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창조적 신앙의 사람
*** 창조적 신앙의 사람 / 누가복음 5:33-39
누가복음 5:33-39,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 들어가는 말
오늘은 말씀 시작 전에 두뇌를 번쩍 깨우는 문제를 하나 풀어봅시다. 이 문제는 초등학생의 시험에 나온 창조력 문제입니다. 지금부터 잘 들으시고 계산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배에 양 26마리와 염소 10마리가 타고 있다면, 그 배 선장의 나이는 몇 살이겠습니까?’ 계산됩니까? 아리송하고 황당하지요? 그런데 이 문제의 답을 제대로 쓴 학생은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이 빈칸으로 두었다고 합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아무 숫자나 마음대로 쓰면 됩니다. 무슨 이런 문제가 있을까요? 이 문제를 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아이들의 창의적 생각을 저해하는 암기식 위주의 교육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목적이다.’ 저는 이 내용을 보면서 ‘우리 생각이 자신의 지식과 경험의 틀에 맞추어져 있어서 새로운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오랜 신앙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고정되어 버린 신앙의 틀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좋은 예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생각의 틀을 보여 주신 본문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하실 정도로 고질적인 신앙의 아집으로 뭉쳐있는 사람들입니다. 혹시 나는 나만의 신앙적 아집으로 뭉쳐져 있지는 않습니까? 이 시간 말씀을 통하여 점검해보고, 아집이 아니라 창조적인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 9:14-17, 마가복음 2:18-22에 모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상대로 한 금식 논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물은 이유는 유대인들이 지키는 금식일 때문입니다. 이 금식일에 경건한 유대인들은 금식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대답 대신에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혼인집 손님에 대한 비유’인데 본문 33-34절입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할 아리송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36-38절에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라는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신 새로운 시대를 위해 새로운 마음의 자리가 필요하다.’라는 것입니다. 즉 율법을 따르던 옛 시대에 젖어서 형식적인 금식을 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은혜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새로운 복음의 시대는 옛 율법의 관습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복음으로 채우는 새 삶이 필요했습니다.
예를 들어, 예전의 기계식 자동차 정비기술을 가진 사람이 컴퓨터로 제어되는 현재의 디지털식 자동차를 정비하려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 이해하기도 힘들 것입니다. 이처럼 옛 율법 시대와 새로운 복음의 시대는 이렇게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새로운 복음을 이해하기 위하여 성령 충만한 새로운 믿음과 사상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다른 두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의미심장한 구절이 본문에 있습니다. 39절의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옛 삶에 적응된 사람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루신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결단과 새로운 삶을 요구하지만, 선뜻 예수님의 뜻에 부응하려 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매일 새롭게 변화하고 성장하는 새로운 창조적 신앙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매일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창조적인 신앙의 사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 종말의 시대는 새로운 마음의 자리가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의 자리를 알려면, 먼저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현실적인 삶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자신의 현재의 삶에 맞추어지기 때문입니다. 어저께 몇 분의 동역자들과 이야기를 하던 중, 어느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OECD(경제 협력 개발 기구,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의 37개 가입국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답니다. 그 내용은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가지가 나왔는데, 의외로 미국에서는 1위가 ‘신앙’이라고 했는데, 우리나라는 무엇이었겠습니까? 37개국 중에서 유일하게 ‘돈’이라는 답변이 1위였습니다.” 즉 우리나라 국민이 현실적으로 가장 추구하는 것이 ‘돈이면 다 된다.’라는 생각입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 교우 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주식형제천개유(酒食兄弟千個有) 급난지붕일개무(急難之朋一個無)” 해석은 이렇습니다. ‘술 먹고 밥 먹을 때 형이니 동생이니 하는 친구는 천 명이나 있지만, 급하고 어려울 때 막상 나를 도와줄 친구는 한 사람도 없다.’ 역시 명심보감 성심 편에는 이런 글도 있습니다. “빈거요시무상식(貧居鬧市無相識)이요, 부주심산유원친(富住深山有遠親)이니라.” ‘가난하게 살면 번화한 시장 거리에 살아도 서로 아는 사람이 없고, 넉넉하게 살면 깊은 산 중에 살아도 먼 데서 찾아오는 친구가 있느니라.’ “인의진종빈처단(人義盡從貧處斷)이요, 세정변향유전가(世情便向有錢家)니라.” ‘사람의 의리는 다 가난한 데서 끊어지고, 세상의 인정은 곧 돈 있는 집으로 쏠리느니라.’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죽자고 돈을 모으고 남을 밟고서라도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며,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거짓이 진리처럼 통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전부가 이러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풍조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새로운 마음의 자리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로운 사상, 새로운 신앙’이며, “새 부대”는 사상이나 신앙이 담기는 ‘새로운 마음가짐, 새로운 사상의 틀’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먼저 준비해야 하는 순서는 새로운 마음가짐, 즉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틀입니다. 우리가 어떤 물질을 그릇에 담고자 할 때, 먼저 그 그릇을 준비해야 하듯이, 신앙도 그것이 담길 마음의 틀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예전에는 없었던 새 포도주로 표현된 복음적 신앙은, 새 부대로 표현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창조적인 마음의 틀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새로운 마음의 틀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변화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마음의 틀’을 꼬집은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복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현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록 영적인 삶이 중심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사회의 현상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즉 국가적인 정책이나 사회적인 현실의 문제에서 떠나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고린도전서 5:9-10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숭배 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우리는 세상과 담쌓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안에서 소금과 빛의 삶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마음의 자리가 필요합니다.
※ 우리가 가져야 할 창조적 신앙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에드워드 모트(E. Mote)’라는 37세 된 목수가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목수라기보다는 캐비닛 제조공입니다. 이 사람은 젊은 시절. 공장에서 일하면서 열등의식과 반항심. 원망 등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겨우 이런 공장에서 망치나 두들기며 일하다니… 우리 부모는 왜 나에게 이런 삶밖에 주지 못하는 걸까.” 이러한 원망어린 삶은 그에게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고 그에게 소망이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런던의 거리를 배회하다가 길가에 있는 자그마한 교회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마침 그날은 주일이었고 ‘존 하이야트’ 목사님이 요한복음 3장 말씀으로 ‘거듭남’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에드워드에게는 “그렇다. 나는 거듭나야 한다.”라는 강력한 소원이 일어났습니다. 그날 성령께서 그의 마음 문을 열어주셔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듭났습니다. 이렇게 거듭난 에드워드 모트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 망치는 이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망치는 이제 춤을 춘다. 그리고 내 눈동자는 생기가 돌고 내 마음 속에는 생수가 솟는다. 예수께서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이다. 나는 거듭났다.” 이제 그는 행복한 목공이 되었습니다. 그의 생은 점점 풍요로워졌습니다. 자기가 고용 되어 일하던 목공소가 자기의 소유가 되었으며 그 목공소는 점차 확장되었습니다. 그가 55세 되던 해, 그는 자기의 전 재산을 들여서 교회를 짓고 신학(神學)을 하여 목사안수를 받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첫날, 그는 주님께 대한 첫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향한 감사의 시를 지었습니다. 그 시가 찬송가 488장입니다(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똑같은 일이었지만, 그의 삶이 변화되기 전과 변화된 후의 관점은 전혀 달라졌습니다. 즉 그의 생각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창조적 신앙입니다. 이러한 삶의 변화가 없이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의 힘으로는 수많은 유혹과 미혹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영의 거듭남입니다. 영의 거듭남은 변화가 아니라 재창조이기 때문에 거듭난 사람의 삶이 이전과 전혀 달라지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겪었던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1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사람이 됩니다. 더 이상 전과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현대어성경)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거듭난 사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이전의 세상적인 삶에 젖어 살 수가 있습니다. 이를 두고 ‘영적인 침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침체의 시기가 길어지면 영이 질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새로운 창조적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즉 나의 영이 주님을 닮아가는 ‘새롭게 됨’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을 복종시키는 ‘육신의 삶의 변화’가 매일의 생활에서 새롭게 일어나야 합니다. 말씨가 달라지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합니다. 이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죽음을 경험하는 삶’이란, 자신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생활입니다. 즉 내 의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씀하신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 창조적 삶’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며, 세상에 낙을 두고 사는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오늘을 살지만 ‘미래를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16절에서는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미래를 보는 사람은 지금 현재의 생활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현재의 삶은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36-37절입니다.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이 말씀에서 새 옷과 낡은 옷,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를 말하는 이유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수도 없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지나온 삶을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지나온 길이나 지금의 삶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가 해야 할 창조적인 신앙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일을 대하는 것입니다. 지나간 일에 얽매이지 말고, 매일의 삶을 새롭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창조적인 오늘을 사는 복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