이 많으며,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된 과정까지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에 가장 적격인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이어서 율법에 정통했으며, 헬라문화에도 정통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이렇게 바울을 통하여 로마교회를 든든하게 세워야 할 이유는 곧 다가오게 될 혹독한 박해와 핍박을 견딜 수 있도록 믿음의 담력과 용기를 심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상황을 생각하시고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시키며, 담대한 믿음의 담력을 주십니다. 본문 31절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강인한 마음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의 우리 상황과도 맞물려 있어서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 옛말에도 ‘내리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즉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사랑도 부모나 윗사람으로부터 자녀와 아랫사람으로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을 받아야 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보면서 ‘저 사람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구나.’라는 말을 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이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요한일서 3:16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사랑을 하려면 먼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확신해야 합니다. 이 사랑으로 가득해질 때,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토니 캄폴로(Tony Compolo)’목사의 신앙 간증록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캄폴로 목사님이 젊은 시절에 학생들의 ‘캠프 카운슬러(camp counselor, 신앙상담자)’로 사역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중학생들의 신앙캠프에서 뜨거운 신앙부흥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일이 있었습니다. 일의 발단은 ‘빌리’라고 하는 뇌성마비 학생이었습니다. 많은 학생이 ‘빌리’를 노리개로 삼았습니다. 온몸을 비틀면서 더듬더듬 천천히 말하는 빌리의 흉내를 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빌리’를 저녁 기도회 인도자로 세우면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기도회는 매일 저녁 각 숙소에서 열리며 아이들이 인도하는데, 그날은 아이들이 ‘빌리’를 인도자로 내세운 것입니다. ‘빌리’의 더듬는 모습을 보려고 재미로 내세운 것입니다. 기도회 시간이 되어서 빌리가 입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사랑해요… 나도…예…수…님을…사랑…해요.”

이 짧은 말을 하는데 2-3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웃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빌리’의 말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그곳에 모인 학생들이 모두 각자가 예수를 따라 살기를 결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학생들의 신앙부흥을 위하여 이 캠프에서 많은 예산을 들여 유명한 운동선수와 슈퍼스타들을 초청하여 신앙간증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슈퍼스타들이 못한 일을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확신한 용기를 가진 뇌성마비 소년이 이룬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사랑이 제일이다.’라고 했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신앙의 최고의 덕목으로 사랑을 꼽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본문 33-35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세상에서 그 무엇도 대항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무적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사랑의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9-10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본문 32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과 함께 그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의 모든 것을 허락하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믿고 받아들이십시오. 그리하면 이 사랑이 내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 받은 사랑은 다시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권능은 다른 사람에게 나타낼 때, 현실화가 됩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18절에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권면합니다. 그래서 잠언 27:5절에서도 “면책(面責, 대면하여 책망함)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실천하는 사랑’ 즉, 사랑은 나타내고 표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에 있는 주립 종합대학교 연구팀이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우리를 따로 한 세 그룹의 흰쥐에게 먹이로 실험을 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우리에 한 마리만 넣었고, 홀로 먹이를 먹게 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우리에 다섯 마리가 어울려 먹이를 먹게 했습니다. 세 번째 그룹은 우리에 한 마리만 넣었지만, 먹이를 줄 때마다 사람이 애정을 쏟으며 직접 먹이를 주었습니다. 그 결과 첫 번째 그룹의 홀로 살던 쥐는 세포 활동이 둔화된 작은 뇌를 지닌 채 6백일을 살았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약간 무거운 뇌로 7백일 살았으며, 세 번째 그룹은 활발한 세포 활동을 보이는 무거운 뇌를 지니고 9백50일을 살았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어떤 무기보다 강하고, 어떤 약보다도 치료 효과가 뛰어납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가장 강력한 힘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동시에 자신의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정하는 짐승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죄를 씻기 위한 속죄 제물로 택하셨습니다. 이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일평생 죄에 매여 종노릇 하는 인생을 풀어서 자유롭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1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라고 하셨고, 5:13절에서는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과 자유로 지금까지 살아왔으며, 이 사랑을 헌신으로 생활 속에서 나타내어,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이어가야 합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듯이, 사랑도 나타내고 실천할 때 진정한 능력이 됩니다.

 

그러면, 사랑과 헌신을 어떻게 나타내야 합니까?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미리 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14-15절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 병든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병을 고치시며 함께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날을 생각하는 이 계절을 가장 의미 있게 하는 것은, 장식하고 캐럴을 부르면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헌신으로 섬기며 본을 보이신 그 일을 우리가 이어받아 계속하는 것입니다. 즉 나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이제는 내가 행하는 사랑으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사용할 줄 모르고 누릴 줄을 모르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주변의 환경이나 삶의 상황에 매여서 마음껏 누리도록 주신 이 큰 행복을 그냥 쌓아두고만 있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이제 우리도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행복을 누리며 내 가장 가까운 가족과 일가친척들, 친구들, 이웃들과 세상에 나타냅시다. 전도이든, 구제이든, 봉사이든, 섬김이든 어떤 형태로도 이웃에 대하여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으로 사랑과 평화의 계절인 연말이 우리 주님께 기쁨과 감동을 드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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